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합법성쟁취투쟁제1차 합법성쟁취 투쟁을 어느 정도 성과 있게 마친 청계피복노조는 이어서 제2차 합법성 쟁취투쟁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지속적인 투쟁을 끊임없이 하기로 한 방침에 따라 미리 기획된 것이다.
제2차 투쟁은 10월 12일 오후 1시에 청계노조 합법성 쟁취대회를 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1차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시장 구름다리 아래를 향해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합법성 쟁취 투쟁을 준비하는 실무 팀들은 지난번 1차 대회 때 경찰의 배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고 분석했다. 평화시장 구름다리와 가장 가까운 곳 중 비교적 경비가 허술한 곳을 찾아 그곳을 점거한 뒤 평화시장을 향해 진격할 곳을 찾았다. 그 결과 을지로 5가 로터리 수도예식장 앞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곳은 근처에 중부시장이 있어 시위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중부시장에 흩어져 있다가 초동 선동의 신호에 맞추어 일시에 뛰쳐나오면 초동대오형성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투쟁 지도부는 하루 전날 밤에 주위 초동 대오가 형성될 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상황을 점검하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각자 준비 해온 드라이버로 보도블록을 살짝 빼놓는 작업을 했다. 그것은 다음날 경찰과 대치했을 때 보도블록을 쉽게 빼기 위해서였다. 경찰과 맞설 때 그것을 신속하게 빼서 깨뜨리면 훌륭한 짱돌이 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10월 12일 오후 1시가 되었다. 평화시장 일대는 시위진압 도구로 무장한 경찰의 철통같은 경비로 긴장이 팽팽했다.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 학생들은 어디를 봐도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미리 중부시장 주위에 뿔뿔이 흩어져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1시가 되자마자 시장 손님들 틈에 섞여 있던 김영대 청계노조 사무장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갑자기 을지로 5가 로터리 수도예식장 앞 광장으로 뛰어 나갔다. 이어서, 김영선, 이승숙, 이은숙, 한경렬 등이 플래카드를 들고 달려 나간다. 이들이 이번 투쟁의 선봉대를 맡았다. 이 신호에 맞춰 주위에 숨어있던 노동자 학생들이 순식간에 밀고 나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대오가 형성되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노동자 학생들은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청계노조 인정하라!""노동악법 개정하라!""노동삼권 보장하라!"이번에도 허를 찔린 경찰이 뒤늦게 벌떼처럼 밀려온다. 페퍼포그를 앞세운 이들은 지랄탄을 쏘아댄다. 지랄탄은 대열 사이를 뚫고 사람 바로 옆에서 터진다. 최루가스가 뽀얀 사이에서도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구호를 외치고 깃발을 흔들어댄다. 경찰은 메가폰을 들고 계속 구호를 외치고 있는 김영대 사무장을 주동자로 지목하고 그를 겨냥해서 최루탄을 직격탄으로 쏘았다. 순간 김영대가 들고 있던 메가폰이 직격탄에 맞아 날아가 버렸다. 이 직격탄이 그의 얼굴에 맞았으면 치명상을 입거나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날 경찰이 발사한 직격탄은 결국 고대생 임진수 학생의 머리를 맞혔다. 현장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임진수 학생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시위대는 경찰과 두어 시간 가량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이다 장충동 방향으로 밀리게 되었다. 대열이 밀려도 주동을 맡은 노동자와 학생들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버티었다. 특히 청계노조 주동자인 김영대, 김영선, 이승숙, 이은숙, 한경렬은 자욱한 최루가스 속에서도 끝까지 구호를 외치고 플래카드를 놓지 않았다. 이들은 개떼처럼 몰려오는 전경들의 군홧발에 짓이겨지면서 연행되었다. 이날 연행된 인원은 이들 노동자 5명 이외에 학생 27명이 더 있었다.
그런데 이날 작전상 예정에 없는 민종덕 위원장이 연행되는 일이 생겼다. 위원장은 시위를 마치고 난 뒤 지도부가 따로 만나 그날 투쟁을 평가하는 모임을 갖기 위해 신당동의 한 식당에 모이기로 한 장소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미행해 온 사복경찰들에 의해 연행된 것이다.
이소선은 예정에 없이 민종덕이 연행된 것에 당황했다. 조직의 대표인 위원장이 연행됨으로 해서 앞으로의 투쟁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가 되어서다. 이소선은 동대문경찰서에 쫓아가 노동자들의 연행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이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재야 각 단체에 노동자 석방을 호소하고 외국에서 파견된 기독교 단체 대표한테도 이들의 석방을 호소했다.
