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화 한화 이글스 전임 감독

한대화 한화 이글스 전임 감독 ⓒ 강윤기


봄바람이 불어온다. 녹색의 그라운드를 아름답게 수놓은 한국 프로야구의 '주인공'이자 모든 열정의 땀방울을 그라운드에 쏟아낸 한 남자가 있다. '영원한 해결사'이자 '프로야구 30년의 레전드'인 한대화 전 한화 감독이다.

대전 출신인 그는 동국대학교 4학년 때 출전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 때 좌측 폴대를 맞추며 끝내기 역전 3점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1983년 OB 입단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다 트레이드 항명으로 임의 탈퇴 1호 선수로 공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 이적 후 그는 역대 최고의 3루수로 변신했다. 그는 통산 성적 타율 2할7푼9리 163홈런 712타점 79도루를 기록했고, 골든 글러브 3루수 부분 통산 8회를 수상했다.

"더 훌륭하신 분들께 인터뷰 요청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한사코 거절하던 한 전 감독을 드디어 지난 21일 경기도 수원 케이티 위즈파크에서 만났다. 사람 좋은 미소로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한 전 감독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 내내 구수한 사투리로 제자들 생각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참 스승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는 한 전 감독과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한 전 감독님은 올 시즌 게임의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경기 감독관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팬들이 우천 취소결정을 어떻게 내리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많다. 경기를 빨리 취소하는 것은 아닌지.
"요즘 장마철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비가 많이 내렸다. 양 팀 이동을 감안하면서 그라운드 사정과 일기예보를 보면서 경기를 할지 말지 결정 내린다. 양 팀 선수들이 훈련을 못하고 바로 시합하는 것은 어렵다. 비가 그쳐도 시합을 하기엔 부상 염려도 있다. 인조 잔디구장의 경우는, 게임하기가 천연잔디보다 수월하기에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을 내리는 편이다."

# 해결사 한대화, 동국대학교에 부임하다

- 1997년 쌍방울에서 은퇴 후 1998년에 곧바로 젊은 학생들을 지도하러 동국대로 갔는데 어땠는가?
"그때부터 2003년까지 동국대 감독으로 재직했다. 모교로 갔기 때문에 그때 당시 스카우트를 독하게 했다(웃음). 유한준(현 넥센), 박정권(현 SK), 송광민(현 한화) 등을 영입했다. 박한이(현 삼성)는 그 전에 이미 입학해 있었다. 아마추어는 알루미늄을 사용하지만 프로는 나무 배트를 사용한다. 그래서 나무 배트에 적응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지도했다. 기본적인 프로 의식도 많이 지도했다. 후배들이고 제자들이기에 프로에 지명되기 위해 모든 걸 다했다. 그땐 나이도 젊었을 때라 열정도 체력도 넘쳤다(웃음)."

- 한 감독에 대해 '부드러운 카스테라 리더십'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 예정자들에게 주로 어떤 조언을 하나?
"늘 부드럽게만 해서는 안 된다. 강하게 자극을 줄 때는 주고, 부드럽게 할 때는 부드럽게 해야 한다. 고학년들 즉 3, 4학년들과 대회가 끝나면 식사를 하면서 여러 고민을 들어보고 간단하게 술도 한 잔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대학교는 거리감이 있다. 프로에 와서는 집안 고민도 들어주고, 특히 어린 선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연애 이야기도 들어주고 (호탕하게 웃으며) 운동은 노력 안하고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운동선수로서 기본을 지키고 예의를 갖추는 게 첫째다."

# 한대화, 고향 대전 땅을 방문하다

- 지난 2009년 한화 이글스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25년 만의 고향인 대전 방문이었는데 어떤 기분이었나?
"나는 한밭중-대전고를 졸업한 대전 토박이다. 선수라면 누구나 고향 팀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있다. 1983년 그 당시 OB 연고지가 대전이었는데 전체 1지명으로 내가 지명됐다. 그런데 1983년 시즌 끝나고 연고지가 서울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는 대전에서 선수 생활을 한 번도 못했다. 선수로는 대전에서 뛰어보지는 못하고 감독으로 대전구장 덕아웃에 들어가니 기분 묘하더라. 마음도 벅차고 감회가 새로웠다."

