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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국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밥상도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이 시스템은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요? 한국인의 끼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오늘날의 음식문화 지형도를 살펴봅니다. 궁극적으로는 한국 노동자들의 '행복한 밥상'이 어떻게 가능할지 그 대안적 접근법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즐거운 식사가 도열해 있는 화사한 편의점
그녀는 평일 오전에 걸터앉아
하루 동안 견뎌야 할 중력을 가늠해본다
한 컵의 뜨거움,
수증기를 만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린다
컵라면을 먹다 말고 그녀는
국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채소를 바라본다
이제는 말라, 제대로 썩는 법조차 잃어버린 채소
그녀는 우걱우걱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조동범 <즐거운 식사>

익히 눈치 챘겠지만, 이것은 '즐거운' 식사가 아니다. 쓴웃음 짓게 만드는 지금, 여기의 자화상이다. 우리의 식사는 이렇게 컵라면 국물 위에서 표류한다. 방부 처리된 현대인의 노동과 삶을 대변하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일은 이 풍경이 바뀔 수 있을까. 절레절레.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뭔가 획기적으로 바뀌리란 희망은 가지지 않아도 좋다. 내일의 식사는 되레 더 나빠질 것이다. '유연화'(경영자 입장에서)라는 명분으로 노동의 질이 악화되듯 노동자의 밥상도 이에 비례할 것이다.

'내일 뭐 먹지?'라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축처럼 주어진 사료를 들이키는 시나리오는 끔찍하지만, 어느 날 내 밥상의 현실로 닥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이미 먹거리에 대한 감각을 잃고 사료에 익숙해졌으니까. 

노동자의 밥상은 왜 슬퍼졌는가?

방송계의 뜨거운 아이템인 '먹방'은 '노동'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먹방의 '이미지'만 소비할 뿐이다(사진 : 올리브 TV <테이스티 로드> 방송화면 갈무리)
 방송계의 뜨거운 아이템인 '먹방'은 '노동'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먹방의 '이미지'만 소비할 뿐이다(사진 : 올리브 TV <테이스티 로드> 방송화면 갈무리)
ⓒ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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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인간과 다른 동물의 식사는 차이를 보인다. 다른 동물은 배가 고파 먹지만 인간은 '식사' 자체를 위해서도 먹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인간은 음식을 먹는 것 자체를 즐긴다.

요즘 방송계의 가장 뜨거운 아이템인 '먹방'만 봐도 그것이 확연하다. '푸드 포르노'라는 비아냥도 뚫고 나간다. 오늘 무엇을 먹고, 지금 어떻게 먹는지가 궁금할 뿐이다(그래서 대부분의 먹방에서 '노동'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 유감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먹방의 '이미지'만 소비된다.

좀 더 시간을 앞으로 돌려보자. 노동자는 산업화와 함께 가장 부각된 계층이었다. 스스로 만들어 먹던 음식이었지만, 이도 다른 이들의 손에 의존하게 됐다. 내 입맛을 내가 결정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먹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산업화는 진전을 거듭했고, 이에 비례하여 노동자는 식품을 선별하는 감각을 차츰 잃었다. (임)노동은 먹거리에 대한 감각을 앗아갔다. 식사는 사료처럼 변해갔다. 식사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닌 노동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이 우선이 됐다. 그러니 내가 먹고 싶을 때나 배가 고플 때 먹지 못하고 노동현장의 흐름에 맞춘 식사를 한다. '삼시세끼'는 이렇게 산업화와도 관계를 맺는다.

다른 누군가가 식사를 위한 나의 노동을 대신해주는 것, 진짜 좋았을까. 그저 편안해진 것만은 아니었을까. 산업화가 도약대에 오른 20세기 안팎, 자본은 당대의 블루칩으로 먹거리를 지목하고 이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에서 1870~1900년대에 저질 우유 문제가 불거졌다. 문헌에 온 최초의 식품안전 논란이었다. 1880년대 여성들이 나서서 식품안전 운동을 펼쳤다. 과학자와 탐사기자나 작가들은 식품과 거대산업체의 '아삼육'을 파헤치고 폭로했다. 자본의 가두리 양식에 갇히지 않겠다는 저항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꿨다. 모든 저항과 운동은 꺾이고야 말았다. 전쟁 통에 힘을 발휘한 것은 '대용식품'이었다. 감각은 무뎌졌고, 맛은 사치였다. 식품첨가물, 즉석식품 등이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항복 선언. 이 대용식품은 순식간에 영역을 확장했다. 다이어트식품, 영양강화식품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거대 식품복합체의 입지도 커졌다. 생산에서 유통까지 모든 경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먹거리는 자본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커피(의 카페인)가 필요했듯 저질(이지만 이성을 마비시키는) 식품이 노동자를 버티게 했다. 자고로 부정·불량식품이 창궐할 때는 사람들이 좋은 것을 선별하는 능력과 감각을 잃는 시기다. 아니면 오랫동안 감각을 잃다 보니 좋은 것을 구별해내는 방법을 모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의 밥상은 햇반, 스팸, 컵라면으로 채워진다. 배는 충만하고, 좋고 나쁨에 대한 감별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처묵처묵', 먹는 즐거움은 없다. '즐거운 식사'라며 억지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수밖에.

