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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YMCA 사무총장으로 10년간 활동하다 작년에 홍천청소년수련관으로 자리를 옮긴 신덕진 관장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수련관의 다양한 활동 중에 '홍천의 역사' 연구에 열의를 가지고 가득차 있어 새삼 놀랐다. 청소년수련관에서 홍천지역 역사연구를? 왜? 특히 '홍천군 청소년 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과 '한서 남궁억' 연구에 열의를 쏟고 계셨다.

처음엔 무엇인지 몰라 그냥 듣고 있었는데, 이건 좀 더 공부를 해서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통해 왜 역사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는지, 또 'YMCA' 정신이 홍천이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어 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은 신덕진 관장과 지난달 23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홍천군청소년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한서 남궁억 선생님을 연구하고 있는 홍천군청소년수련관 신덕진관장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 홍천군청소년수련관 신덕진관장 홍천군청소년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한서 남궁억 선생님을 연구하고 있는 홍천군청소년수련관 신덕진관장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 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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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홍천청소년수련관(아래 수련관)에서 홍천군 청소년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을 시작했고, 올해 두 번째 운영 중인데요. 어떤 계기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청소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실제 반응은 어떤지요.
"저는 춘천에서 활동하다가 작년에 홍천으로 왔어요. 근데 홍천의 청소년들이 홍천에 대해서는 5대 명품밖에 모르고 있는 거예요. 수타사, 물걸사지 등 역사적 유적지에 대해서도 애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거죠. '홍천에 가봐야 갈 데도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당연히 설명도 잘 못하고, 그랬던 것이죠. 지역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들이 공동체성과 관련된, 애향심과 관련된 것들인데, 아이들에게 그런 생각들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양성과정 10회 중에 지역의 문화, 역사, 인물을 내용으로 넣었는데,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함께 공부하면서, 청소년들이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홍천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죠.

이 과정은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을 어느 정도 벤치마킹했는데요. 영월은 마을 곳곳이 박물관이에요. 서른 몇 군데나 있지요. 인제는 다섯 개 정도 있고, 양구도 있고, 참고로, 홍천에는 박물관이 하나도 없어요. 영월이 문화와 역사를 가장 잘 발굴하고 있는데, 영월에 있는 대학교와 영월청소년수련관이 함께 '주니어 문화해설사 양성 과정'을 운영한 적이 있거든요. 그걸 홍천에 맞도록 적용한 것이죠.

지역의 문화역사 유적지를 방문해 이야기를 듣고 공부한 청소년들의 모습. 
지역에 대한 애향심은 물론이고, 역사 연구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은 친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 2014년 홍천군청소년문화관광해설사 현장학습 지역의 문화역사 유적지를 방문해 이야기를 듣고 공부한 청소년들의 모습. 지역에 대한 애향심은 물론이고, 역사 연구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은 친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 홍천군청소년수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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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은 이런 거예요. 만약 제주도를 관광한다고 했을 때, 여기 저기 둘러보고, 사진 찍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지식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관광을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둘러보는 관광을 넘어 문화와 역사를 현실 속에 녹여내 의미 있는 관광이 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해설사를 양성하는 것이 바로 이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 반응은 좋았어요. 열댓 명도 안 올 거라 생각했는데, 스물다섯 명이 참여하고, 토요일에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했는데, 이 시간이 학생들이 학원 안 가면 늦잠을 자는 시간인데, 대단히 좋아해서 그런지 참석률이 좋았어요. 이렇게 공부한 친구들이 외부 청소년들(인천 부평, 춘천)을 불러 직접 가이드를 해주는 시간도 있었어요. 또 작년 8월에는 제주 청소년들과 교류를 했는데, 우리가 제주를 갔는데, 홍천 친구들이 홍천에 대해서 준비해서 알려주었는데, 제주 학생들이 더 놀라고 도전받은 거예요. 그곳 청소년들은 그런 설명을 못하더라고요. 우리 홍천 친구들이 정말 뿌듯해 했죠.

또 이런 적도 있어요. 강원일보사와 하이원리조트에서 지원해줘서, 수련관 주관으로 '강원역사탐방캠프'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강원도 내 각 지역의 아이들이 모여서, 1박 2일을 역사탐방캠프를 진행한 거예요. 각 고장에서 온 학생들이 자기 고장에서 탐방했던 것들을 사진으로 프리젠테이션으로 만들어서 정리하고, 발표했는데, 이 때도 홍천 친구들이 1등했어요. 이 아이들은 6월 달부터 준비했던 애들이라서 그렇죠.