- 당시 한화의 어떤 부분이 미흡하고 감독으로서 어려웠는가?
"다 어려웠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2012년에 류현진(현 LA 다저스)이 10승을 못했다(9승9패 평균 자책점 2.66). 야수진들이 받쳐 주지 못했다. 실책도 많았고 타격도 약하니 정말 안타까웠다. 2011년엔 공동 6위하니깐 기대치가 컸다. 태균이 오고 찬호(박찬호) 오고 해서. 찬호도 2012 시즌에서 5승 했는데 야수 뒷받침이 되었으면 10승은 했을 텐데 미안했다.

2012 시즌 개막전 부산 사직 롯데와의 경기에서부터 꼬였다. 그 당시 안승민, 유창식 등 선수들이 다 실력이 올라오는 무렵이었고 애들이 죽기 살기로 했는데 선수들이 체력에 한계를 느끼더라. 용병투수도 카페얀은 공은 잘 던지던 친구였는데 야수들이 못 도와줬고, 데폴라는 마음이 너무 약했다."

- 2010 시즌 팀의 주전 3루수였던 송광민이 갑자기 군대를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한화 구단 프런트가 정말 일을 잘한다. 노재덕 단장 휘하에선 아주 단단해졌다. 그때 광민이(송광민) 같은 경우는 참 안타까웠다. 내가 아끼는 제자이기도 하고. 삼진이 많은 선수였는데 삼진 수도 줄고 자리 잡아가면서 선수로서 막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대를 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삼 년 동안 군대 참 많이 보냈다(물을 마시며). 아무래도 팀을 만들러 간 거라 희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어조로) 리빌딩은 무조건 어린 선수들로 포지션 채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경쟁 속에서 베테랑들과 어린 선수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야 그게 리빌딩이다."

# 야왕 신드롬을 일으키며 선전한 명장 한대화

2011 시즌 4월만 해도 연패를 거듭하던 한화는 5월 들어 반전의 모습을 보였다. 끈질긴 승부로 역전승만 5차례를 거두고 끝내기도 3번이나 보여주며 선수들은 악착같이 야구했다. 이에 야구 팬들은 부족한 전력에도 악착같이 야구하는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면서 한대화 감독에게 '야구의 왕', 즉 '야왕'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찬양했다. 야왕 신드롬을 일으키며 선전한 한화 이글스는 2011 시즌 큰 이슈였다.

- 2011년 경기가 끝난 후 감독님이 남긴 촌철살인이 큰 이슈였다. 말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알려달라.
"11시즌 7월 경기였다. 우리 팀 용병 가르시아가 삼진을 당하고 돌아서면서 덕아웃으로 걸어오기 전에 배트를 팍 부러뜨렸다. 그걸 보고 4번 타자던 최진행 선수에게 '야, 뭐 느끼는 거 없어?' 이랬다. 4번 타자로서 투지를 가지라고, 가르시아를 보고 배우라고 한 건데 뭐라 하는 줄 알아? (웃으며) '무섭네유' 이러더라. (웃음)

- 팬들은 대타 작전 때 한 감독이 타자에게 하는 귓속말(소위 '야왕의 속삭임') 내용을 매우 궁금해 했다. 어떤 내용이었나?
"그럴 때 타자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긴장하지 마라'다. 정신적으로 긴장을 많이 풀어줬다. 어떤 볼을 기다려봐라, 투수가 던지는 결정구를 노려 쳐라, 이런 말을 많이 했다. 선수들이 내 말을 듣고 집중을 해서 쳐내니 나도 가르칠 맛이 낫다."

