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부산 기장역행 기차를 타고 떠나게 했던 대변항의 한 장면.
 부산 기장역행 기차를 타고 떠나게 했던 대변항의 한 장면.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애마 자전거를 기차에 싣고 동해 바다가 가까운 부산 기장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출발 동대구역에서 환승을 하며 4시간이 넘게 부산 해운대 끝자락에 자리한 기장역까지 찾아간 건, 봄 멸치로 유명한 대변항에 가보기 위해서였다. 여러 명의 억센 남자들이 항구에 한 줄로 서서 이불을 털 듯 그물코에 걸린 손가락만한 큰 멸치를 털어 내는 사진때문이었다.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에 반해 떠나는 여행이라니, 기장역행 무궁화호 열차의 덜컹거리는 흔들림마저 색달랐다.

기장역(부산시 기장군 기장읍)에서 동해 남부선이라는 이름의 열차 노선을 알게 되었다. 동해남부선은 부산과 경북 포항을 잇는 145.8㎞ 철길이다. 일본이 우리 땅에서 여러 지하자원과 각종 물산을 수탈하려고 건설했던 열차였다. 1918년 10월 경주-포항에 먼저 철로가 놓였고, 1935년 12월 부산-경주 구간이 개통되었다.

세모꼴 지붕을 한 아담한 기차역들이 자리하고 서 있는 동해 남부선은 복선 철도화 사업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봄 멸치 터는 사진에 반해 떠났던 기장 대변항 여행은 기장역에서 바닷가를 따라 송정역, 해운대역, 부산 내륙의 동래역까지 이어지는 동해 남부선길 자전거 여행으로 번졌다.

세모꼴 지붕이 정다운 기장역, 늘 활기가 넘치는 기장시장

세모난 지붕이 정다운 동해 남부선 기장역.
 세모난 지붕이 정다운 동해 남부선 기장역.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부산은 다수의 영화 배경으로 나왔던 명소 몇 곳으로 한정할 수 없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동해남부선 기장역이 자리한 기장 지역이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해운대 끝자락, 달맞이 고개를 넘어서면 대도시 부산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제주를 연상케 하는 살가운 항·포구와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들이 자전거 여행자의 눈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인터넷 지도를 펼쳐보면 기장은 가장 유명한 대변항 외에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 역 앞에 있는 활기 넘치고 북적한 기장시장, 짙푸른 바다색이 기대되는 동해 바닷가의 이채로운 사찰 용궁사, 바다와 갯바위가 어울려 펼쳐지는 아름다운 죽성리 바닷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생겨난 왜성에서 매년 봄마다 멸치축제가 펼쳐지는 유명한 대변항까지... 어느 계절보다 봄날에 꼭 가볼만한 곳이었다.

기장역은 동해 남부선 가운데 하나인 기차역이다. 읍(邑)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소담한 간이역으로 1934년 12월 16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역사 입구에서 보이는 아담한 세모 지붕이 마치 푸근한 집을 연상하게 해 친근하다. 도시의 네모반듯한 아파트에서 남의 집 바닥을 지붕삼아 사는 내겐 무척 정겹게 다가왔다. 여행하면서 보니 세모난 지붕은 동해 남부선 기차역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동해 남부선의 복선 전철화 사업으로 해운대역, 송정역, 포항역 등이 새 역사로 이전하면서 세모 지붕을 포함해 옛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기장역은 예전 기차역의 오래되고 정취 있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좋았다. 기장역 또한 얼마 안 있어 전철역 같은 현대식 모습으로 바뀌고 역 위치도 울산 방향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지 싶어 마음속에 사진속에 역 풍경을 꾹꾹 눌러 담았다.

