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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종료 1분 전이다. 다들 앞사람 깨워라."

감독관으로서 시험 때마다 하는 소리다. 낡은 레코드판 마냥 틀어대고 있는데, 요즘엔 말 꺼내기도 전에 다들 알아서 깨우고 일어난다. 십 수 년 전 초임 시절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몇 해 전부터는 시험 시작과 함께 잠자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특히 수학 과목의 경우에는 굳이 감독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많게는 한 반에 셋 중 한 명꼴이다.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의 답안지를 그러모아 점검한다. 매수를 헤아리며 이름은 제대로 적혀있는지, 또 답은 모두 마킹돼 있는지 교실을 나가기 전에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눈에 봐도 아이들의 오엠아르(OMR) 답안지가 엉망이다. 침이 잔뜩 묻어있어 다시 작성해야 하는 것도 있고, 문항 수보다 더 마킹이 돼 있는 것도 보였다.

다 풀고 책상에 엎드리기 전에 답안지를 옆으로 치워놓으라고 수차례 주의를 주었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던 거다. 침은 안 묻었어도 입김이 서려 눅눅해진 답안지도 재작성해야 한다.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 자국이 번져있어서다. 그런 상태로 답안 카드를 읽게 되면, 잘못 읽히거나 자칫 기계가 고장이 날 수도 있다.

수학 시험 답안지의 경우, 답이 한 가지 번호로 통일돼 있는 건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 중 한둘은 번호를 일일이 마킹하는 것조차 귀찮았던지, 아래로 길게 선을 그어 놓았다. 지그재그로 마킹하는 것보다 일관되게, 그것도 3번 하나로 가는 게 득점에 유리하다는 것이 아이들끼리 통용되는 '정설'이다. 문항 수는 스무 갠데, 답안지에 25번까지 마킹한 아이는 '찍는' 것조차 실패한 경우다. 그야말로 '웃픈' 현실이다.

예전 같으면 등을 토닥이거나 어깨를 주물러주기도 했지만, '마음먹고' 자는 아이들에게는 다 부질없는 짓이다. 시험 시작과 동시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이젠 더 이상 깨우지 않는다. 흔들어 깨웠다간 되레 면박을 당할 수도 있다. 흔하디흔한 시험 풍경이다 보니 별 것 아닌 일이 됐고, 그만큼 시험 감독하기도 편해졌다. 그들은 커닝을 할 노력은커녕 의지조차 없다.

'수포자'... 요즘에는 보편화됐다

과거에도 '수포자(수학 포기자)'는 늘 있었지만, 요즘처럼 '보편화'되진 않았다. 더욱이 그 연령 또한 점점 낮아지고 있다. 예전엔 대입을 코앞에 둔 고3이 돼서야 '어쩔 수 없이' 수학을 포기했다면, 요즘엔 아예 수학이라는 과목을 머릿속에서 지운 채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의 당면 목표는 오로지 수능에서 수학 영역을 반영하지 않는 대학이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수학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수학 공부를 아예 '고문'에 비유하는 아이도 있다. 초, 중학교 때 수학 학원을 다니지 않은 아이가 거의 없고, 인문계 고등학교마다 교사들 네다섯 중 하나가 수학 교사라는데도 그렇다. 교실엔 '수포자'가 하염없이 늘어만 가고, 교사들은 그만큼 무기력해지고 있다. 어찌 손써 볼 도리가 없다며 '수포자'들을 포기한다.

스스로 '수포자'라 말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들도 교과서와 참고서를 사고, 정규수업에다 방과 후 수업까지 다 수강한다. 그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업에 임하는 건 아니다. 수학만큼은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교육과정 상 수업 시수를 채워야 한다니까, 그냥 멍 때리며 그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시험은 그렇듯 무의미한 수업의 연장이다.