# '야왕' 한대화 감독의 시련

한대화 감독은 시작부터 불운했다. 2009년 시즌 이미 꼴지를 기록하며 팀은 추락하는 중이었다. 송진우, 정민철, 구대성 등 팀을 이끌던 주축 선수들이 하나 둘씩 은퇴했다. 2008년 '클린업 쿼뎃'이라 불리며 타선을 이끌던 클락, 김태균, 이범호는 팀을 떠났고 김태완 혼자 외로이 타선을 이끌었다. 한 감독 부임 첫해인 2010년에는 49승 2무 82패에 그치며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그리고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면서 담금질한 2011년 59승 2무 72패를 기록하며 작년 시즌에 비해 +10승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운드에는 젊은 투수를 5인 선발(류현진, 양훈, 안승민, 장민재, 김혁민)로 고정하며 기회를 줬다. 타선에서는 노장 강동우와 정원석, 그리고 '유격수 골든글러브'에 빛나는 이대수를 중용하며 팀을 이끌었다.

이어진 2012년, 한화는 김태균과 송신영, 박찬호의 가세로 어느 때보다 높은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야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개막전부터 꼬인 한화는 엉성한 수비와 주루 플레이로 질타를 받으며 결국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재임 기간 3년 동안 147승 6무 218패를 기록한 한 감독은 고향 팀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말았다.

단순히 한대화 감독의 책임을 논하기에는 구단의 문제도 컸다. 2군 경기장이 없어 대전고에서 훈련했고, 2000년대 초 중반 신인 드래프트 미지명으로 2군 팜은 황폐화됐다. 거기에다 FA는 잡지 못하고 주전 3루수를 타 팀에 보내주는 등의 미비한 지원도 문제가 됐다.

- 그때 상황은 어땠나?
"투수력이나 공격력으로 보면 계산이라는 것이 있다. 중간 투수들을 올리면 이 정도는 상대팀 타선을 막아 낼 수 있겠다, 상대팀 투수상대로 우리가 몇 점 뽑으면 이길 수 있겠다, 이런 게 있는데 그때는 계산이 서지 않았다. 특히 2012년 대전구장은 인조잔디였다. 아무래도 인조잔디가 천연잔디보다 수비하기가 쉬운 편이다. 그런데 리모델링 관계로 한 달 동안 집을 떠나서 천연잔디에서만 시합을 했다. 사직, 청주, 문학 등 천연잔디 구장만 돌아다니면서 시합을 하니 에러가 쏟아졌다."

- 2012 시즌 5월 중에 수석코치가 바뀌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마음이 어떠셨는지?
"수석 코치가 바뀌면 감독이 아무래도 힘이 많이 떨어지니깐(창밖 경기장을 내다보며) 휴우... 그때 당시에는 뭐 말도 못했다.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 감독이라는 자리가 어려운 것 같다. 한 감독에게 감독이란 어떤 의미인가?
"한 팀의 수장이니깐 책임질 건 지는 거다. 내가 부족한 것도 많았다. 투수들은 코치들에게 많이 이임을 했다. 그러면서도 늘 이 부분을 강조했다. 코치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꼭 말해라,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니깐. 감독은 말여, (뜸들인 후 환히 웃으며) 성적이 좋으면 재밌고 성적이 나쁘면 힘든 자리다(크게 웃으며)."

- 한 감독님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일단은 내가 하는 일(KBO 경기 운영위원)에 충실하려고 한다. 현장에 나와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마음도 편하고 선수들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니깐. 관찰자 입장에서 바라보니 야구를 보는 눈도 달라지는 것 같고 덕아웃에 앉아 있을 때보다 보이는 점도 많고 좋다."

- '야왕' 한 감독의 해설을 듣고 싶어 하는 팬들도 있다.
"(손을 휘휘 저으며) 해설이 쉬운 게 아니다. 어려운 것이다. 신중하게 생각해야한다(웃음). 말주변도 있어야 하고 기본상식도 있어야 하고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많이 부족하다. 머리에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람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 그게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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