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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예전보다 나아졌다면 그것은 125년 동안 거리에서 공권력에 대항하며 끊임없이 노동권을 외치는 전 세계의 사람들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노동'과 '투쟁'이라는 단어조차 편하지 않은 분들에게 베를린 사람들은 외칩니다. "먹고, 춤추고 투쟁하라!"
▲ 먹고, 춤추고, 투쟁하라!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예전보다 나아졌다면 그것은 125년 동안 거리에서 공권력에 대항하며 끊임없이 노동권을 외치는 전 세계의 사람들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노동'과 '투쟁'이라는 단어조차 편하지 않은 분들에게 베를린 사람들은 외칩니다. "먹고, 춤추고 투쟁하라!"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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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노동절, 한국에서 경찰들이 시민들을 향해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쏘아대고 있던 그 시각. 한국과 8시간 시차가 있는 독일 베를린에서도 노동절의 열기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 시민들에게 '노동절' 하면 떠오르는 사진들이 있습니다. 검은 마스크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 외투, 검은 신발의 사람들. 바로 베를린의 급진 좌파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돌덩이들을 던지는 것은 기본이고 주차된 차들을 불태우기도 하고, 거리상가 유리 창문을 부수기도 합니다. 과격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매해 독일 노동절 때마다 매스컴을 통해 보도됩니다.

올해 노동절 데모를 대비해서 경찰 측에서 준비한 인원은 7000명. 경찰 추산 노동절 축제 참가자 수 3만 명입니다. 때문에 데모 현장 주변의 버스와 트램 노선이 변경되었다는 등의 공지들이 각종 신문과 라디오, 페이스북, 트위터에서 쏟아집니다.

베를린에서 가장 위험 날로 꼽히기도 하는 5월 1일. 어떠한 모습이기에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 걸까요? 한 마디로 '파티와 폭동 사이'에 있었던 베를린 노동절의 모습을 시간 별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전 9시 : 누가 독일 사람 아니랄까봐!

브란덴부르커토어(Brandenburger Tor)앞의 노동절 행사무대
 브란덴부르커토어(Brandenburger Tor)앞의 노동절 행사무대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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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임대료가 비싸기로 소문난 '노른자 땅' 하케셔마크스(Hackescher Markt)에 위치한 독일노동조합연맹(DGB) 베를린본부의 데모로 본격적인 노동절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특별히 오토바이,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노동절 행사장인 브란덴부르커토어(Brandenburger Tor)까지 행진을 하였다. 노동조합연맹이 이렇게 럭셔리해 보여도 되나 싶을 정도다.

오전 11시 : 노조박람회를 방불케 하는 베를린의 노동절

브란덴부르커토어(Brandenburger Tor) 앞에는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고 노동절 대형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양옆 도로에는 각종 노동조합들과 정치정당부스들이 늘어서 있고 중간 중간 맥주와 소시지 가게들이 즐비하다.

도로 중심부 객석에는 어림잡아도 천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각종 노동조합 티셔츠를 입고 수다를 떨고 있다. 특히 베를린 운송노조는 본행사장으로 아예 버스를 가지고 와서 그 위엄을 자랑했다. 심지어 기중기까지 몰고 와서 자신들의 노조 깃발을 세우고 상설 무대를 만들었다. 무대에서는 노조원 록동호회 형님들(대부분 40, 50대)이 핏줄을 세우며 "록앤롤"을 외치고 계신다.

베를린 운송노조의 록동호회가 한껏 자신들의 장기를 선보이고 있다.
 베를린 운송노조의 록동호회가 한껏 자신들의 장기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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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 어린이도 노동절의 주인공!

베를린에서는 보기 드문, 풍선으로 만든 각종 대형 놀이터들이 어린이 노동절 구간에 설치되어 있다. 가장 큰 놀이터 앞에는 부모들과 아이들이 200m가 넘게 줄을 서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다른 한쪽에는 어린이 노동조합연맹 부스들이 있고 노동조합로고가 새겨진 풍선을 어린들에게 나눠준다.

독일 금속노조(IGM) 부스에서는 열심히 나무를 대패에 갈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대형 젠가를 하기 위해 나무 조각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 부스의 한 금속노조 조합원은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장난감은 너희가 일해서 만들어보렴"이라고 말하며 아이들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가 노조원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본 아이들에게 노조 활동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지 않을까.

독일 금속노조 부스에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 금속노조 부스에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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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 최저임금 이하의 시급은 돈이 아니야

수많은 노동조합 부스들 중에 가장 눈에 띈 곳은 바로 노조별 청년노조들의 부스였다. 그중 청소노동자들의 부스에는 유독 젊은 노조원들이 많았는데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까르르 웃으며 멋진 포즈를 잡는다.

옆에 있던 다른 젊은 여성노조원이 리플릿을 나눠준다. '최저임금 이하의 시급은 돈이 아니야!'라고 적혀 있는 리플릿에는 법적 최저임금에 대한 권리와 대부분 이십대인 젊은 노조원들이 직접 쓴 글들이 실려 있었다.

'나는 너무 일하고 싶어, 하지만 햄버거만 사 먹어야 하는 월급을 받고 싶진 않아', '날 위한 휴가는 없었지만 나는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을 해야 했어. 하지만 회사가 최저임금도 주지 않았을 때 동료 조합원들이 함께 있어 줬어. 나는 확신해! 우리가 함께 요구할 때 우린 더 강해질 수 있단 걸.'

