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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국어 교사지만 수업 시간에 한자어를 제법 사용하는 편이다. 아이들이 어휘 감각을 기르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홀로'를 '단독으로'로 쓰거나 '적절하다' 대신 '알맞다'를 쓰는 식이다.

한글과 쉬운 우리말에 기초한 '언어민주주의'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세상이다. 바뀌었다고 하지만 교과서, 책, 언론 보도에 어려운 한자어가 여전히 많이 쓰인다. 아이들이 평소 그런 말들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한자어를 부러 쓰는 이유들이다. 이외에 한자어를 공부하는 데 더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교육부가 초등학교 3~6학년 교과서에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는 한자 병기 정책을 펼치려고 한다. 지난해 9월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총론의 주요사항을 발표하면서 2018년부터 초등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기로 한 방침에 따른 것이다.

어휘력 늘리려 한자 병기?

교육부는 한자 병기 방침에 대해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자 병기를 바라는 사회적 요구가 꾸준히 증대해왔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는 한자 교육 강화 여론을 뒷받침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한자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하는 게 바람직하고(68.5퍼센트),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이 필요하다(학부모 89퍼센트, 교사 77퍼센트)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에 긍정적(교사 77.5퍼센트, 학부모 83퍼센트)인 의견이 높았다.

반대 의견이 거세다. <한겨레> 5월 1일자 보도(초등 한자 병기, 아이에게 득될까 해될까)에 따르면, 한글문화연대와 참교육을위한학부모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교육부가 여론조사 결과를 부풀리거나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설문조사에서 한자 병기 제도에 대해 찬반이 불분명한 답변을 빼면 찬성 의견이 교사 47퍼센트, 학부모 48.5퍼센트로 줄어든다는 이유에서다.

교과서와 관련된 문자정책은 자국어정책의 연장선에서 접근해야 한다.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국어'로 정의하고, '한글'을 국어를 표기하는 우리의 고유문자로 규정해 놓고 있다.

이 법 제14조에서는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를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자나 다른 외국 글자를 괄호 안에 넣어 처리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단서 조항이다. 교과서를 '공문서'에 준하는 공적 성격의 문헌으로 본다면 한글 전용 원칙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한자 병기 정책을 둘러싼 쟁점의 본질은 이른바 '현실론'이다. 한자 병기를 어휘력 향상 차원에서 접근하는 교육부나, 한자 병기가 초등생에게 학습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고 사교육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글 관련 단체들의 상반된 관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를 짚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 '언어민주주의'를 언급했다. <한글민주주의>라는 논쟁적인 글을 쓴 원광대학교 최경봉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언어와 문자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수 도구다.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언어와 문자는 해당 공동체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생활의 도구이기에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국어정책과 국어 인식에서 민주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한글 민주주의> 17쪽)

한자는 전통적으로 '지배층'의 문자였다. 두루 알다시피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 앞에서 최만리와 같은 '언어 보수파'들이 격렬하게 반발한 이유다. 한글에는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아침글자'라는 별칭이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이해하고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말이다. 지배층들이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거칠지만 민주주의를 계층이나 연령의 차등과 차별을 최소화한 이념 체계로 정의해 보자. 이를 전제로 할 때 한글은 일부 지배층의 언어인 한자나 한문보다 민주주의의 보편성에 상대적으로 더 잘 부합하는 문자 체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구성원의 합의'를 통한 민주주의적 관점을 강조한 최경환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한자 병기를 통한 어휘력 향상을 강조하는 교육부의 논법도 찬찬히 따져볼 측면이 있다. 언어 사용자의 어휘력은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평상시 언어 생활의 질과 양, 언어적 상호작용 유형의 다양성 여하, 언어 습관이나 독서 활동 양상 등이 어휘력 형성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표기 문자를 통해 어휘력이 향상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학자들이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영역일 것이다. 그렇다고 상식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국어와 영어"와 "국어(國語)와 영어(英語)" 두 가지 표기 방식 중 어떤 것이 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까. '國語'와 '英語'라는 한자를 보고 '국어'와 '영어'가 우리말이 아니라 한자어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을 어휘력의 향상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인양'을 '인양(引揚)'이라 하면 알까 

얼마 전 학교에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지를 들고 다닌 적이 있다. 실습을 나온 교생 선생님 한 분에게 서명 취지를 설명했다. 건네받은 서명지를 살피던 선생님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인양'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바다에 침몰한 배 따위를 위로 끌어 옮긴다는 뜻을 가졌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지에 한자를 병기해 '인양(引揚)'이라고 썼다고 해서 교생 선생님이 그 뜻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낯선 '암호' 같은 한자를 보고 더 어려워하지 않았을까.

어휘의 의미는 그것이 쓰이고 있는 언어적 상황이나 맥락을 통해 결정될 때가 많다. 잘 몰랐거나 어려운 말이라도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고 글을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어휘력이 단순히 표기된 문자에 힘입어 향상되기 힘들다고 보는 이유다.

진정한 어휘력은 교과서에 쓰인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폭넓은 대화와 꾸준한 독서도 중요하다. 예의 교생 선생님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인양'이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게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육부는 지금 46년이나 이어온 한글 전용 원칙을 설득력 없는 현실 명분에 기대 헌신짝처럼 버리려 하고 있다. 대학 교재에서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한자 병기 표기를 초등 교과서에 적용하겠다고 결정한 '용감한' 정책 결정자들도 베일에 갇혀 있다. 전형적인 '밀실 행정'이다. 교육부가 시대착오적인 한자 병기 정책을 버리고 보편적인 언어민주주의를 고민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초등 한자 병기 정책, #언어민주주의, #교육부, #밀실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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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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