풍성한 해산물과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기장시장.
 풍성한 해산물과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기장시장.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기장역 앞엔 매일 매일이 장날 같은 기장시장이 있다. 시장에 다가갈수록 상쾌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듯 정말 왁자지껄한 활기가 느껴졌다. 장터가 무척 크고 주중이나 주말이나 오일장 날처럼 많은 부산 시민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특히 수산물 장에서 들려오는 "OO사이소~" 하는 '아지매'들의 목소리가 정답기만 하다. 기장시장은 봄에는 미역과 멸치로, 가을에는 갈치로 유명하다. 올봄에도 여느 봄처럼 좌판마다 미역과 멸치가 넘쳐났다. 

싱싱할수록 짙은 갈색을 띤다는 미역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고, 바다의 빛깔을 껍질에 새긴 귀한 전복이 지천에 보이는가 하면, 큼지막한 문어들이 상인 아주머니가 방심한 틈을 타 대야에서 나와 슬금슬금 도망치고, 공포영화에 나옴직한 러시아산 대왕 대게들이 수족관 물위로 넘실거린다.

마치 봄 바다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푸른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들의 비릿하지만 경쾌한 냄새와 활기찬 생명력이 사방으로 퍼진다. 바닷가 시장만의 매력이다. 부산 사는 친구가 왜 꼭 가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산이 많아 생긴 이름 부산(釜山)이 아니라, 이렇게 바다에서 비롯되고 나는 것이 많아 '부산(富産)'이 아닐까 싶었다. 

'생선급' 대우를 받는 대변항 멸치

짙푸른 바다와 기암, 등대가 아름다운 죽성리 해안가.
 짙푸른 바다와 기암, 등대가 아름다운 죽성리 해안가.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기장읍 죽성리 바닷가를 달리다보면 부산의 봄은 바닷가에서부터 오는구나 싶다. 5월의 눈부신 햇살을 실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여행자의 마음을 한결 느긋하게 해준다. 바닷가 2차선 해안 길은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굽이굽이 이어진다. 한적하고 거칠 것 없는 시야, 해안을 따라 늘어선 기묘한 모양의 큰 바위들을 감상하느라 눈이 즐겁다.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생미역을 손질하는 두호마을 바닷가에 '어사암'이라는 바위가 눈길을 끌었다. 1883년에 대동미를 실은 배가 매바위로 불리던 이 바위 앞에서 침몰하자 주민들이 파도에 휩쓸려온 쌀을 주워 먹다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진상조사를 나온 암행어사 이도재가 풀어줬다고 해서 어사암으로 바뀌었다고. 청잣빛 바다를 실컷 눈에 담으며 드라마 세트장이라는 흰 성당이 잘 어우러진 죽성리 해안가를 지나면 기장의 명소 대변항이 나온다.

봄을 맞은 대변항은 한껏 부산했다. 좀 거시기한 이름의 대변항(大邊港)은 알고 보니 '가장자리가 큰 항구'라는 뜻. 매년 봄에 멸치 축제를 할 정도로 봄 멸치가 유명한 곳이다. 전복죽을 팔던 '손 큰 할매집', '뚱보 할매집', '해녀 천지 할매집' 등 토박이 가게들도 이맘땐 멸치구이, 멸치 회 무침, 멸치 찌개, 멸치 쌈밥, 멸치 젓갈 등을 찾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작은 멸치로 뭐 먹을 게 있을까 싶지만, 대변항의 '왕멸치'는 구워 먹고, 무쳐 먹고, 끓여 먹는다. 다른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한 보조 재료가 아닌 당당한 요리의 주재료다.

멸치와 땀이 튀어 오르는 대변항 멸치털이 작업.
 멸치와 땀이 튀어 오르는 대변항 멸치털이 작업.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다양한 멸치들과 멸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대변항.
 다양한 멸치들과 멸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대변항.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연탄불에 나란히 누워 노릇노릇 익어가는 멸치 구이의 냄새, 기장시장에서 김밥에 오뎅에 후식으로 떡까지 잘 먹었음에도 군침이 돌고 절로 코가 벌름거렸다. 기장 멸치는 왜 이렇게 특별할까. 대변항의 수두룩한 멸치 가게 가운데 나이 지긋한 상인 몇 분에게 물어보았다. 기장 앞바다는 동해와 남해의 경계수역이다. 한류와 난류의 교차수역이기도 하다 보니 물살이 세고 생태계 환경이 좋단다. 먹잇감이 많은 곳에서 물살 헤치며 살아온 녀석들이니 당연히 살이 탄탄하고 맛도 좋겠다.

