*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악의 연대기>

▲ 영화 <악의 연대기> ⓒ CJ 엔터테인먼트


지난 16일 저녁, 처음엔 제목이 <악의 연대기>라고 해서 무슨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고 극장으로 향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는 아내가 꼭 보라고 추천해 준 영화! 그러나 수염이 덕지덕지 묻어난 손현주의 스틸컷을 보면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새벽에 일어나 정화수 떠놓고 남편과 자식이 잘 되라고 빌던 우리네 어머니 심정으로 화장실에 가서 손을 닦고 상영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악의 연대기>라. 연대기(年代記)라 함은 '연대의 순서 즉, 시간을 따라 주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적은 글'을 뜻합니다. 영화 초반 비가 쏟아지는 달동네에서 한 아이가 경찰에 잡혀가는 아빠를 보며 울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뜻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 악의 시간적 동일 사건이 발생하겠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릴러 연기의 정석

영화 <악의 연대기> 최창식은 자신이 죽인 사람을 찾는 수사팀을 이끈다. 영화의 여러 컷에서 감독의 생각을 나타내는 장면이 짧게 교차한다.

▲ 영화 <악의 연대기> 최창식은 자신이 죽인 사람을 찾는 수사팀을 이끈다. 영화의 여러 컷에서 감독의 생각을 나타내는 장면이 짧게 교차한다. ⓒ CJ 엔터테인먼트


등장 인물들은 손현주, 마동석, 정원중, 최다니엘 등 두말할 수 없는 연기의 베테랑급들입니다. 여기에 박서준이 영화 데뷔작으로 <악의 연대기>를 선택했으니 선배들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죠.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매력은 절대 놓치지 않더군요. 순진하면서도 뭔가 영화의 주요 열쇠를 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 카메라에 자주 잡힙니다.

마동석이 영화의 전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손현주와 최다니엘은 부자연스럽게 눈의 초점을 흐리는가 하면 얼굴 근육을 부분별로 일그러뜨리는 등 스릴러 연기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특히 손현주는 그가 왜 이 시대 최고의 배우인지를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영화 <숨바꼭질>에서 이성을 잃고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그의 뒷모습이 여기에서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사회적 지위와 맞물린 가해자로서 그의 고뇌를 한껏 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최창식(손현주)은 영화 초반 경찰관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받으며 '특급 승진'을 앞두고 있습니다. 동료와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택시 기사에게 납치를 당하는 최창식 경감. 택시 기사와 격투 중 우연찮게 그를 죽이게 됩니다. 이튿날 아침, 그가 근무하는 경찰서 앞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어젯밤 최창식에 의해 죽은 사내가 대형 크레인에 목매 달려 있는 겁니다. 이 사건은 시민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됩니다. 최창식은 자신이 가해자임을 밝히려 여러 번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공교롭게 그는 서장에 의해 사건 책임자로 임명되고 자신을 추적하는 수사의 책임자가 됩니다. 

자각하지 않는 소시민의 태도가 가장 무서운 가해자

<악의 연대기>란 말은 영화 중반에 가서야 이해가 됩니다. 최창식의 고속 승진의 배경은 신입 경찰 당시 가졌던 패기와 정의감이 아니라, 강력계에서 15년간 잔뼈가 굵으며 이른바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운 겁니다. 바로 '관행'이죠. 정치인들이 검찰에 출두해 가장 많이 한다는 말이 '관행'이라죠?' 예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늘 그랬기 때문에 당사자들에게는 죄의식도 느낄 수 없을 뿐더러 '나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억울하다'는 핑계를 댑니다.

