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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1월 겨울날의 샹젤리제 거리 풍경
 해질 무렵, 1월 겨울날의 샹젤리제 거리 풍경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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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구 여정을 마치고, 어둑해질 무렵의 샹젤리제 거리를 잠시 들러 거닐었다. 그리고 다시 시테섬 주변 파리 중심가로 왔다. 숙소가 있는 북역 부근까지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거리. 요란한 파이프로 둘러싸인 퐁피두센터 인근의 샤토도 역(Châtelet – Les Halles)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샤토도 역에서 나오자마자 완전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고급 아파트 건물에서 나와 반짝이는 자동차에 오르는 값비싼 옷차림의 사람들은 한순간에 몽땅 사라졌다. 샤토도는 보이는 곳마다 쓰레기 천지였다. 거기에는 싸구려 카페들, 갖가지 색으로 된 인조가발을 파는 가게들, 전화카드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전화카드로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세네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부르키나파소 등지에서 싸게 전화할 수 있다는 광고가 곳곳에 나붙어 있었다. 백인은 나 한 사람이었다."(더글라스 케네디, '파리 5구의 여인')

한국인은, 아니 동양인은 나 한 사람이다. 아랍어 혹은 아프리카 쪽 계열의 알아보기 힘든 언어로 적힌 허름한 식당에서, 저렴한 식사를 하는 검게 그을린 파리지앵들이 보인다. 걷다가 거리 이름을 보니, 생드니 가(Rue Saint-Denis)다. 구멍가게 같은 분위기의 아담한 과일 가게에서, 아랍어로 적힌 이민자 슈퍼마켓에서 피부색 짙은 주민들이 저녁 찬거리를 고르고 있다.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 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루시드폴, '고등어').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카페였다"

여기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파리다. 벗겨지고 해어진 거리를, 검은 형제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담배를 피거나 캔 맥주를 마시고 있는 어수선한 시장통 같은 거리를 거닐다가, 여기저기 늘어선 카페들, 위 소설에서의 표현대로 '싸구려 카페들'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간다. 마치 이런 곳.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카페였다. 형광등 조명, 회색 리놀륨 바닥, 스피커에서 흐르는 이스탄불 가요……. 카페 안을 들여다보았다. 찻잔을 앞에 놓고 수상쩍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남자들, 아침부터 취해 바에서 잠든 남녀, 그 모든 공간에 담배 연기가 낮은 구름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터프카이 스타일의 젊은 바텐더가 축구 경기를 중계하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더니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더글라스 케네디, '파리 5구의 여인')

파리 생드니 가에서 들어간 서민적인 카페 전경
 파리 생드니 가에서 들어간 서민적인 카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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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개성이라고는 없다. 지금은 밤이지만, 바에서 잠든 이는 아직 없다. 담배 연기는 생각보다는 견딜 만했다. 역시 소설에서처럼 "카페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바깥에까지 들렸고, 모두들 서로 잘 아는 듯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나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카메라에 커다란 가방을 둘러맨, 누가 봐도 관광객인 나를 "딱히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왜 왔지?'하는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없었다."(더글라스 케네디, '파리 5구의 여인')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들 속에서, 홀로 놓여 있다. 저것은 불어다, 저것은 불어가 아니다, 이 정도 구분만 가능한 억양들이 뒤섞인 채 사방을 떠다닌다. 그리 답답하진 않다. 오히려 완전히 단절된 그 익명성을 즐기고 있달까. 두꺼운 배낭 가방을 풀어헤치고, 돈을 조금 더 줄 작정을 하고 바가 아닌 테이블에 앉는다. 그래 봐야 중심가 카페에 비해 저렴하다. 종일 거니느라 벅차던 어깨가 묵직한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가벼워진다. 저렴한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들고 자리에 앉는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면서 눈을 감는다. 나도 하루의 여독을 푼다.

여기가 파리일까? 그야말로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일상 속이다. 거친 수염에 터프한 인상을 지닌 주인과 빈티지 스타일의 빛바랜 가죽 잠바를 입은 흑인이 얼굴을 마주하고 깔깔대며 웃는다. "못난 사람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했던가. 내가 감히 못난 사람, 잘난 사람 판단할 입장은 아니다. 분명한 건, 저 얼굴은 보통 연상되는 '엘레강스'한 파리가 아니다.

들어와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자 했는데, 그럴 기분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앉아서 지금 이 파리를 바라만 본다. 알 길 없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 리듬에 나도 모르게 취한다. 걸음 따라 당도한 곳, 특별한 것도 없는 카페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둘러본다.

