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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칭다오 도심을 벗어나 동편 바닷가를 달린다. 칭다오 최고의 부호들이 모여 산다는 해변 별장을 지날 무렵, 가이드가 갑자기 중국의 수준영점(水準零點)을 보고 가자며 버스를 멈춘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일단 따라 내렸더니, 해발 고도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표지석과 함께 중국 유일의 수준영점 조형물과 그 아래로 붉은 영점 표지가 보인다. 중국의 해발 고도는 저 붉은 지점을 기준으로 산정된다는 의미다.

중국 유일의 수준영점이 칭다오에 설치되어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 수준영점 중국 유일의 수준영점이 칭다오에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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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점이 해발 0m를 나타내며, 중국 해발고도의 기준이 되는 수준영점이다.
▲ 수준영점 붉은 점이 해발 0m를 나타내며, 중국 해발고도의 기준이 되는 수준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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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해발 고도를 우리나라는 2,744m, 북한은 2,750m, 중국은 2,749.2m로 각각 다르게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수준영점, 즉 해발 산출의 기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서해안의 만조와 간조의 평균점을 산출해 관리에 용이하도록 인하공업전문대학에 해발 0m 지점이 아닌 26.6871m라는 수준원점을 설치해 놓고 있다. 오늘 해발 0m에서 노산 정상 해발 1,133m까지 펼쳐질 풍경을 보게 되는 셈이다.

중국은 원래 서고동저(西高東低)로 서쪽은 해발 고도가 4,000m 이상의 고산 분지이고 동쪽은 해발 1,000m 이하의 평야 지대가 많은데, 그 평야가 끝나고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우뚝 솟은 노산은 그래서 예부터 '해상명산제일(海上名山第一)'로 불려 왔다. 버스가 석노인(石老人) 해변을 달린다. 안개 때문에 바닷가에 17m 높이로 우뚝 솟은 노인 형상의 바위는 볼 수 없지만, 다양한 위락시설과 함께 드넓게 펼쳐진 칭다오 최대의 석노인 해수욕장은 한참 동안 차창 밖으로 이어진다.

신선이 산다는 노산의 유사롭지 않은 산세가 느껴진다
▲ 앙구(仰口)유람구 입구 신선이 산다는 노산의 유사롭지 않은 산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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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쯤 달려 드디어 노산 입구에 도착한다. 노산의 9개 풍경구 중 하나인 동북노선 앙구(仰口)유람구 입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산행을 시작한다. 노산은 거의 전 구간을 봉쇄하고 셔틀버스만 입장하도록 하고 있는데, 셔틀버스비, 입장료, 케이블카 비용을 합치면 200위안(36,000원)에 달한다. '비싼 만큼 뭔가 있겠지, 태산이 높다 해도 동해의 라오산만 못하다(泰山雖云高 不如東海崂)는 말도 있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케이블카에 오른다.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 개나리가 맞이해주는가 싶더니 예사롭지 않은 거대한 암벽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무릉도원을 떠올리는 복숭아 도(桃)와 신선 선(仙) 등의 한자가 새겨진 암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역사적으로 중국 사상계는 유가와 도가로 양분되는데, 충효를 바탕으로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유가에 비해, 도가는 안빈낙도와 무위자연을 추구한다.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이 중국문화에 남긴 흔적 또한 결코 적지 않은데, 이곳 노산은 그 도가의 성지로 불릴 만큼 속세를 벗어난 도인들이 즐겨 찾아 수련하던 곳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거대한 암벽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 케이블카를 타고 선경 속으로! 고도가 높아질수록 거대한 암벽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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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의 목숨 수(壽)자가 도가 수련의 결과물처럼 우뚝 서 있다.
▲ 천하제일수(天下第一壽) 붉은 색의 목숨 수(壽)자가 도가 수련의 결과물처럼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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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가 올라가며 점점 더 큰 암벽들이 나타나더니 오른편으로 붉은색의 목숨 수(壽)자가 무수히 적힌 벼랑을 지난다. 천하제일수(天下第一壽)라고 하는데 서체별로 참 많이도 새겨 놓았다. 제일 큰 것은 글자 하나의 폭이 16m에 달한다. 고대로 도가의 수련이 불로장생과 연관이 있으니 노산과 목숨 수자의 인연이 각별하긴 하겠지만 절벽에 매달려 힘겹게 저 글자를 새겼을 것을 생각하니 좀 과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는데 칭다오 지역은 낭야군(琅琊郡)에 속했다. 진시황은 이 지역에 낭야대(琅琊臺)를 세워 자신의 통일 위업을 찬양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갖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지역에 불로장생의 비약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설 같은 얘기지만, 진시황이 낭야에 왔을 때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보다 200년을 더 살았다는 안기공(安期公)을 만나, 천 년 뒤에 봉래산(蓬萊山)에서 재회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왜 이곳에 저렇게 많은 목숨 수자가 있는지 짐작할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노산을 오른 후 쓴 <기왕실산인맹부융(寄王屋山人孟大融)>이란 시에도 안기공에 관한 언급이 있는 걸 보면 이런 얘기가 꽤 오랫동안 전설처럼 전해진 모양이다. 이백은 41세 때 당 현종을 만나 정계에 진출하지만, 현실 정치에 별 매력을 못 느끼고 슬슬 도가사상에 빠져든다. 유람하던 중 노산을 찾은 이백은 왕실산에서 수도하던 친구 맹부융이 생각났는지 그에게 보내는 시 한 편을 남겼다.