덕분에 아이들이 지역에 대해서 잘 알게되었고, 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뿐인가요. 진로와 관련해서 학예사나 사학자가 되겠다든지 이런 애들이 생겼어요. '진로'와 '지역'에 대한 주체성과 청소년들이 지역에 갖는 애향심이 복합적으로 길러지고 있는 것을 보게되었죠. 교육으로 끝내지 않고, 책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만들었어요.

홍천군의 문화와 역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자세히 실려있다.
▲ 홍천군 청소년 문화관광해설 책자 홍천군의 문화와 역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자세히 실려있다.
ⓒ 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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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홍천에 대한 전반적인 것으로 다루었다면, 올해는 5~6개로 권역을 나누어서 세부적인 것들을 다루려고 해요. 전설, 민담 등을 발굴하고, 없는 것들은 아이들이 창작을 통해서 스토리텔링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대개 관광책들이 테마, 레져, 이런 것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런 것이 나온 것은 아마 없는 것 같아요."

- 특별히 한서 남궁억 선생님을 열정적으로 연구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궁억 선생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 분과 관련된 홍천의 문화유산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남궁억 선생님은 관료이자 교육운동가세요. 77세 중에서 50년 이상을 교육운동을 하십니다. 배화학당에서 교육활동을 하셨고, 100년 전에 이곳에서 여자들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일을 하셨고, 또 <조선이야기>를 만들어서 역사책을 보급하시기도 했어요. 우리 민족성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한문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알기 쉽도록 풀어 쓰신 역사책입니다.

또 최초의 영어통역관도 하시고, 양양에 군수로 오시면서, 현산학교(지금 양양 초등학교)를 만드시고, 관동학회라고 있는데, 관동학회 초대 회장도 하시고,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 회장도 하시고, 국한문 혼용신문인 황성신문의 초대 사장도 하시고, 그걸로 인해서 러시아 일본의 밀약을 언론에 터뜨려 투옥 되셨다가 1918년에 낙향하시는데, 이후에는 심훈의 '상록수'처럼 농촌계몽운동을 하십니다.

김구 선생님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남궁억 선생님은 국내에서 교육운동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해나가세요. 독립 이후의 지도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이죠. 1918년 홍천에 오시고 한서교회를 짓고, 모곡학교를 세우시고, 보리울 서면에서 산을 넘으면, 춘천인데, 강촌이 있어요. 이곳에 1923년도에 남궁억 선생님이 수동야학을 세우시고, 따님인 남궁숙경씨가 와서 가르쳤고 합니다. 실제로 학교 터가 있고, 기념비가 있고 그런데, 많은 역사학자들이 잘 모르고 있어요. 남궁억 선생님은 장로님이기도 한데, 종교적으로도 지역에 많은 영향을 끼치셨을 것입니다. 아직 발굴해야할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홍천군청소년수련관은 한서 남궁억 선생님 문집과 그 분의 삶을 소설화한 책을 출판/보급하는데 앞장섰으며, 수련관에서 진행한 '독서릴레이' 활동을 통해 한서 남궁억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꽃피우려 하고 있다.
▲ 한서 남궁억 선생님 문집과 그 분의 삶을 소설화한 책 홍천군청소년수련관은 한서 남궁억 선생님 문집과 그 분의 삶을 소설화한 책을 출판/보급하는데 앞장섰으며, 수련관에서 진행한 '독서릴레이' 활동을 통해 한서 남궁억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꽃피우려 하고 있다.
ⓒ 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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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5년까지 이런 사실이 까맣게 잊혔어요. 헌데 95년에 한서교회로 현재호 목사님이 부임하세요. 노동운동을 하시다가 여기 오셨는데, 여기가 남궁억 선생님이 지은 교회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됩니다. 이분이 기독교 사회운동 쪽으로 관심이 많으셨기 때문에 남궁억 선생님에 대해서 알아보니까, 홍천에서의 애국운동, 무궁화 운동, 십자가당 사건(기독사회주의 운동)등 기념할 만한 것들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한서 남궁억 기념관이 만들어 지게 되었죠.

남궁억 선생님 정신은 무궁화 정신인데, 그 정신은 잘 답습이 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전국적으로 한서문화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궁화축제로 바뀌었고, 무궁화 도시라고 말은 하는데 무궁화가 많이 심겨있는 것도 아니고, 한서 기념사업회도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끊어지고 없다가, 현재는 '한서 남궁억 연구회'가 다시 조직되어 분기에 한 번씩 포럼을 하고 있습니다.

