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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우거진 곳에 있어도 나무를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구리가 우렁차게 노래하는 곳을 지나가면서도 개구리 노랫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파란 하늘이 펼쳐진 곳에 있지만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조차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싱그러이 바람이 불지만 바람맛이 어떤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있으나 바라보지 못한다면, 있다고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마음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두 눈으로 마주보지 않을 때에는 서로 아무것도 아닌 셈이리라 느낍니다.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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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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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제히 채찍 끝처럼 휙 고개를 돌렸다. 슈와가 거기 있었다. 우리 집 뒷마당 울타리에 몸을 기댄 채!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서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혔다.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 나는 그 나무 같아. 내가 방에 서 있고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면, 나는 거기에 아예 없었던 것과 같아. 가끔 나조차 내가 거기에 있기는 했는지 궁금해."

… "그런데, 슈와, 네 어머니한테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슈와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 몸이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정말로 그런 느낌이 왔다. … "내가 다섯 살 때 사라졌어." 그러고는 덧붙였다. "다시는 묻지 마, 알았어?"(<슈와가 여기 있었다> 35, 54∼55쪽)

닐 슈스터만 님이 쓴 청소년문학 <슈와가 여기 있었다>(한림출판사, 2009)를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슈와'라고 하는 아이는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에서 거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이 아이를 알아차리는 친구가 거의 없고, 교사도 마을 어른도 이 아이를 못 알아차리기 일쑤입니다. 아이 아버지조차 아이를 잊습니다.

틀림없이 바로 이곳에 있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이 아이는 '없는 아이'일까요? 바로 옆에 있으나 옆에 있다고 알아차리려는 눈길이 없다면 이 아이는 '없는 아이'일까요?

"그러면 선생님이 네 성적표 만드는 걸 잊어버려서 못 받으면 넌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는지 말해 봐. 버스 운전사가 정류장에 서 있는 너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가 버릴 때는? 아버지가 네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혼자 먹을 것만 준비할 때는?" 

늘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취급 당해 왔다고 해서, 슈와가 그걸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엄마의 도자기 냄비에서 소고기 스튜가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슈와의 눈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 나는 들키지 않고 부엌에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었지만, 갑자기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보여줄 권리가 있었다.(본문 85, 106, 147쪽)

사회에서 따돌림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푸대접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왜 따돌림이나 푸대접을 받아야 할까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있어도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돈이 없기에 '없는 사람'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이름이나 힘이 없기에 '없는 사람'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지난날에 무척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사람'으로 다뤄졌습니다.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 사람들은 이름도 자국도 남지 않습니다. 궁궐 둘레에 성을 쌓거나 궁궐을 지은 수많은 사람들은 이름도 자국도 남지 않습니다.

역사책에는 임금님 이름이라든지 몇몇 신하 이름이 남습니다. 사내들은 족보에 제 이름을 남깁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먹고살도록 곡식을 바친 시골사람 이름은 역사책에 없지요. 임금님이 걸친 옷을 지어서 바친 사람들 이름도 역사책에 없지요. 이름난 신하나 지식인이나 양반을 낳은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통령 이름 말고, 참말 이 나라를 버티고 살찌우며 일으킨 수많은 사람들 이름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 곁에는 누가 있고, 우리 둘레에는 누가 있어야 할까요? 우리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사람은 누구이며, 우리와 함께 사랑을 속삭일 사람은 누구일까요?

렉시가 말했다. "밴드가 맘에 들어. 소리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거든. 연주자 일곱 명의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어." 나는 밴드를 떠올려 보았다. 30분 넘게 밴드의 연주를 보았는데도, 밴드가 모두 자리를 떠 버리자 연주자가 몇 명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놀라워! 넌 독심술가 같아. 마음으로 못 보는 게 없네." … 렉시가 말했다. "보는 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빤히 보이지 않으면 못 보니까." … "너, 사람들 골탕 먹이는 재미로 사는구나?" 렉시가 씩 웃었다. "시각장애인을 몰라보는 사람들한테만 그래."(본문 138, 170, 175쪽)

책 <슈와가 여기 있었다>에 나오는 슈와는 몹시 외롭습니다. 슈와랑 동무로 지내려고 하는 '나'도 몹시 외롭습니다. 슈와는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그림자처럼 숨어서 지냅니다. '나'는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그림자가 안 되려고 합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나'는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슈와도 발버둥을 칩니다. 바로 '슈와가 여기 있다'고 외치고, 나도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칩니다.

나를 보라고 서로 외칩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 모습을 보라고 힘껏 외칩니다. 잘나지도 않으나 못나지도 않은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라면서 눈물겹게 외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이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슈와라는 아이가 있고, 수많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외로운 아이가 하나 있고, 쓸쓸하며 지친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바구니가 몇 개 더 있으면 되잖아요. 나눠 담으세요." 그제야 나는 엄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엄마가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일을 가지려는 것이었다. 달걀을 나눠 담으려고 말이다. 엄마는 엄마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랬다면 어떻게든 사라져 버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슈와의 어머니처럼 갑자기는 아니지만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본문 216쪽)

아이가 어버이를 부릅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달라며 부릅니다. 아이가 또 어버이를 부릅니다. 똥이 마렵다고 부릅니다. 아이가 다시 어버이를 부릅니다. 재미있게 놀아 달라고 부릅니다. 아이가 거듭 어버이를 부릅니다. 졸리니 재워 달라고 부릅니다.

어버이는 아이가 부를 적마다 달려갑니다. 배가 고픈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똥이 마려운 아이가 똥을 누도록 옆에서 지켜봅니다. 놀고 싶은 아이와 함께 놀고, 졸린 아이를 토닥토닥 재웁니다.

우리는 함께 삽니다. 기쁨과 웃음과 노래와 눈물을 함께 나누는 삶지기로서 이 보금자리에서 함께 삽니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삽니다. 사랑과 꿈으로 나아가는 길을 걸으면서 함께 삽니다.

네가 여기에 있고, 나도 여기에 있어요. 내가 여기에 있으며, 너도 여기에 있지요. 그래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웃으면서 걷습니다. 노래하면서 달립니다. 여기에 함께 있기에 반가운 동무요, 여기에서 함께 웃기에 가슴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곁님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blog.naver.com/hbooklove)에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슈와가 여기 있었다 / 닐 슈스터만 글 / 고수미 옮김 / 한림출판사 펴냄, 2009.2.11.



슈와가 여기 있었다

닐 슈스터만 지음, 고수미 옮김, 한림출판사(2009)


태그:#슈와가 여기 있었다, #청소년문학, #닐 슈스터만, #책읽기, #아이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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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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