"일찍이 동해에 가 노산의 붉은 노을을 맛보고/ 안기공과 만나 참외처럼 큰 대추 먹었노라/ 중년에 황제 뵈옵지만 즐겁지 않아 자연으로 돌아왔도다/ 젊음은 봄 햇살에 시들고 이제 백발이 된 삶을 굽어보노라/ 선약을 구해 바람처럼 구름 마차 위에 오르리라/ 도인을 따라 하늘에 올라 한가로이 신선과 함께 떨어진 꽃이나 쓸리라 (我昔東海上,勞山餐紫霞/ 親見安期公,食棗大如瓜/ 中年谒漢主,不惬還歸家/ 朱顔謝春輝,白發見生涯/ 所期就金液,飛步登雲車/ 願隨夫子天壇上,閑與仙人掃落花)"

이백이 정말 노산에서 안기공을 만나 참외만한 대추를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산이 태산 같은 진지하고 엄중한 세계에서 벗어난 신선이 노닐 법한 자유로운 공간임을 느끼게 해 준다.

노산에 이런 동굴 18개에서 천 여명이 도가 수련을 해 왔다고 한다.
▲ 멱천동(覓天洞) 입구 노산에 이런 동굴 18개에서 천 여명이 도가 수련을 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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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한 분은 들어가지 마십시오”라는 문구가 웃음을 자아낸다.
▲ 멱천동 안내문 “뚱뚱한 분은 들어가지 마십시오”라는 문구가 웃음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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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서 내려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자 멱천동(覓天洞)이라는 동굴이 나타난다. 동굴 입구 안내문에 "동굴 안이 좁으니 뚱뚱한 분은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내용이 맞춤법이 엉망인 한글 번역문과 겹쳐져 두 배의 웃음을 선사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영사관 차원에서 중국 전역 관광지의 한글 번역문 교정 작업을 한번 했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바위가 많은 노산에는 이런 동굴이 규모가 커 이름이 붙은 것만 18개 있다. 한(漢)대부터 짓기 시작한 도교 사원이 청(淸)대에는 '9개의 궁, 8개의 관자, 72개 암자(九宫八觀七十二庵)'에 달했다고 하니, 이런 동굴에서 수도하는 사람들이 수천 명을 넘었을 것이다. 동굴에 들어서니 안내문에 적힌 대로 칠흑 같은 어둠에 비좁고 가팔라서 오르기 쉽지 않다. 휴대전화 조명을 켜고 머리를 몇 번 바위에 찧고서야 겨우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은 육신만이 저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듯한 막막한 느낌이 순간 찾아온다.
▲ 절벽과 바위에 갇히다 은 육신만이 저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듯한 막막한 느낌이 순간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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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신선의 세계에 대한 감탄이 담겨 있다.
▲ 노산에 새겨진 글귀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신선의 세계에 대한 감탄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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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을 나오자 절벽 너머 멀리 안개가 피어오르는 앙구만(仰口灣) 바다가 보인다. 1914년 일본이 칭다오를 공격하기 위해 함선을 정박했던 곳이다. 인간의 세계를 사방의 바위와 절벽이 차단하니 오롯이 작은 육신만이 저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듯한 막막한 느낌이 순간 찾아온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척천애(咫尺天涯)' 글귀가 있어 고개를 드니, 정말 바로 앞에 손에 닿을 듯 하늘이 내려와 있다. 거대한 암벽 사이의 소로를 지나자 시야가 탁 트인 작은 봉우리가 나온다. 또 하나의 하늘이라는 '우일천(又一天)' 글귀에 걸맞게 그야말로 또 하나의 세계이다.

