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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도시로 건설의 불씨가 현대화된 칭다오 도심으로 번져 왔다.
▲ 칭다오 시가지 식민도시로 건설의 불씨가 현대화된 칭다오 도심으로 번져 왔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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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칭다오는 20세기 초 독일의 식민도시 건설로 급속히 근대화되었다. 그것을 불씨로 도시는 다시 연안을 따라 빠르게 번졌다. 그래서 칭다오의 서편에서 동쪽으로 걷는 것은 근대에서 현대로, 칭다오 발전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기분이 든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3km, 칭다오 기차역에서 동쪽으로 약 25km 정도가 칭다오의 구시가지로 낡은 듯, 멋스러운 깊이와 멋을 간직하고 있다. 총독부를 중심으로 1920년대에 소어산 일대 회천(滙泉)지구가 먼저 개발되고, 1930년대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며 중국의 민족자본과 외국자본이 새로운 개발구를 찾다가 주목한 곳이 바로 팔대관(八大關)이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덴마크, 그리스,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 20여 개국의 특이한 건축물들이 모여 있어 '만국건축박람회장'으로 불리는 팔대관에서 칭다오 만보(漫步)를 이어간다.

덴마크왕자가 공주를 위한 별장을 짓고,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실제로 공주는 이곳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 팔대관 공주루 덴마크왕자가 공주를 위한 별장을 짓고,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실제로 공주는 이곳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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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대관에는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에서 동쪽 끝 산해관까지 총 열 개의 관문 이름을 딴 거리(횡으로 7, 종으로 3개)가 조성돼 있다. 그럼 왜 십대관이 아니고 팔대관일까. 아마 중국인이 팔(八)이란 숫자를 좋아해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바다와 울창한 숲 속에 이국적인 건축물이 펼쳐져 있어 영화, 드라마, 웨딩포토 촬영지로도 유명하고, 쾌적한 환경에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1934년 이곳을 찾은 소설가 위다푸(郁達夫)는 팔대관을 '동방 최고의 피서지'라고 극찬했다.

넓은 팔대관 숲에 들어서자 곳곳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이 눈에 띈다. 길을 물어 공주루(公主樓)를 찾아가는 데에만 세 커플을 만난다. 1929년 덴마크의 왕자가 페이오니아호를 타고 칭다오 왔다가 팔대관에 공주를 위한 별장을 짓고, 선물로 주려고 했다는데 실제로 공주는 이곳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공주루 내부는 공개되지 않아 밖에서만 둘러보는데, 뾰족 지붕에 녹색 벽이 다른 별장들과는 좀 색다르다. 웨딩포토를 찍는 신부들에겐 별장을 지어 선물하는 이런 신랑이 로망이지 않을까.

러시아백작이 지은 화석루는 바닷가에 고딕양식으로 멋지게 서 있다.
▲ 화석루 러시아백작이 지은 화석루는 바닷가에 고딕양식으로 멋지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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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에스(蔣介石) 공관’으로도 불리는데 1947년 장지에스는 이곳에서 일주일 가량 머문다.
▲ 화석루 ‘장지에스(蔣介石) 공관’으로도 불리는데 1947년 장지에스는 이곳에서 일주일 가량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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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숲 사이에 있어 귀족해수욕장으로 불리던 제2해수욕장을 지나자 팔대관에서 가장 유명한, 흔히 '장지에스(蔣介石) 공관'으로 불리는 화석루(花石樓)가 보인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 부호 일부가 칭다오로 이주해 살았는데, 커라시모푸 백작이 1931년 완공된 건물이다.

대리석 외벽에 둥근 지붕의 고딕양식 5층 건물인데, 1947년 10월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시절 장지에스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2층 전시실에 장지에스와 그의 부인 송메이링(宋美龄) 사진 외에 별다른 설명은 없다.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정원은 원래 테니스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해변에 전용 부두까지 있어 바다를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별장이다.