마침내 이 여행을 촉발한 사진 속 장면으로 다가갔다. 인근 연안에서 갓 잡아온 멸치를 털어내느라 어부와 항구, 하늘까지 온통 은빛이다. 멸치를 그물째 감아 온 어선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분리 작업을 벌이는데, 그게 바로 멸치 털이다. 멸치가 튀고, 땀이 튄다. 작업장 한쪽에 떨어진 멸치를 잽싸게 낚아채는 갈매기들의 즐거운 외침 사이로, "어이 야차" 장단을 맞추며 구호처럼 부르는 어부들의 노동요가 흥겹고 왠지 모를 감동이 일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역동적이고 치열한 삶이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PC 모니터로 본 사진과는 또 다른 감흥이 느껴지는 장면에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나 발길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떨어진 멸치를 재빠르게 대야에 담아 가는 어느 아낙네의 모습이 고된 노동의 현장 속에서 작은 웃음을 선사했다.

시민들의 갤러리, 산책로가 된 동해 남부선 기차역과 철길

바다를 절집 마당삼은 이채로운 절. 해동 용궁사.
 바다를 절집 마당삼은 이채로운 절. 해동 용궁사.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시민들의 바닷가 산책로가 된 동해 남부선 폐철길.
 시민들의 바닷가 산책로가 된 동해 남부선 폐철길.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송정 해변을 향해 남쪽으로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웬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해안가에 절이라니 안 가볼 도리가 없다. 기장읍 시랑리 바닷가에 자리한 해동 용궁사는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절이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지어진 사찰답게 다른 절과 달리 너른 바다가 절집 마당이다. 때문에 산속에 위치한 다른 사찰들과 다른 풍경을 맛볼 수 있다. 절 경내 아래로 바닷물이 드나들고 파도 소리와 독경 소리가(녹음된 소리지만) 절묘하게 어우러져 자전거 여행자에게 좋은 휴식처가 돼주었다. 

이웃 해운대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그 덕에 훨씬 한갓지고 해변의 모래가 곱고 풍성한 송정 해변에 도착했다. 하늘빛의 말간 바닷물 위에 윈드서핑을 즐기는 몇몇 서퍼들이 바다를 쳐다보며 신중하게 파도를 기다리는 모습이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송정 바닷가 작은 동네 정겨운 골목길에 숨은 듯 들어서 있는 자그마한 몸체의 간이역 송정역, 이웃역인 해운대역과 함께 동해 남부선 철로 이설로 문을 닫았다. 새로 생겨난 송정역이나 해운대역 모두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동해남부선은 국내에서 바다를 나란히 곁에 두고 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철길 가운데 하나였다. 복선 전철화로 편리함과 속도를 얻었지만, 바다를 볼 수 있는 기차 여행의 설렘과 낭만은 잃게 돼버렸다.

빨래보다 우선인 청사포 어촌 마을의 미역들.
 빨래보다 우선인 청사포 어촌 마을의 미역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동해남부선 간이역 송정역은 폐역이 됐지만 시민들의 공간으로 남았다.
 동해남부선 간이역 송정역은 폐역이 됐지만 시민들의 공간으로 남았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나처럼 아담하고 포근한 송정 해변과 송정역에 대한 추억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송정역은 '철길과 바다'라는 시민 갤러리로 남아있었다. 등록문화재라 옛 간이역 모습은 그대로다. 계절마다 변하는 간이역 사진, 동해 남부선을 달리는 철마들 사진, 아름다운 송정 바다 야경...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는 사진들 외에도 이제 기차가 오지 않는 간이역을 통과해 철길을 걸어 옆 동네로 건너가는 주민들의 모습도 정다웠다. 해운대를 바라보고 자리한 해운대역은 송정역과 달리 등록문화재가 아닌 탓인지 여러 차량들이 주차하고 있는 버려진 역이 되어 아쉬움이 남았다.    