어떤 음식을 선택할 것인가

반드시 이런 질문이 따른다. 그럼 도대체 뭘 먹어야 하는가?
 반드시 이런 질문이 따른다. 그럼 도대체 뭘 먹어야 하는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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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이런 질문이 따른다. 그럼 도대체 뭘 먹어야 하는가? 짜증 반 호기심 반. '그래서 어쩌자고'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이의 간극. 해법? 이런 방법도 제시할 만하겠다. 원래 모양을 간직한 신선한 식품을 구매하라.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는 모양에 민감하며, 진짜 맛을 모른 채 인공의 맛에 길들여졌거나 감각을 일깨우는 데 게으르다. 그런 식품을 사기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어쨌거나 먹는 일은 중요한 문제지만, 일상에서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사색 대신 검색만 익숙한 우리는 맛집(블로깅)만 들쑤시고 먹거리에 대한 진지한 사유는 시궁창으로 몰아넣었다. 식품안전, 좋은 재료 등은 끊임없이 강조되지만, 식품 전반의 체계나 음식 철학에 대한 논의는 미약하다. 특히 음식에 대해서라면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돌린다. 

어떤 먹거리를 선택하는가는 정치의 문제다. 편의점에서 햇반과 컵라면을 계속 먹을지, 아이들에게 좋은 재료로 만든 보편적 급식을 먹게 할지를 결정하는 당사자는 우리 각자다. 밥 한 그릇이 사회권의 기본임을 인식하는 일과 맛있는 것만 찾아다니는 탐식에 몰두하는 일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다.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회를 만든다. 즉 투표와 비슷하다. 태도는 선택을 이끌고, 그 선택은 결과에 차이를 드러낸다.

식품(먹거리)의 문제가 단순히 생존과 과학적인 논쟁으로 끝나선 안 된다. 그것은 정치·경제의 복잡한 쟁투에 놓여 있다. 음식의 의미가 단순히 맛, 다시 말해 텍스트 자체에 고정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음식의 생산과 소비의 복잡한 순환을 통해 가변적으로 구성된다. 단순히 어떤 음식을 선택하라는 말은 손쉬운 검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지점은 교육과 실습을 통해 음식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이를 통해 '음식시민'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이를 주변과 나누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내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아야 한다. 생산과 소비는 가까워야 한다. 둘 사이를 멀게 만듦으로써 자본가는 혼자 배를 불렸다. 공동 생산자가 돼야 하고 거대 식품복합체의 분리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직접 만들어먹는 일도 저항의 한 방법이다. 음식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사회의 생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식이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화감독 봉준호는 이것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 노점 노동자 송강호와 노숙자 아이는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나눈다. <마더>에서 되풀이되는 장면이 있다. 김혜자와 원빈의 백숙 식사 장면이다. <괴물>과 <마더>에 나온 그들은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관계임을 함의한다. 따라서 행복한 밥상은 어떤 음식이 올라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 역시 중요하다.

다시 물을 수 있겠다. 희망은 있는 것인가. 독일의 화가 막스 베크만은 1913년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쓴다. "인간은 1등급 돼지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00년이 넘은 지금, 막스가 일기장에 쓴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아니, 어쩌면 인간은 1등급에서 등급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내일 먹을 것이 오늘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되레 더 나빠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먹어야 산다. 먹기 전에 이것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어떤 노동이 가미되었는지 생각해보라. 1등급 돼지가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생산에서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장악한 거대 식품복합체의 자본질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치다. 최초의 식품안전 운동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안전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탐식을 막고자 했던 시민운동의 한 줄기였다. 나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제가 달라진다면 결과 역시 달라진다. 명민한 좌파 영화감독 켄 로치의 말을 곱씹는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경제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켄 로치)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이준수 기자는 노동자협동조합 '적정기업 ep coop'대표노동자입니다.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laborzine.laborparty.kr) 20호(2015년 5월)에 실렸습니다.



태그:#노동자,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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