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서대필' 사건으로 24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으로 24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씨.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기사 대체 : 5월 14일 오후 12시 15분]

"그렇지!"

14일 오전 10시 22분 대법원 1호 법정,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재판장 김창석 대법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청석에 있던 한 시민은 짧게 환호했다. 작게나마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유서대필'이라는 누명을 벗게 된 강기훈씨의 재심 무죄 확정 판결을 반기고 있었다.

이날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그가 1991년 5월 8일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린 고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던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국립과학연구원 필적 감정을 바탕으로 강씨가 유서를 쓰지 않았다고 본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재판장 권기훈 부장판사)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24년 전의 난리... '유서대필'은 없었다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기훈 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의 이부영 전 의원과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등 회원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무죄 확정에 기뻐하는 지인들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기훈 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의 이부영 전 의원과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등 회원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정확히 24년 전, 김기설씨는 "폭력살인만행 자행하는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고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했다. 경찰의 집단 구타에 명지대학교 신입생 강경대씨가 숨진 뒤 잇따른 '분신 정국'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망 직후, 검찰은 김씨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며 강기훈씨를 지목했다. 강씨는 결백을 항변했지만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에게 '자살방조죄 유죄'를 선고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과거사 정리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강씨는 재심을 청구할 기회를 얻게 된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는 김기설씨의 새로운 필적 자료를 바탕으로 강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며 재심을 권고했다. 강씨는 이듬해 곧바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의 더딘 결정으로 좀 더 기다려야 했다. 2009년 서울고법은 그의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지만 검찰의 항고로 강씨는 대법원까지 가서야 어렵게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았다. 그리고 2014년 2월 13일, 서울고법은 마침내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심리 과정에서 재판부는 다시 한 번 국과수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결과는 진실·화해위 조사 때와 비슷했다. 국과수는 김기설씨의 필적 자료들이 정자체와 흘림체가 섞여있어 면밀한 비교분석이 어렵지만, 필체와 상관없이 김씨만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했다. 국과수는 '본인이 직접 유서를 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분명 '유서대필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24년 전 이 사건이 정국을 뒤흔들었고, 강씨 본인은 오랫동안 주홍글씨를 견뎌야 했던 점을 볼 때 다소 황망한 결과이기도 했다.

"유서대필이 아니라 조작사건... 국가의 책임 묻겠다"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기훈 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환영의 뜻을 표하고 있다.
▲ 대법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무죄 확정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기훈 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환영의 뜻을 표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이날 강기훈씨는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강기훈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의 김선택 집행위원장은 "24년 동안 고통과 피해의식으로 간암에 걸리면서 언론에 오르고 하는 일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며 "3, 4일 전에 '어디 가 있겠다'고 한 뒤론 연락이 안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를 대신해 시민모임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중한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은 "(유서대필 사건은) 부당한 국가권력이 모의하고 폭력으로 날조, 조작한 것"인데도 당시 수사 담당 검사와 재판을 맡은 판사들은 여전히 "권력의 핵심에서 그 단맛을 즐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들은 일체 공적활동에서 물러나고 국민을 속이고 기만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시민모임은 또 "부당한 국가권력의 만행에 들러리 섰던 언론과 지식인들도 반성문을 쓰라"고 요구했다.

재심에 참여해온 송상교 변호사도 "무죄 판결은 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부터 이 사건을 '유서대필조작사건'으로 공식 명명해달라"며 "검찰은 일관되게, 사건 조작을 반성하기는커녕 강기훈씨가 새로운 증거를 만들어 조작한 사람이라고 강변했다"고 비판했다. 송 변호사는 "변호인단은 앞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작업을 해나갈 예정"이라며 국가배상금 청구소송 등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관련 기사]

[재심 첫 공판] '한국의 드레퓌스' 강기훈, 다시 법정에 서다
[재심 최후진술] "유서대필사건이 추억에서나 존재하길 바랍니다"
[재심 무죄①] 무죄 순간, 강기훈은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재심 무죄②] 무죄에도 담담한 강기훈 "검찰은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재심 무죄③] 김기설 아버지가 돈 받고 말 바꿨다? 막나가는 검찰
[재심 무죄④] '대필사건'도, '대필조작사건'도, 모두 국과수 작품
[재심 무죄⑤] 지금 더 잘나가는 '유서대필' 창작자들
[인터뷰] "검찰의 공소 자체가 문제" 강기훈과 23년, 변호사의 눈물
[인터뷰] "조작 가담자는 출세... 나는 '드레퓌스'가 아닙니다"
[타임라인] 강기훈의 23년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강기훈, #유서대필, #김기설, #재심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