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성완종 리스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취임 70일 만에 퇴진했다.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꼬리표도 안게 됐다. 이 전 총리는 지난 27일 열린 퇴임식에서 '진실'과 '여백'을 말했다고 한다. 연이은 거짓말과 책임 회피성 발언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그의 모습은 시련 속에서 성숙해지는 '어른'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 전 총리는 누구 못지 않게 화려한 공직 생활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연소(31살) 경찰서장, 지방경찰청장, 국회의원, 도지사 등이 그의 이력을 채우고 있다. 실패와 좌절은 그와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실패를 모르고 자란 어른들, '아플 수' 있다

철부지 사회
 철부지 사회
ⓒ 이마

관련사진보기

과거의 실패는 사람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저자 가타다 다마미는 책 <철부지 사회>에서 젊은 시절 한 번도 좌절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중년 이후 좌절을 겪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맥을 못 추는 예가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현대 일본 사회를 휘감고 있는 병리적 징후 현상이다. 어른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참을성, 저항력 부족, 책임 전가 경향, 의존증이 그것이다. 이들 문제의 밑바탕에는 자기애적 이미지와 현실 속 자신과의 격차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심리적 요인이 깔려 있다고 한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환상적 만능감을 어른이 된 뒤에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살면서 다양한 것들을 획득해 가는 동시에 유아적인 만능감을 하나씩 버려 나가는 과정이다. 극히 소수의 천재나 스타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꿈과 자기애적 이미지 등을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포기를 하지 못하는 '성숙 거부자'들, 다른 말로 하자면 대상 상실(對象喪失)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9쪽)

참을성이 부족하고 실패에 대한 저항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많다. 교실에서 문제가 생기면 "억울해요. 쟤 때문이에요"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전가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아이들의 이런 태도는 부모의 과도한 기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다. 저자에 의하면 "아이의 장래와 행복을 위해서"라는 부모들의 대답은 포장된 것이다. 자식에 대한 기대를 부모의 자기애, 특히 상처 입은 자기애를 재생하는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다.

저자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사랑'으로 위장한 채 아이들을 조종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점점 비대해지는 만능감은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라는 믿음을 강조하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 속에서 더욱 커진다.

문제는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과대 평가된 상상 속의 내 모습, 곧 자기애적인 만능감을 하나씩 잃어가는 '포기'의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바람을 절충하면서 한계를 자각해 가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성숙 거부'의 결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괴물 부모', '괴물 환자' 들이 그것이다. 책에는 베테랑 경력의 중견 교사를 휴직하게 만드는 극성 부모, 폭언과 폭행으로 의료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는 환자 등 '괴물' 사례가 다양하게 실려 있다. 제 자식만 아는 '진상' 부모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텅 빈' 자신은 외면, 원망은 타인에게로

책임 회피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책임 회피 사회의 이면에 "텅 빈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텅 빈 자신을 외면하고 타인을 원망함으로써 공허감을 채우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여기는 사회적 속박에서의 해방, 자기다움의 삶과 함께 강조되기 시작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주 요인으로 작용한다. "포기하지 말라"라는 말의 유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포기, 즉 단념이 쇠퇴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요란하게 선전된다. 당연히 자기애적인 만능감도 커진다. 그러나 얄궂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주어진 순간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극심한 내적 혼란에 시달리게 된다. (114쪽)

'포기'를 알고,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을 오해하지 말자. 그것은 객관적인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냉철하게 이해할 때 정글 같은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비평가들은 이 전 총리가 출세를 향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런 평가에 걸맞게 승승장구해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국무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번 퇴임이 유례 없이 치명적인 실패와 아픔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제대로 '재기'할 수 있을까.

비대해진 만능감에 빠져 진정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슈퍼 갑질'을 일삼는 재벌과 정치인 등 상류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객이라는 이유로 갖은 '진상질'을 부리는 '몸만 큰 어른'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포기'와 '실패'를 모르는 그들의 만능감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진정한 어른이 부족한 '철부지 사회'는 모두에게 불행이다.

<철부지 사회>(가타다 다마미 지음, 오근영 옮김 / 이마 / 2015. 3. 10. / 237쪽 / 1만 3000원)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철부지 사회 - 성장을 거부하는 사람들

가타다 다마미 지음, 오근영 옮김, 이마(2015)


태그:#<철부지 사회>, #몬스터 페어런트, #몬스터 페이션트, #이완구 전 총리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