한국이나 독일이나 먹고 살기 팍팍한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최저임금이다. 참고로 독일 최저임금 시급은 약 1만 원(8.50유로), 한국 최저임금 시급은 5580원이다.

오후 4시 : 진정한 노동절 데모는 지금부터!

베를린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는 크게 두 군데서 진행이 되었다. 한 곳은 서울 광화문에 해당되는 브란덴부르커토어(Brandenburger Tor)이고, 다른 한 곳은 베를린의 홍대라 부를 수 있는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이다.

이곳에서는 'Myfest'라는 이름의 노동절축제가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진정한 노동절 데모는 바로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이곳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애초 경찰은 데모 참가자를 3만 명으로 예상했으나 저녁이 다가올수록 사람이 늘어 4만5000여 명이 정도가 노동절 데모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오후 6시 : 속이 빈 상태로는 혁명도 없다, 먹자

'베를린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여기 있나봐'라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노동절 집회로 인근 도로가 모두 차단되자 사람들은 도로와 골목 곳곳을 점령하고야 말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의 종로의 상황을 떠올리면 되겠다. 이미 노동절 데모 중심부를 지나가는 지하철역 입구는 폐쇄된 지 오래다.

헌데 골목길 곳곳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구친다.

'벌써 시작인가! 최루탄!'

빠른 걸음으로 연기의 진원지를 찾아가보니 바비큐다. 그것도 활활 타오르는 참숯에 굽는 고기 바비큐. 브란덴부르커토어(Brandenburger Tor) 앞이 '노동조합 박람회'같았다면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는 '세계 먹거리 박람회'라고 할 정도의 각양각국의 음식들을 곳곳에서 팔고 있었다. 한 아랍여성은 거리에 아랍음식 가판을 차리곤 이렇게 써 붙여 놨다.

'속이 빈 상태로는 투쟁도 없다'

오후 7시 : 미친 세상에선 안 미치는 게 비정상, 미친 듯 춤추자

딱히 정해진 장소나 구획이 있진 않았다. 몇 백 미터 간격으로 오디오 우퍼가 심장소리처럼 쿵쿵 거리는 소리가 거리 곳곳을 채우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상설무대가 세워져 있지 않은 공간 곳곳이 연설회장이 되었고, 무도회장이 되었고, 토론장이 되었다. 강연장이 되었고, 공연장이 되었다. 주거문제, 실업문제, 노동, 교육문제, 인종차별문제 등등, 다양한 사회적 화두를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정치'와 '삶'과 '투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완전무장한 전투경찰부대가 서 있는 앞에서 노부부가 춤을 춘다. 할아버지 셔츠 뒤에는 올해 노동절 집회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깃발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Refugee welcome'(난민을 환영합니다)

오후 8시 : 악명 높은 베를린 노동절을 보여주마

결국 올 것이 왔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에 주차된 자동차가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과 급진좌파 시위자 일부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등의 소식이 올라왔다.

이미 몇몇 상가들의 쇼윈도 유리창들이 깨져버렸고 급진좌파 시위대 몇몇은 연막탄을 터뜨리며 크로이츠베르크 일대를 행진하던 중 연행되었다. 일부 좌파 시위대들은 노동절  며칠 전부터 이른바 '데모수업'을 진행했는데 수업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 검은 마스크와 검은 모자, 선글라스를 착용할 것
- 경찰한데 붙잡혔을 때 도망치는 법
- 연행되었을 때 진술 요령 등등

시커먼 급진좌파 시위대들을 처음 본 외국인들은 자칫 네오나치시위대들과 구분을 잘 못할 수도 있다. 네오나치 역시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시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진좌파는 네오나치와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있다. 그들이 노동절에 내세운 구호는 대략 이러하다.

- 안티파시즘, 안티자본주의, 안티인종차별

실제로 마주한 몇몇 급진좌파 시위대들 중에는 꽤 어려보이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매스컴에 의해 폭력적인 모습만 부각되는 급진좌파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급진좌파시위대 앞에서 두 여성이 셀카를 찍고 있다.
 급진좌파시위대 앞에서 두 여성이 셀카를 찍고 있다.
ⓒ morgen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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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 크로이츠베르크의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베를린의 노동절은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열기가 식질 않았다. 몇몇 네오나치 무리들은 사람들과 경찰로 하여금 쫓겨났고, 데모 참가자들은 강강수월래를 하듯 저마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자정 : 125년 동안의 노동자들 그리고 내일

자정이 넘은 시각, 베를리너포스트(Berliner Morgenpost), 베를리너짜이퉁(Berlinerzeitung),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 등의 언론들과 각종 소셜네트워크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노동절 데모'였다며 독일 곳곳에서 벌어진 노동절 데모 현장에 대해 평가했다. 그중 독일 유력 온라인 언론사인 타츠(Taz)는 "이번 노동절은 정치적 데모보다는 놀기 위한 행사에 불과했다"며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노동절 데모에 정치적 내용이 부족했다는 비판 기사
 노동절 데모에 정치적 내용이 부족했다는 비판 기사
ⓒ T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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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25년째의 베를린에서의 노동절이 끝나갈 때 쯤, 한국 SNS를 보니 쌍용자동차 해고자 2명이 운명을 달리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지난 1월 백아무개(48)씨에 이어 지난달 30일 김아무개(49)씨가 각각 27번, 28번째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들은 내가 바로 몇 시간 전 본 베를린 운송노조 부스에서 핏대를 세우며 락앤롤을 외치는 노조원과 비슷한 나이였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노동절,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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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였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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