'한서 남궁억 연구회'에서는 오는 6월 18일에 '무궁화'와 관련된 포럼을 기획하고 있어요. 제가 남궁억 선생님과 관련해서 여기저기 강의도 많이 다니는데요. 남궁억 선생님의 정신을 '한서 남궁억' 오행시로 간략하게 정리해 봤어요.

한서 남궁억 오행시

'한(큰)' 뜻을 갖고 살아라!

'서'두르지 말 되, 멈추지 마라!
독립이 요원하지만은 계속 자기 할 수 있는 것들, 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고민 자기 신념을 가지고 꿋꿋이 행하라!

'남'과 같이 따라가지 말고,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라!(화이부동)
누가 친일하고 하니까 따라가지 말고, 무궁화 정신과 교육운동을 가지고

'궁'리 하며 살아라!
신중하고 깊이 있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조선이야기>같은 역사책을 만드신 것처럼, '홍천'이라는 중앙에서 벗어난 지방에서 농촌에서 무궁화 운동을 펼치신 것처럼, 어떻게 운동해야 할지,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지 생각을 깊이 하라는 뜻이고요.

'억'척스럽게 살아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원리 원칙을 가지고 살아라! 쉽게 가는게 아니라 신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라는 말이죠.

저는 그 정신이 현재에도 계속 계승 된다고 봅니다. '무궁화 정신'이 곧 '생명평화정신'이에요. '무궁화 정신'은 시대 흐름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할까에 대해 이 분이 지표를 생각하셨던 것이거든요. 저는 남궁억 선생님을 21세기에 다시 발굴, 재조명하고 새롭게 계승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운동이 중앙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산시키려고 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무궁화 운동은 농촌에서 중앙으로 전국으로 확산시켰던 운동이에요. 특히 홍천이라는 산골 마을, 이런 곳에 와서 무궁화 운동을 하셨다는 것은, 풀뿌리 지역운동에서 중앙운동으로 확산시켰던 최초의 사업일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요.

제가 볼 때 '농촌계몽운동'과 '무궁화 운동'은 김영기 가나안 농군학교의 전신이 됩니다. 농군학교 이후에 새마을운동으로 (실질적인 결과는 별도로 하고라도) 그 정신이 이어진다고 봅니다. 이런 정신을 이어 받아서 21세기 시대 걸 맞는 운동으로 재해석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이 당시 56세에 정말 당시로는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마음으로 지역에서 교육운동을 하시거든요. 홍천에 내려와서 하신 운동이 바로, 다음 세대에 이 나라를 이끌고 갈 새로운 주체를 세우는 '청소년 교육' 운동이고, 이 새로운 주체들의 '얼'을 새롭게 하는 철학이 '무궁화 정신'이에요. 때문에 수련관에서 남궁억선생님의 정신을 잘 발굴하고,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YMCA(아래 'Y') 활동을 오래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활동하게 되셨는지, 'Y'가 관료화 되어 가면서 초기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비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수련관에서 현재 하고 있는 활동과 이후 계획하고 계신 활동이 있다면?
"우선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을 많았는데, 50대 이후에 신앙공동체를 소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꿈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교 4학년 때 'Y' 캠프 자원봉사자를 했어요. 그 때 저를 잘 보신 분이 계셔서 계속 함께 하자는 요청이 왔었죠. 당시만 하더라도 'Y'는 봉사단체라는 인식이 강했고, 거기 들어가면 먹고 살기 힘들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던 때였어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거부를 많이 했었죠.