파리의 고단한 하루가 마감되는 풍경

파리 생드니 가에서 들어간 서민적인 카페에서. 값싼 화이트 와인 한잔을 들고 앉았다.
 파리 생드니 가에서 들어간 서민적인 카페에서. 값싼 화이트 와인 한잔을 들고 앉았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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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바에는 서서 맥주를 먹는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자리를 채운다. 낮에는 저 자리에서 자그마한 에스프레소 잔을 두고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카페 안팎을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리며 담배를 물고 수다 떠는 사람들, 마치 자신들 가게 같이 익숙하게 공간을 누빈다. 그들 사이로는 종이 신문을 펼쳐두고 퍼즐을 맞추고 있는 노신사가 있다. 나처럼 멍하게 앉아, 깊은 처연한 눈빛을 지닌 채 사색 중인 중년 여성도 옆자리 가까이에 있다. 그를 흘긋 바라본다.

그 순간, 왠지 궂은 노동일을 마치고 왔음직한 건장한 중년 남성이 들어온다. 다부진 몸에 먼지가 하얗게 낀 낡은 옷을 입고 바 앞에 서더니, 맥주를 한 잔 주문한다. 그는 혼자다. 게다가 여기를 매운 다른 파리지앵들과는 달리 피부도 하얗다. 주인과도 별다른 대화가 없다. 꼿꼿하게 바 앞에 서서 맥주를 한 모금씩 들이키기만 할 뿐. 강한 눈빛으로 간혹 카페를 둘러보기만 할 뿐, 굳은살이 박인 하얀 손에는 검은 숯덩이가 묻은 듯 때가 타있다.

그렇게 한 7~8분 서 있었을까,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주인에게 건네더니, 다시 카페 밖으로 터벅터벅 나간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갔을까? 아니, 10분도 채 있지 않을 거면서 카페에는 왜 왔을까? 그냥 캔 맥주 사서 집에 가서 마시거나, 거리에서 마시는 게 더 저렴하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카페를 들러야 하는 것일까? 파리의 고단한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일까?

여기가 파리가 맞을까? 그 우아한 파리가, 세련된 이미지의 도시가 맞을까? 그런데 왜 나는 여기서, 이런 곳에서, 여기에서야 묵직한 친밀감을, 아늑함을 짙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파리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파리는 어머니의 품처럼 생의 막다른 지점에서 달려가는 구원처이자 위안처이다. 동경보다 더한 것은 무엇일 것인가."(함정임, '인생의 사용')

동경은 아니다. 가난과 비루함을 낭만으로 여길 정도의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밑바닥 생의 현장에서 고귀함을 뽑아내려는, 그런 계급적인 시각으로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이건 단지 그저 익숙함이다. 낯선 땅, 지구 건너편에서 발견한 그 동질감. 닮음. 나를 키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닮은 동네 시장 국밥집 할머니가 내준 밥을 먹을 때의 그 따스함.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김중식,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성당에서조차 소지품을 추슬렀던 순간

그러고 보니 나를 닮아 있지 않은 줄 알았다. 카페에 오기 전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독주로 성가를 부르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청명해서 눈을 감고 머무른 곳. 경건한 고요함 속에서 홀로 울려퍼지는 낭랑한 선율을 듣고 있자니, 코끝이 시큰해진 채 묵상에 잠겼던 곳.

눈을 뜨니 뒷자리에 흑인 형제가 앉아 있었다. 즉각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소지품을 추슬렀다. 발에 힘을 주고 발밑에 꼭 끼워넣었다. 영성체를 받아 모시러 제대로 나가는 순간(가톨릭교회에서 축성된 예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예식), 나는 또 그 검은 피부를 의식했고, 거슬림을 떨치지 못했으며, 아예 가방과 카메라를 다시 또 주렁주렁 둘러매고 앞으로 나갔다.

미사 말미, 신자들 간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시간. 그 흑인 형제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악수를 하며 평화를 빌었다. 그 눈빛, 그 입가의 주름, 그 수줍은 듯 소박한 미소, 거칠지만 따스한 손길……. 그는 순식간에 거동수상자에서 친근한 동네 아저씨로, "내가 닮아 있는 힘없는" 온화한 인격체로 돌변한 채 내게 와 닿았다.

다시 카페를 둘러본다. 온통 검고 그을리고 덥수룩하고 간혹 하얗다. 그리고 홀로 노랗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파리, #유럽 여행,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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