설악산의 권금성 못지않은 절경에 바로 앞바다와 붉은 지붕의 바닷가 마을에 몰려든 안개가 어우러지며 신선의 세계를 거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진 산정의 풍경은 어디에 시선을 둬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노산의 이런 장관에 매료되어 신선이 되기 위한 선약에 더욱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자봉, 장군봉 등 봉우리의 이름을 듣고 있자니, 문득 영화 <호빗>에서 돌로 된 산들이 일어나 서로 싸우는 장면이 떠오른다. 곤륜산(昆侖山)의 하늘을 떠받치는 여덟 개 기둥 중의 하나인 경천주(擎天柱)를 딴 경주봉(擎柱峰)도 보인다. 저 봉우리들이 이어져 해발 1,133m 노산 정상 거봉(巨峰)에 닿으리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진 산정의 풍경은 어디에 시선을 둬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 기암괴석의 병풍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진 산정의 풍경은 어디에 시선을 둬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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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암 등불의 인도를 받으며 하늘 나라 거리를 걷는다.
▲ 하늘 거리 너머의 하늘 정원 화가암 등불의 인도를 받으며 하늘 나라 거리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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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거리'라는 천가(天街)에 오르자 꿔모뤄어(郭沫若)가 쓴 시 한 편이 돌에 새겨져 있다. 하얀 화강암 바위를 하나의 등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등불의 인도를 받으며 정말 하늘나라 길거리를 걷는 듯하다. 천가 너머로 작은 동산처럼 아담한 바위 봉우리가 천원(天苑)이다. 준비해간 과일을 먹으며 바위에 둘러싸여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다. 이백이 태산에서 신선이 따라 주는 노을주를 마셨다면, 노산에서는 바다가 따라주는 안개주를 마셨을 법하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노산은 87.3km 해안선에 16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는데, 고대로 그 이름이 다양했다. 진시황이 이곳을 방문할 때 백성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고 노산(勞山), 하늘의 별자리와 아름다움을 바위에 가뒀다고 해서 뢰산(牢山), 자라 등처럼 생겼다고 오산(鰲山) 등으로 불리다가 명나라 때부터 노산(嶗山)으로 불리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노산의 노(嶗)는 오직 노산에만 쓰이는 노산 전용 한자인 셈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많은 도교, 불교 사원들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저 거대한 암반으로 이뤄진 노산의 아름다움은 다 훼손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칭다오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노산은 인간이 이룬 흔적들보다 자연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산이다.
▲ 잠시 신선의 세계를 노닐다 노산은 인간이 이룬 흔적들보다 자연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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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가 같은 색으로 아름다운 '천해일색(天海一色)'에 취해 한참을 산정에서 서성이다 하산길에 들어선다. 금방이라고 굴러 내릴 것 같은 거대한 암석들이 잠시 비탈에 멈춰 쉬는 듯 불안한 자태로 서 있다. 올라오면서 기암절벽에 시선을 빼앗겨 놓쳤던 송나라 때 건설된 도교 사원 태평궁(太平宮), 사자봉 등이 이제야 시야에 들어온다. 노산은 인간이 이룬 흔적들보다 자연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산이다. 비록 그 한 자락을 들쳐 잠시 몸을 담그긴 했지만, 노산의 정기와 예사롭지 않은 신령스런 분위기는 가히 '신선의 세계'라 칭할만하다. 근처에 막걸릿집은 없을 테고, 노산의 깨끗한 물로 제조한다는 시원한 칭다오맥주 한잔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어디 봄꽃 흐드러진 곳 있으면 한가로이 떨어진 꽃잎을 쓸어도 좋으련만.


태그:#노산, #라오산, #칭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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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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