장지에스는 1947년에만 세 차례 칭다오를 방문하는데 당시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계속 밀리는 형국이라 이 좋은 별장에 머물면서도 산책하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신중국 건국 이후에 천이(陳毅) 등이 최고지도자들이 자주 이곳에 묵었다고 한다.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내부에는 고풍스런 가구들이 놓여 있다.
▲ 화석루 내부 모습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내부에는 고풍스런 가구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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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대관에는 이 밖에도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많은데, 중국정부는 해방 후 이곳 별장들을 국유화해서 공산당이나 정부기관의 직원들에게 복지 차원으로 임대해주고 있다. 아는 중국 친구가 저렴하게 방을 빌려 주어 중국철도국 휴양소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난방시설이 다소 미흡하고 인터넷이 안 돼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새소리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은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안락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동쪽 투완다오(團島)에서 서쪽 석노인(石老人)까지 40.6km의 해변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 칭다오 바닷가 산책로 동쪽 투완다오(團島)에서 서쪽 석노인(石老人)까지 40.6km의 해변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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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꽂고 개를 앞세우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칭다오사람들이 살짝 부러워진다.
▲ 칭다오 해안 산책로 이어폰을 꽂고 개를 앞세우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칭다오사람들이 살짝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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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루에서 바로 앞 바닷가로 내려오니 해변 보행로(海濱步行道)가 잘 조성돼 있다. 2002년 공사를 시작해 2008년 완공되었는데, 동쪽의 투완다오(團島)에서 서쪽 석노인(石老人)까지 40.6km의 해변 산책로를 말끔히 정비해 놓았다. 이어폰을 꽂고 개를 앞세우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칭다오사람들이 살짝 부러워진다.

바닷가 길을 따라 한참 노란 벽에 붉은 지붕은 이고 있는 별장들이 이어지더니 숫자 8이 여덟 개나 연속인 전화번호를 내건 빌딩을 시작으로 현대식 고층 빌딩들이 경쟁하듯 나타난다. 드디어 근대 유럽과 작별하고 현대 중국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다.

그 경계선 즈음에 제3해수욕장이 있다. 현대화된 도시는 세계 어딜 가나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물론 잘 익은 김치보다 갓 담은 생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손과 발이 서로 교차된 형태의 조각상과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과 고사들이 조각된 12개의 기둥이 있는 세기장랑이다.
▲ 천지간 조각상과 세기장랑 손과 발이 서로 교차된 형태의 조각상과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과 고사들이 조각된 12개의 기둥이 있는 세기장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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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나 홍콩 못지않은 스카이라인을 자랑하는 칭다오 신시가지 입구에 <천지간(天地間)>이란 손과 발이 서로 교차된 형태의 조각상이 있고,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과 고사들이 조각된 12개의 기둥이 복도처럼 길게 이어진 세기장랑(世紀長廊)이 펼쳐진다. 수많은 손과 발이 땀 흘려 이 도시를 이룩했으며, 오천년 역사의 근간 위에 또 더 발전된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또 한 굽이를 돌자 음악광장이 나온다. 광장 중앙에 '음악의 돛' 조형물이 있고, 중국의 유명 음악가 동상이 놓여 있다. 바다와 음악이 서로 잘 어울리는 테마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음악광장을 지나 얼마 안 가 붉은 회오리바람 같은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칭다오 또 하나의 랜드마크인 5.4광장이다.

1919년 5.4운동에 참여한 곳이면 으레 저런 조형물이 하나씩은 있지만, 칭다오는 좀 더 각별하다. 1919년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의 이권을 모두 넘겨받고자 제시한 21개조 요구안의 해당 지역이 산둥성이고, 가장 눈독을 드린 곳이 바로 칭다오였기 때문이다.

