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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어머니 정효순의 삶을 기록한 '설풍행려"(정효순 구술, 안재성 정리,  도서출판 문화의 힘)
 통일어머니 정효순의 삶을 기록한 '설풍행려"(정효순 구술, 안재성 정리, 도서출판 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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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어머니, 대전지역 혁신정당 운동의 산 증인, 한국 혁신정당 최초 여성지구당 위원장, 대전충남 지역 민주화운동의 원로... 그의 앞에 붙는 수식어다.

정효순(91, 대전 서구 괴정동). 눈보라 속을 헤쳐 나온 그의 삶의 여정을 기록한 책이 출간됐다. <설풍행려>(雪風行旅)'(도서출판 문화의 힘)다. 작가 안재성이 정씨의 잡초 같고, 야생화 같은 구술을 오롯이 정리해 냈다.

그는 1925년 소백산맥 가장자리인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몰살한 700의병 중 한 사람이 정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저물어가는 봉건시대,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난 마지막 세대였다.

지금도 그는 일본 순사들이 장화를 신은 채 안방에 들어와 이불 속까지 뒤지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긴 칼로 할아버지 배를 쿡쿡 찌르며 반발로 '살이노(쌀을) 내놔라!'고 윽박지르던 때도 떠올렸다.

위안부로 끌려간 친구

순사와 관리들이 14세 이상 되는 처녀 사냥을 시작했다. 정씨보다 한 살 많은 이분용이란 친구도 이때 왜놈들에게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때 그는 순사들이 온다는 소리만 들리면 비좁은 항아리 속에 숨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덜덜 떨고 있어야 했다.

정씨 부모가 결혼을 서둘렀다. 해방되기 바로 전해인 1944년 10월, 18살 정씨는 인근 충남 논산군 벌곡면 대덕리에 사는 두 살 많은 이종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남편 이씨는 결혼 한 달 만에 일본의 규슈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듬해 8월 해방이 됐지만 남편은 눈물이 메말라 두려움으로 바뀔 무렵인 11월에서야 돌아왔다.

1948년 3월, 정씨의 하나뿐인 분신이 태어났다. 이명복이었다. 이때서야 출생신고를 하기 위해 혼인신고를 했다. 진짜 행복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아이의 돌잔치를 하고 두 달이 지난 1949년 5월, 남편이 갑자기 몸져누웠다. 그리고는 맥없이 눈을 감았다. 정씨의 나이 겨우 24살 때였다.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은 3년여가 전부였다. 그는 남편에게 맹세한다.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자식을 잘 키우겠노라고. 평생 당신을 배신하지 않고 홀로 살겠노라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6월. 전쟁이 터졌다. 그가 직접 보거나 혹은 전해 들은 전쟁이 스쳐간 자리는 참혹했다. 죽은 엄마 등에 업힌 채 울고 있는 갓난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가 없었다. 우는 갓난아이를 눈밭에 놓고 피난행렬을 따라가 버리는 엄마가 있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못했다. 그에게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악한 행위였다. 전쟁을 막으려면 남북이 평화로이 통일을 이뤄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전쟁의 깊은 상흔은 그를 통일을 위한 길로 이끌었다.

'성심당'보다 3년 먼저 창업한 '동아제과'

 정효순 범민련 고문(86). 지난 2003년 사재를 털어 '민족자주통일비'를 세운 후 이를 관리해오고 있다.
 정효순 범민련 고문(91). 지난 2003년 사재를 털어 '민족자주통일비'를 세운 후 이를 관리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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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피난민들의 도시가 된 대전에 터를 잡았다. 마침 작은 오빠가 대전에 빵과 커피를 파는 제과점을 차렸기 때문이다. 대전시내 한복판인 선화동 문화원 옆에 있는 이층 목조건물이었다. 제과점 이름은 '동아제과'였다. 지금 전국에 이름을 알려진 대전에 있는 빵집 '성심당'(1956년)보다 3년이 앞선다.

동아제과는 금방 지역의 명소가 됐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버터로 식빵을 구워 계란프라이를 넣어 팔았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 커피도 곁들였다. 장사가 잘되자 올케는 목척교 옆에 '아시아제과'라는 이름으로 분점을 냈다. 그녀는 이후 1965년까지 12년 동안 이곳에서 일했다. 그런데도 작은 오빠가 사기를 당해 제과점을 그만 둘 때는 방 한 칸 마련할 돈이 없었다. 대신 소중한 것을 얻었다. 평생을 함께 할 통일운동의 동지들이었다.

동아제과는 당시 진보파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신창균, 한병도, 정진상, 송두재 등과 동지 관계로 교우했다. 그는 대통령 후보로 나선 진보당 조봉암을 지지했다. 평등정책과 평화통일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대전천변에서 열린 조봉암의 선거유세도 직접 들었다. 진보당에 가입해 혁신계 진보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선거결과는 이승만의 승리였다. 부정선거 결과였다.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실제 정씨는 부정선거 현장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동아제과 옆 시청 3층에서 개표를 했는데 한밤중에 시청 3층에서 투표함들이 막 창밖으로 날아와 길바닥에 떨어지는 거야. 들어보니 지역에서 운반해온 투표함들이 봉인마저 뜯어진 채 이승만 표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해. 참다못한 야당 참관인들이 창밖으로 투표함을 집어 던진 거지."

그런데도 조봉암은 대전에서 이승만보다 겨우 600표 적은 2만3194표를 얻을 만큼 선전했다. 1958년, 제과점을 오가던 동지들이 모두 간첩접선 죄목으로 체포됐다. 조봉암도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이승만이 정적 제거를 위해 누명을 씌었고, 이듬해 조봉암은 사형됐다.