손현주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그는 최창식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고 합니다(관련기사 : 손현주 "지금도 나는 조연, 대학로 무대에 항상 미안). '소시민적 사고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며 세월의 때가 묻고 세상의 때가 묻는데, 그것을 그냥 넘기는 생활이 반복될 때 타락이 생기며 종국엔 가장 무서운 악을 탄생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악이란 선에 대한 반대 개념일 수 있지만, 그릇됨을 보고 침묵하는 것 또한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작게는 가정과 친구 관계에서, 이를 벗어나 공공 단체나 직장에서 관행이란 이유로 침묵하고 동조하는 것이 바로 악의 재생산을 촉진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중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최창식 역시 막내 형사 시절, 자신의 상관(현 경찰서장) 정원중 반장의 휘하에서 수사의 진도가 없음을 책망하는 상부의 지시를 견디다 못해 어쩔 수 없이 사건을 조작하는데 가담을 합니다. 당시 최창식은 막내의 위치에서 선배들에게 항의도 해보지만 묵살당합니다. 선배 형사들의 담합에 어쩔 수 없이 침묵한 거죠. 그리고 이후 그는 강력계에서 선배 형사들의 관행을 따라갑니다. 때론 침묵하며 때론 동조하며. 관행이란 게 참 무서운 것입니다. 조직의 밖에서 보면 범죄이지만, 안에서 보면 내부의 팀워크를 탄탄히 하고 선후배 간 끈끈한 정을 쌓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여기에서 죄의식은 사라지고 맙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혹은 "내가 입만 열면 다칠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내부의 관행이 외부로 드러나게 될 때, 우리가 뉴스에서 흔히 듣는 말입니다. 특히 군이나 경찰, 검찰처럼 폐쇄적이고 상하 규율을 중히 여기는 조직은 학연과 지연, 그리고 외부의 고위 인사와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조직의 와해를 막기 위해 내부 단속과 외부의 접근 차단 또한 엄격합니다.

영화에서도 최창식은 범죄자들의 사건을 축소 및 은폐하고 돈을 받아 윗선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음성적으로 받은 수백만 원대의 상품권을 부하들에게 흔쾌히 나누어 줍니다. 부하 직원에게는 존경받는 선배가 되고 상사에게는 믿음직하고 나의 성공을 위한 충실한 사냥개가 생기는 겁니다.

그릇된 신념은 악의 연대 고리를 더욱 굳게 만든다

영화 중반 최창식은 자신이 죽인 사람을 경찰서 앞 크레인에 매달았던 용의자를 추격하다 총으로 쏘아 죽이게 됩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경찰 서장은 꼭 그럴 수밖에 없었냐며 최창식을 질책합니다. 그러나 마동석을 비롯한 최창식의 휘하 동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대장'인 최창식을 두둔합니다. 다들 자기가 상황을 목격했으며 총을 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 눈물겨운 동료애입니다. 하지만 이 뜨거운 동지의식이 바로 <악의 연대기>를 지탱하는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그릇됨을 지적하지 않고 동료라는 이름으로 감싸는 것은 그에게 개과천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는 꼬이고 꼬여서 더 이상 풀 수 없는 매듭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매듭은 어떤 법과 상식과 정의로도 풀 수 없는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립니다.

이 <악의 연대기>는 수십 년 전의 사건을 시작으로 현재에도 같은 방식으로 악이 재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사건이라지만 이미 경찰 조직이 존재하는 한, 그 처음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이 사회에 깊이 박힌 '악의 연대기'의 시작이겠죠.

소시민적인 도덕 관념이 관행 혹은 가족의 이익과 충돌될 때 그의 도덕 관념은 국가를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죄의식이란 것도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제 아래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그것은 동료 관계를 가족처럼 여기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자는 영화의 개연성이나 반전 장치가 극적인 노림수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반전은 관람객의 가슴을 향한 것이 아니라 시선을 향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은 그 다음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뜨거운 가슴도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 가족을 볼 때가 그렇습니다. 동료 의식으로 똘똘 뭉친 기관, 즉 경찰과 검찰 같은 법 집행 기관이나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서야 하는 군이 그렇습니다. 정치권 역시 군과 검찰, 경찰 기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니 가히 인생사 9단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가슴은 진실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선은 진실을 외면하지 못 합니다. 뇌리에 남기 때문이죠. 최창식이 차동재(박서준)에게 조언했던 말이 있습니다.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팩트만 봐" 

그렇습니다. 차가운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일차적 시선으로 감각된 것을 증거로 팩트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길 때 순수했던 패기와 정의감이 사라질 것입니다.

악의 연대기 박서준 손현주 마동석 정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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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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