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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x 9 = ?

구구단을 줄줄 외우고 있는 초등학생쯤이라면 단박에 '81'이라는 답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겨우 더하기 정도만 알고 있는 유치원생이라면 '9 x 9'라고 쓴 게 뭘 하라는 것인지를 모르니 답 또한 알 리가 없습니다. 

구구단을 모르고 있는 어린이에게 당장 '9 x 9'를 알려줘야 할 때,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방법 또한 다를 거라 예상됩니다. 얼른 떠올릴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막무가내기로 무조건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강제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구구단은 외워야 한다는 비효율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이미 아이가 이미 알고 있는 '더하기'를 재인식시켜주며 '9 x 9'란 9를 9번 더한 것과 같다는 걸 차분히 설명해 줌으로 구구단의 원리(?)까지를 잘 일깨워 주는 방법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방법이 더 지혜로운 가르침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가늠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유식, 초지 이상의 보살들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인 걸

불교 용어 중에 '유식'이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용어사전에서 '유식'을 검색하면, '유식(唯識)이란 일체의 삼라만상이 오직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며 그 무엇도 심식(心識)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를 달리 말하면, '마음뿐'이라는 말은, 같은 대상이라도 인식하는 사람에 따라, 또는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 또는 편견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이것이 현대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불확정성 이론'으로 나옵니다.

언뜻 봐서는 별로 어려운 단어도 보이지 않으니 쉬울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불교 용어 중에서 가장 난해하고 복잡 오묘한 것이 '유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동안 유식과 관련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공통점은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막막함'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벽, 넘을 수 없는 어떤 한계,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어떤 뜻, 읽고 있으면서도 읽지 못하는 어떤 의미가 분명 있을 거라는 걸 경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유식'이 알고 싶어 '유식'에 관한 책을 보면서도 유식이 점점 막막하기만 했던 건 나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유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초지 이상의 보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고, 범부들이 살아가고 있는 범부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범부 중 한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구 결과 '유식'이란 범부의 세계가 아닌, 초지 이상의 보살들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임을 밝혔다. 동시에 유식 사상의 핵심은 유식무의(唯識無義), 즉 "오직 조건에 의해 생신 법뿐이며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실체적 존재(artha=ãtman)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무분별지를 획득한 보살의 지혜를 말한다. -<유식과 의식의 전환> 349쪽-

유식을 알게 해 줄 <유식과 의식의 전환>

<유식과 의식의 전환> (지은이 정륜 / 펴낸곳 민족사 / 2015년 4월 20일 / 값 2만 2000원)
 <유식과 의식의 전환> (지은이 정륜 / 펴낸곳 민족사 / 2015년 4월 20일 / 값 2만 2000원)
ⓒ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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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과 의식의 전환>(지은이 정륜, 펴낸곳 민족사)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수행의 일환으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유식'을 연구하고 있는 정륜 스님이, 범부들도 어렵지 않게 '유식'이 무엇인가를 알며 익혀나갈 수 있도록 펼치는 법사리 멍석이자 연구결과물로 놓은 돌다리입니다.   

과학이 어렵고, 전문지식이 어렵고, 종교가 어려운 건 이들 전문분야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에는 들리지만 뜻을 새길 수 없는 용어들은 모든 것을 어렵게 하는 난관입니다.

쿵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고, 척하면 삼천리는 말이 있습니다. '쿵'이라는 말 어디에도 '호박'을 뜻하는 말은 없지만 앞뒤 관계를 충분히 헤아릴 정도로 서로 이해하고 있는 사이이거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이심전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학문이나 분야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그 분야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 용어에 드리워 있는 의미, 정의, 배경정도까지는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만 새길 수 있는 최소한의 장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성인(聖人)과 범부, 즉 보살(bhodhisattva)과 중생(sattva)의 차이는 所依(ãśraya)의 차이이다. 그 질적 차이는 범부의 인식 대상인 相(namitta)을 조건적 생기가 아닌 실제적 존재[ãtman=artha]로 인식하지만 무분별지의 無相(animatta) 경험을 통해서 상은 비실체적 존재이고 종자에 의해 현현한 것이며, 비존재한다(無境)는 것으로 알 뿐이다. 소의인 眼·耳·鼻·舌·身·意 6근의 변화가 인식의 차원을 변화시킨 것이다. -<유식과 의식의 전환> 275-

그러면 유식 사상에서는 의식, 의식의 상태를 어떻게 보는 것일까? 현대적 의미에서 의식은 인식과 과정 및 그 결과를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대상에 대한 추리, 예측, 기억, 추상, 감각, 감정 등을 나타내는 모든 정신 작용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유식과 의식의 전환> 143쪽-

정련 스님께서는 '유식'을 알기(이해)위한 전제로 용어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멍석을 펼치듯 고루, 돌다리를 이어가듯 촘촘하게 확인하며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용어는 용어에 담긴 정의조차 흔들리는 물살에 비춘 모습처럼 어른거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돌다리처럼 확실하게 새긴 용어는 용어에 담긴 정의 또한 흔들림이 없으니 용어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 또한 돌다리만큼이나 또렷합니다.   

헛구역질에 구토증세까지 보였을 연구과정 상상 돼

정련 스님이 연구 주제를 선정하고, 고찰하고, 결과를 도출해 나가는 과정을 어림해 보면,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더하기'를 충분히 재인식시켜주며 '9 x 9'란 9를 9번 더한 것과 같다는 걸 차분히 설명해 줌으로 구구단의 원리(?)까지를 일깨워 주는" 그런 자상함이 연상됐습니다.

유식(vijãńaptimãtra, 唯識)에 대한 기존의 정의 즉 식을 의식으로 이해한 "표상뿐이며 대상은 없다(唯識無境)"라는 해석을 검토해 보았다. 식(vijãńapti, 識)과 유(mãtra, 唯)가 지시하는 artha라는 개념을 추적하는 도중, 뜻밖에도 현장은 artha를『유식십이론』에서는 모두 外境/境으로, 『십대승론석』에서는 義로 번역했음을 보았다. 동시에 무경(visayãbhãva, 無境)은 분별 인식하는 식과 대응되는 개념이 아니라, 청정세간후득지에 의해 현현하는 사태임을 알게 되었다. -<유식과 의식의 전환> 132쪽-

보나마나 번한 모습이 그려지는 경우, 우린 '보나마나 비디오'라는 말을 합니다. 대개의 연구 결과물들이 다 그렇겠지만 이 책이 나오기까지 쏟았을 정련 스님의 노고야 말로 '보나마나 비디오'로 그려집니다.

읽고, 찾고, 비교하고, 확인하고, 검토하고, 검증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보면 헛구역질에 구토증세까지 보이기도 하는 게 이런 부류의 연구이며 결과물음을 알기에 어른거리기만 하던 유식이 조금은 또렷해짐을 실감합니다. 

유식이 비록 '초지 이상의 보살들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정련 스님이 법사리처럼 펼친 <유식과 의식의 전환>을 통해 유식이 '초지 이상의 보살들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범부의 세계를 벗어난 작은 깨우침, '유식'을 알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더딘 걸음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유식과 의식의 전환> (지은이 정륜 / 펴낸곳 민족사 / 2015년 4월 20일 / 값 2만 2000원)



유식과 의식의 전환

정륜 지음, 민족사(2015)


태그:#유식과 의식의 전환, #정륜,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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