정씨는 제과점을 나온 후 생계수단으로 재봉질을 택했다. 처음에는 군용팬티를 만들었는데 기술이 늘어 한복집 일감도 맡게 됐다. 재봉틀 바늘에 찔려 오른쪽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이 휘어버렸지만 외아들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일했다.

이후 대학을 중퇴한 아들은 결혼 후 '중도전기'라는 전기재료상을 차렸다. 정씨도 홍명상가 1층에 작은 구멍가게를 냈다.

혁신계 최초 여성지구당 위원장을 맡다

 대전충남지역 통일관련 단체들이 민족자주통일비(충남 금산 중부대학 뒷산인 만인산 태봉자락 소재)에서 기념식을 갖고 있다
 대전충남지역 통일관련 단체들이 민족자주통일비(충남 금산 중부대학 뒷산인 만인산 태봉자락 소재)에서 기념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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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사회대중당 준비위가 결성됐다. 사회대중당은 여운형의 근로인민당과 조봉암의 후신을 자처하며 평화통일과 민주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정씨도 가입했다. 그러던 1971년, 송두재와 당수인 서민호의 권유로 사회대중당 대전갑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혁신계 최초 여성지구당 위원장이었다. 감옥에 가지 않으면 다행일 만큼 탄압이 심할 때였다. 통일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위원장을 수락했다.

지구당을 창당했지만 얼마 후 당수인 서민호는 대중당을 버리고 민주당으로 가 국회의원이 됐다. 변절하면 안 된다고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정씨는 신창균의 제안으로 이듬해 대중당을 탈당해 통일사회당 충남 제3지구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사회대중당은 이듬해 박정희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돼 이후 통일사회당으로 재편됐다.

당시 통일사회당은 합법적 정당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폐지를 내세웠다.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꿔 복무 기간을 줄이는 방안도 제시했다. 평화조약 체결과 유엔사령부 해체, 기간산업 분야 주요기업 국유화, 민주도형 새마을운동 전환, 공해기업에 대한 공해방지시설 의무화도 주장했다. 당시로보면 거의 혁명적인 제언이었다. 또 한국정당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사회주의 정당들의 조직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가입돼 있었다. 통일사회당 활동은 정당운동이기보다 민주화운동이었다.

1978년, 정씨는  통일사회당 지구당현판식에 축사를 맡았다.

"지금 선거는 80%가 부정선거입니다. 이런 식이면 남한이 북한과 뭐가 다릅니까? 박정희 정권이나 김일성 정권이나 똑같아요, 둘 다 물러나야 합니다."

하지만 정씨는 이 일로 경찰에 연행됐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국가원수모독죄가 적용됐다. 박정희를 김일성과 비교했다는 게 이유였다.

'박정희 모독죄'로 구속되다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유신헌법과 '대통령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이 선고됐다. 항소 후 징역1년에 자격정지 1년이 선고됐지만 옥살이는 그의 건강에 치명상을 입혔다. 옥살이하는 동안 아들은 동지가 되어줬다. 아들은 빚을 갚기 위해 일 년 동안 사우디 건설현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84년 '사회민주당' 이름으로 당 재건을 시작했다. 정씨도 가입했다. 사회민주당 정강에는 사회주이자이며 장차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한다고 명기했다. 그는 대전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결성을 주도해 의장을 맡기도 했다. 구속자 가족을 위해 싸우는 동안 대전 외곽 고수부지에 버려졌고, 구류를 살거나 경찰서 체육관에서 밤을 새운 날도 많았다. 어느 날은 최루탄 화염이 바지에 붙어 정강이 살을 태우기도 했다.

1988년 전국적 통일운동단체인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가 창립되자 중앙위원을 맡았다. 1995년에는 범민련대전충남본부 결성식에 참여,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러다 1997년 김영삼 정권의 통일운동 탄압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배포, 안기부에 의해 구속됐다. 두 번째 구속이었다. 이적단체인 범민련 구성과 가입, 이적 표현물 소지탐독, 북한 수재민 돕기 성금을 모아 조총련을 통해 송금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재판부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내달 2일 오전 11시 출판기념회

금산 중부대 뒤 태봉자락에 세워진 자주통일비와 정효순씨 금산 중부대 뒤 태봉자락에 세워진 자주통일비와 정효순씨
 금산 중부대 뒤 태봉자락에 세워진 자주통일비와 정효순씨
ⓒ 민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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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15선언 첫돌을 맞아 금강산에서 이북 사람들과 어우러져 춤추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정씨의 소원은 '통일'이다. 그는 2003년 사비를 털어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만인산 자락에 '자주통일비'를 제막했다. 제막식 날 정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죽거든 이 인근에 묻어 달라"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손길이 닿은 사업은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학살 진상규명이다.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희생된 민간인들의 유골이 묻힌 골령골을 찾아 희생자의 넋을 달래고 진상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구순을 맞은 2015년, 정씨는 "나는 통일을 못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되고 말았지만 살아 있는 여러분들은 꼭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 안재성은 이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 일본 순사를 피해 항아리 속에 숨죽여 숨어야 했던 소녀가 꿈꾼다. 유성기 틀어진 찻집에서 조봉암의 처형 소식을 읽으며 눈물짓던 여인이 꿈꾼다. 남과 북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평화통일의 그 날을 꿈꾼다."

그의 삶의 이야기는 '지역 민주통일운동사'이자 '혁신정당 운동사'다. <설풍행려> 출판기념회는 내달 2일 오전 11시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열린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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