송정 해변을 지나면 동해남부선 기차가 달렸던 폐선 구간이 나타난다. 청사포 마을을 지나 달맞이 언덕 밑, 해운대 미포항까지 바닷가를 따라 철길이 시민들을 위한 산책로가 되어 이어졌다. 왼편으로 나타나는 탁 트인 바다, 귀로 파도 소리를 듣고, 눈으로 쪽빛 바다를 보며 철길을 걷는 이채로운 기분에 많은 시민들이 나들이 하고 있었다. 경치 좋은 이 폐선길이 앞으로 어떻게 활용될지 궁금하다.

동해남부선 폐선 길 중간에 있는 작은 포구 마을인 청사포(부산시 해운대구 중1동)는 '푸른 모래'라는 뜻이다. 물이 얼마나 맑기에 모래가 청록 빛을 간직한다는 이름이 붙게 된 걸까. 파아란 하늘과 코발트빛 바다가, 빨갛고 하얀 쌍 등대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렸다. 조류가 세고 영양도 풍부해서 미역 양식이 유명하기로 소문이 난 곳이기도 하다. 정말 마을 곳곳에 빨래보다 우선해 정성스레 널어놓은 미역들이 햇볕을 쬐고 있었다. 꼬들꼬들한 '미역귀'가 신기해 쳐다보니 먹어보라며 쥐어주던 할아버지에게서 기억에 남는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청사포 주민들은 마을 옆으로 동해남부선 열차가 지나갈 적에도 철길을 걷곤 했다고 한다. 바다에서 캔 해산물을 해운대 시장으로 가서 팔던 시절. 하루에 두 번 정도만 오가는 버스를 이용하자니 해산물이 신선도가 떨어져버려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은 동해남부선의 철길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단다. 야생동물들도 지나가지 않는 그곳,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얼른 숲으로 숨어 있어야 했다고.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쾌적하게 나있는 수영강과 온천천.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쾌적하게 나있는 수영강과 온천천.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작은 장터가 열린 정다운 간이역 동래역.
 작은 장터가 열린 정다운 간이역 동래역.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시민들의 공간이 된 폐철길과 달리 차량들이 함부로 들어선 독특한 팔각지붕의 간이역 해운대역(폐역)을 지나 수영강과 온천천을 향했다. 모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잘 나있어서 상쾌하게 달리기 좋았다. 강과 하천가에도 동해 남부선 기차역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동래역이 그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1차 목표물이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래읍성을 품고 있다.

역 앞 마당에 작은 장터와 역 전 슈퍼가 세모 지붕 간이역의 정다움을 더했다. 역 앞 정자에서 쉬다가 만난 나이 지긋한 여성 역무원은 자전거 여행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수고 하이소"라고 정겨운 작별인사를 해주었다.

복선철도가 개통한 뒤로도 변함없이 동해 남부선 열차는 운행된다. 하지만 전철역같은 무색무취의 현대식 역사(驛舍), 고가도로와 터널로 연결된 직선의 철길 위로 달릴 이 철도를 오늘 지나왔던 동해 남부선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ㅇ 주요 자전거 여행 길 : 기장역 – 죽성리 바닷가 – 대변항 – 해동 용궁사 – 송정역(폐역) - 동해 남부선 폐철길 – 청사포 – 달맞이 공원 – 해운대역(폐역) – 수영강 – 온천천 – 동래역 (약35km) 

동래읍성 성곽길을 운동삼아 산책하는 주민들.
 동래읍성 성곽길을 운동삼아 산책하는 주민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 ㅇ 지난 5월 2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자전거여행, #기장 여행, #대변항, #동해남부선, #간이역 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