수학은 수업 시수도 많지만, 시험도 여러 차례 치러진다. 수행평가는 그렇다 치고, 중간과 기말 지필시험 때도 선다형과 서술형을 따로 본다. 문제 풀이에 시간이 많이 드는 탓이다. 여느 과목처럼 한 시간에 둘 다 보면, 문항 수를 줄여야 해 문항 당 배점이 너무 커지게 된다. 나름 아이들을 배려한 조치인데, '수포자'에게는 그저 잠잘 시간이 한 시간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험 종료령과 함께 가까스로 잠이 깬 그들의 부스스한 얼굴을 보노라니, 내 과목은 아니지만 교사로서 안쓰럽고 미안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과목 시험 준비를 시키는 게 낫겠다 싶은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생기가 철철 넘쳐야 할 고등학교 시절, '수포자'라는 낙인은 어쩌면 아이들의 자존감에 끊임없이 생채기를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수학 과목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다른 과목에 견줘 포기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애초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수학을 포기했다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중학교 3년 내내 아이의 수학 한 과목 사교육비로 매월 50만 원을 쏟아 부었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푸념한 어느 학부모는, 당신 자녀와 같은 '수포자'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위안을 삼았단다.

이쯤 되니, 상당수 아이들의 수학 포기가 마치 전염병처럼 연쇄적으로 다른 과목의 학습 의욕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그들의 즐거운 학교생활에 방해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스럽다. 만약 그렇다면, 거칠게 말해서,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그들에게 굳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수학 공부에 매달리도록 강제할 이유가 없지 않나 싶다. 학교가 '수포자' 그들을 '개안'시킬 수 없다면 말이다.

개정될 수학교육과정 개정 시안에 '시큰둥'

듣자니까 초, 중, 고등학교에서 3년 뒤부터 적용할 예정인 수학 교육과정 개정 시안이 노동절인 지난 1일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쉬운 수학'을 표방하며 아이들의 학습량을 대폭 감축하겠다는 교육부의 방침에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당장 자신들과는 무관하지 않느냐며 관심 없다고 일축했고, 몇몇은 시안에 대해 확인하듯 이렇게 캐물었다.

"그럼, 우리 같은 문과생은 드디어 미적분으로부터 해방되는 건가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답하자, 아이들과 학부모들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라며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눈치다. 어떻든 쉬워지면 입시에 영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고, 그걸 대학의 수학과 교수와 교사, 사교육 업체들이 좋아하겠냐며 되레 반문하는 아이도 있었다. 수능이 쉬울라치면 '물수능'이라고 조롱하며 전가의 보도처럼 '변별력 확보'를 부르대는 그들의 모습은 이젠 아이들에게조차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격'이라는 이야기다.

교사로 아이들을 만난이래, 수학 교사도 아니면서 오지랖 넓게 '수포자'들에게 생각날 때마다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우는 데 수학만한 과목이 없다는 말. 물론 지금은 누구 앞에서든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작년 초, 지금은 고3이 된 한 아이가 수학 교과서의 서문에도 나오는 그 말을 문제 삼으며 내게 건넨 '따끔한 일침' 때문이다.

"논리적인 사고력과 수학 성적은 정비례한다는 건데, 그 말에 동의하는 제 또래 고등학생은 단 한 명도 없을 걸요. 도덕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말이에요. 만약 그게 맞다면, '수학'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수학 교육'이 잘못된 결과이겠죠. 누가 뭐라던 저희에게 수학은 그저 '가장 피하고 싶은 입시 과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역시 '수포자'인 그는 영어 등 다른 과목의 성적은 매우 뛰어나다. 특히 남다른 음악적 재능과 출중한 기타 연주 실력으로 학교 축제 무대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고3인데도 남들 다 하는 '야자'도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며 마치 중3처럼 즐겁게 생활한다. 여느 아이들과 굳이 다른 거라면 수학 공부를 할 시간에 음악을 듣고 악기 연주를 한다는 점이다. '수포자'일지언정 그가 훨씬 고등학생답지 않는가.


태그:#수학 교육과정 개정안, #수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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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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