그러다가 서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6살에 'Y'에 들어왔어요. 'Y'는 '간사'를 사도직으로 보는데, 어릴 때부터 생각했던 것은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 사역을 했으면 좋겠다였어요. 천국을 가는 것을 넘어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신앙을 가지고, 이 땅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Y' 목적문에 그게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사랑과 정의, 민중의 복지 향상, 새마을 창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시킨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에 필이 꽂혔어요(하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동체와 사회로 만드는 것이 기독인으로서의 사명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Y'가 그 주축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런 예언자적, 사도적, 공동체적 목적의식을 가지고 'Y' 운동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저희들의 현재 활동은 '청소년' 수련관이지만, 청소년들만 대상으로 하지 않고, 지역주민들 대상으로 '한글교실', '검정고시' 야학도 하고 있고, 홍천이 유독 노인 자살율도 높은데, 인생의 소중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자서전 쓰기 운동'을 하고 있고, '가훈쓰기 운동'도 가족의 소중함들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지역 주민, 공동체를 위해 작은 일이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Y'가 관료화 되고, 생명력을 잃어간다는 비판이 있지요. 한국 'Y'가 1903년에 들어왔는데요. 'YMCA(Young Man Christian Association)'는 원래 회원공동체인데, 점점 기구화 되다 보니까 목적성 'C(크리스챤)'의 정체성 혹은 사명감 부분과 'A(어소시에이션)' 의 결사체의 의미가 희석된 것은 맞는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Y'가 한서 남궁억 선생님 같은 경우에 1903년도 한성 기독교 청년회가 세워질 때, 회원이자 이사로 활동하셨고, 이 지역에 와서 무궁화 운동하셨던 이유 중에 하나도 추측컨대, 'Y' 활동을 해 보셨기 때문에 여기서도 얼마든지 운동적 차원에서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시대적 과제와 시대정신을 지니고 지역에서 'Y'가 계속 활동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또 기구화 되다 보니까 흐름이 조금 흐트러진 것은 있죠.

구체적으로는 이래요. 뭐냐면 '건물'과 '단체' 중심으로 가다보니까 거기에 '전문사역자', '간사', '사무총장', '실무자'들 중심으로 가는 부분이 있는데, 'Y'는 '회원공동체'이니까, 회원들 의견을 얼마든지 서로 소통하고, 함께 활동하며 해야 하는데, 80년대 이후부터, 특히 90년대 들어오면서 부터는 그게 확 무너져 버렸거든요. 회원들은 회비 내고, 후원하는 분은 있지만은 앞장서서 하시는 분들은 이사 외에 거의 많지 않거든요.

이걸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에 고민이 있는 것인데요. 과제는 분명합니다. 'Y'의 과제는 'C(크리스챤)'의 정체성과 사명감과 'A(어소시에이션)'의 결사체, 협의체를 어떻게 다시 복원시키고 활성화 시킬 것인가 입니다.

우리 홍천에는 'Y'와 결합되어 함께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또 좋은 뜻을 가지고 외지에서 귀농·귀촌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이들과 함께 연대하면서 우리 지역의 문제, 즉 농촌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도록 하는데 'Y'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Y'가 그런 일들을 많이 했었던 것처럼, 지역의 독특한 특성 속에서 시대정신을 읽어가면서 필요한 활동을 창조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홍천 지역 청소년들을 만나시면서 느낀 것, 그리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이들이 순박하다 착하다 때묻지 않았다, 이런 정도는 느꼈던 것 같고, 오늘을 살아가는데 기본 인성은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생각이 어떤지' 서로 표현할 줄 알고, 그런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작년부터 와서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소통하는 방법들', '자기 생각을 나누고 발표하는 것', 그래서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것' 등을 훈련시키려고 했거든요. 저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제주와 파주 청소년들과 교류하는 사업을 많이 만들었는데, 올해도 이런 사업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또 청소년들 자신이 직접 주최해서 청소년 토론회를 만들어서 '지역의 문제가 뭔지', '지역에 대해서 어떤 이해을 갖고 있는지', 지역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들 자기 비전을 갖게 하는 것들, 그런 활동들을 강화시켜 나갈 예정입니다."

관장실 안에 전시된 작품으로, YMCA 회원으로 부터 받은 호박에 관장이 직접 글을 써 장식했다고 한다.
▲ '함께 평화' 관장실 안에 전시된 작품으로, YMCA 회원으로 부터 받은 호박에 관장이 직접 글을 써 장식했다고 한다.
ⓒ 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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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100년 전 홍천 땅에서 시작된 한서 남궁억 선생님의 '무궁화 정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신을 토대로 새로운 청소년 주체들이 세워져 생명평화의 세상을 일구어 가길 기대해 본다. 100년 전 피고 진 '무궁화 정신'은 바로 이곳 시골 마을 '홍천'에서 다시 움터 이 땅 곳곳으로 퍼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생명평화연대 누리집(www.welife.org)과 아름다운마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홍천군청소년수련관, #함께 평화, #신덕진, #한서 남궁억, #청소년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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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살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고 소소한 일들, '밝은누리'가 움틀 수 있도록 생명평화를 묵묵히 이루는 이들의 값진 삶을 기사로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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