다행히 이날 연행된 인원 전원이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이들은 구류 29일을 받았으나 정식재판을 청구해 일찍 석방되었다.
청계노조 합법성 쟁취투쟁은 11월 13일 전태일 14주기 추도식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추도식을 마친 청계노조는 겨울동안 일단 투쟁을 멈추기로 했다. 투쟁을 한 템포 쉬면서 내부를 다지고 재충전을 하기 위함이었다.
택시기사 박종만 분신 사건그러나 당시 상황은 겨울이라고 해서 독재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이 멈출 리 없고, 노동자의 투쟁 역시 중단할 수 없었다.
청계노조는 11월 30일 1박 2일로 조합원 합숙교육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조간 신문에 1단 기사로 '민경교통 박종만씨 분신' 사건 보도가 났다. 이 기사를 본 청계노조 집행부는 즉각 상집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과 택시 회사인 '민경교통'이 노동자의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탄압하고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를 분신에 이르게 한 사건에 침묵할 수가 없다. 청계노조는 조합원 합숙교육을 취소하고 즉각 현장에 달려가 연대투쟁을 하기로 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이소선과 청계노조 간부들은 분신항의로 숨진 박종만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이소선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맨 먼저 달려가서 유족을 위로하고, 유족이 회사 측과 경찰 측의 회유에 넘어 가지 않도록 설득하는 것이 자신한테 주어진 운명적인 임무라고 생각했다.
분신으로 숨을 거둔 박종만은 1982년 10월 (주)민경교통에 입사했다. 그는 1983년 3월부터 노조 복지부장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회사측은 1984년 11월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노조 사무장을 해고시켰다. 노조간부들은 노조탄압에 항의하여 단식농성을 결의하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리어 농성자들을 해고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단식 밤샘농성 중이던 박종만은 11월 30일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더 이상 기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유서를 배차일지에 남기고 택시회사 사무실의 난로에서 빼낸 석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했다. 운명하기 전 그는 "내가 이렇게 떠나면 안 되는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라고 말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이 14년 전 이맘 때 분신하면서 했던 외침들이 생생히 살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소선은 아직 초등학생인 박종만의 두 아들과 그의 부인 곁을 지켰다. 마음을 굳게 먹고 고인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이소선과 청계노조 간부들에 이어 이 소식을 듣고 문익환 회장 등 민통련 간부들, 김근태 의장 등 민청련 회원들 그리고 현재 구로공단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하다가 회사와 어용노조의 탄압에 맞서 투쟁중인 협진양행, 유니전 전자 등 노동자들이 빈소에 모여들었다.
박종만 빈소에 모인 노동자, 재야인사들은 혹시 경찰이 시신을 빼돌릴 수 있을지 모를 것에 대비해 빈소를 지켰다. 이소선 역시 문익환 목사 어머니 김신묵 여사와 나란히 앉아 자리를 지켰다.
밤이 되자 회사측에서 보낸 구사대들이 빈소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동자 재야인사를 밀치고, 경찰은 해산을 시키려했다. 이 과정에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소선은 유족을 설득해 회사에 민주적인 노조를 확실하게 세울 수 있도록 요구하고 , 장례 또한 민주세력이 주도해서 치를 수 있도록 했다.
민주세력은 격렬한 몸싸움으로 새벽까지 버텼다. 그러나 날이 새자 경찰이 영안실을 포위했다.
경찰은 이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노동자, 재야인사를 닭장차에 실었다. 닭장차에 강제로 실린 사람들이 이번에는 닭장차 안에서 경찰들을 쫓아내버렸다. 경찰은 차문을 열고 들어오려 했지만 안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경찰은 닭장차에 실어놓고도 도리어 차를 빼앗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경찰이 차 안에 사과탄을 터뜨려놓고는 차 문을 잠가버렸다. 코밑에서 사과탄이 터지자 순간 차 안은 지옥으로 변했다. 당장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모두 창문 쪽으로 붙어 주먹으로 창문을 깨보려고 하지만 어림없었다. 누군가 운전석 옆 유리창을 발로 힘껏 찼다. 그러자 유리가 깨지면서 최루가스가 창문 밖으로 뿜어져 나갔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불이 난 줄 알고 '불이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서야 경찰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차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했다. 마치 절인 배추처럼 되어버린 채 한 사람씩 끌려나와 서리가 하얗게 내린 잔디 위에 널려졌다. 이들은 한참 누워서 찬 공기를 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날 60명이 연행되어 즉결심판에 넘겨졌으나 대부분 정식재판을 청구해 구류 29일을 받았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