붉은 불빛 속에 들어서면 1919년 그 역사의 격랑 속에 들어선 듯한 묘한 느낌이 잠시 인다.
▲ 오월의 바람 조형물 붉은 불빛 속에 들어서면 1919년 그 역사의 격랑 속에 들어선 듯한 묘한 느낌이 잠시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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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5.4운동은 우리나라의 3.1운동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는데, 중국은 결정적 영향은 아니라는 듯 5.4운동과 3.1운동의 연관성을 특별히 따로 기술하진 않고 있다. 그렇다고 3.1운동의 영향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천두슈(陳獨秀) 등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독립운동 소식을 적극적으로 전하며,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로 당시 분위기를 이끌었고, 그런 기록물들이 명백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며 '오월의 바람(五月之風)'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에 붉은 조명이 비춰지기 시작한다. 그 빛 속에 들어서면 마치 1919년 그 역사의 격랑 속에 들어선 듯한 묘한 느낌이 잠시 인다.

소원을 빌어 하늘로 날려보내는 풍등은 제갈공명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중국인들은 믿는다.
▲ 공명등 소원을 빌어 하늘로 날려보내는 풍등은 제갈공명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중국인들은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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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등(風燈)이라고도 하는 공명등(孔明燈)을 파는 사람이 다가와, 가격을 물었더니 20위안(3600원)이란다. 초에 불을 붙이자 공기가 팽창하며 둥근 등이 떠오른다. 소원을 담아 하늘로 날리는데, 바닷바람을 타고 도심을 향해 날아가는 뒷모습에 화재에 대한 염려도 없진 않다. 제갈공명이 핑양(平陽)에 포위되었을 때 병사를 보내 구원 요청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등을 만들어 날린 것에서 유래한다고도 하고, 등의 모양이 제갈공명의 모자와 닮아 공명등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5.4광장 안쪽으로 우리나라 시청에 해당되는 시정부가 있다. 5.4광장이 바로 시청 앞 광장인지라 '오월의 바람' 조형물의 야경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베이징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반제국주의, 반봉건 5.4운동에도 불구하고 칭다오는 1937년 중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에 1938년 1월 10일 재점령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화려한 야경 못지않게 내실 있는 발전을 다지는 일이 더 소중함을 역사를 통해 새겨야 할 것이다.

홍콩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의 조명을 활용한 빛의 공연을 칭다오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겨울이어서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칭다오 도심은 지금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다. 1호선에서 3호선까지 내년이면 개통될 전망이다. 중국의 작은 유럽 칭다오가 국제도시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08베이징올림픽 요트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 칭다오올림픽중심 2008베이징올림픽 요트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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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광장에서 좀 더 동쪽으로 가면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요트 경기가 열렸던 칭다오올림픽센터가 나온다. 중국에서 요트가 제일 먼저 들어온 곳이 칭다오라고 하니 어쩌면 바다가 없는 베이징의 선택이 적절했는지도 모르겠다. 베이징올림픽 성화 조형물이 있는 요트 선착장 맞은편으로는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그 너머로 원래 한국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칭다오의 집값이 크게 오르다보니 지금은 칭다오 외곽 공항 근처 청양(城陽)이란 곳에 한국인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한다. 요트 유람 가격을 물어보니 생각보다 비싸지 않아 한 번쯤 요트로 칭다오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돛을 내리고 항구에 정박한 요트처럼 칭다오 만보의 항해를 이곳에서 멈춘다. 바다만 보면 감정의 급소를 맞은 사람처럼 감탄을 연발하는 개인적인 취향도 없진 않겠지만, 유럽의 근대와 중국의 현대가 어우러지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얼굴로 이방인을 맞이해주는 칭다오는 분명 매력적인 도시다. 그래서일까. 칭다오 구석구석을 누빈 두 다리는 여전히 고단함을 모르고 새로운 풀을 찾아 떠나고 싶어 한다. 어느덧 화려해진 칭다오의 야경이 바다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다.


태그:#칭다오, #팔대관, #5.4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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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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