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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산책 가는 치악산 구룡사 들머리(원통문)
 요즘 자주 산책 가는 치악산 구룡사 들머리(원통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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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시골에서 내 차 없이 살자면 '기다림'에 익숙해야 한다. 그 까닭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농촌 버스는 배차 간격이 30~60분 정도이고, 심한 경우에는 하루에 서너 차례밖에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버스운행시간은 있지만 그걸 일일이 다 욀 수도 없거니와 중간 간이정류장에서는 그 시간이 들쭉날쭉하기에 더욱 그렇다. 평생 운전면허증이 없이 살아온 나는 늘 한 세기 늦게 사는 기분으로, 그 '느림의 미학'을 마냥 즐기며 살고 있다.

일선 교단에서 물러나 강원도로 내려온 지 어느 새 11년째다. 강원도 산골에 살면서 길들인 버릇은 하루에 한 차례씩 산책하는 일이다. 한방, 양방 의사 모두 노후 건강의 비결로 산책을 권유한 탓도 있지만, 호젓한 산길이나 들길을 걸으면 정신으로나 육체로나 매우 좋다. 그래서 점심을 먹은 뒤면 으레 산책길을 나서기 마련이다.

안흥 산골에서 산책 코스는 언저리 산길이었다. 하지만 5년 전 원주로 나온 이후, 산책 코스는 그날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는 시내버스에 따라 목적지로 가서 산길이나 들길, 또는 강 언덕길을 걷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산책을 마치면 그곳 간이버스정류장에서 돌아오는 시내버스를 무작정 기다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그 언제부터는 그때를 대비하여 책을 한 권 가방에 넣고 간 뒤 간이버스정류장에 앉아 책장을 넘기면서 버스를 기다린다.

금대리계곡 간이버스정류장
 금대리계곡 간이버스정류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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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버스정류장

지난해 어느 늦은 가을 날, 그날은 치악산 금대계곡을 산책한 뒤, 간이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데 시내버스가 바로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문을 열었다.

"어르신, 어서 타십시오."

버스기사가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나는 얼른 보던 책을 가방에 넣고 부리나케 버스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냥 가시지 않고…."

나는 교통카드를 꺼내 요금을 치르면서 기사에게 고맙다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르신이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었다면 아마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아, 네."

나는 얼마 전, 원주 도심에 살다가 근교인 치악산 아랫마을로 이사를 했다. 이 마을은 도심에 살 때와는 달리 시내버스 배차 간격이 넓다. 그래서 요즘은 도심으로 가거나 산책 나가는 길에는 가능한 한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안에서, 숲속이나 강가 벤치나 간이버스정류장에서 책장을 넘기곤 한다.

오늘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서 한창 독서 삼매경에 빠졌는데 어느 승객이 내 자리로 다가오더니 네 잎 클로버 두 잎을 주면서 덕담을 했다.

"어르신, 행운을 빕니다."

어느 승객이 준 네 잎 클로버
 어느 승객이 준 네 잎 클로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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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전후의 전혀 안면이 없는 숙녀였다. 나는 목례로 답하고는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그가 겸연쩍게 말했다.

"요즘은 어디서나 책 읽는 분을 보기가 무척 드물어요."

그는 다음 정류소에서 내렸다. 나는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행운을 빌었다. 나는 두 정거장을 지난 다음 목적지에서 내렸다. 오늘은 단골 병원에 건강검진 체크하러 가는 날인데 그냥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이것이 '행운'인가 보다.


태그:#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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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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