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울볼> 메인 포스터

영화 <파울볼> 메인 포스터 ⓒ 오퍼스픽쳐스


'믿을 수 없도다. 아름다운 꽃이 이처럼 빨리 시들리라고는...'
- 벨리니의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중에서

때로 끝은 불현듯 찾아온다. 고양 원더스의 끝도 그러했다. 새로운 각오로 다가오는 시즌을 맞이하겠다는 감독과 코칭 스태프, 누구보다 절실했을 선수들의 의지도 팀의 해단이라는 파국적 결말 앞에서는 그저 무력하기만 했다. 외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단장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감독과 선수들은 고개를 떨궜다. 2014년 가을, 고양 원더스의 마지막이었다.

고양 원더스는 2011년 창단한 한국의 첫 독립구단이었다. 기업인 허민이 사재를 털어 설립했고 세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본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며 화제를 뿌렸다. 원더스에 입단한 이들은 거쳐온 삶의 어느 구간에서도 주목받은 적 없고 주목받았다 해도 지금은 잊힌 선수들이었다. 선수 각자가 걸어온 길과 처해있는 상황은 달랐지만 원더스를 통해 재기를 꿈꾼다는 점만큼은 모두가 같았다. 화려한 프로 경력을 가진 최향남과 김수경부터 단 한 차례도 프로 무대에 서지 못한 이름 모를 선수들까지 또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같은 꿈을 꾸었다.

영화 <파울볼>은 고양 원더스의 지난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선수의 미래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소속 선수를 프로구단에 내주면서도 끝끝내 정식 리그에 합류하지 못한, 그래서 제한된 수의 교류경기만 치르는 불평등을 감내해야 했던, 그리고 마침내는 해단을 선택하고만, 고양 원더스의 지난 시간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 <파울볼>의 한 장면. 고양원더스의 최고참 선수 최향남

▲ 파울볼 고양원더스의 최고참 선수 최향남 ⓒ 오퍼스픽쳐스


많은 이들에게 지루하다는 오해를 받고 있지만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유효한 양식이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극영화와 대비되는 다큐멘터리는 무엇보다 사실에 입각한 기록영화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많은 경우 다큐멘터리 영화의 감독은 창작자라기보다는 관찰자에 가깝다.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기에 촬영 과정에서 예상했던 결말이 뒤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런 상황에서 감독의 영향력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

때문에 극영화에 비해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폭이 좁게 느껴질 수 있으나 적절한 기획의도와 접근 방식, 그리고 약간의 운이 따라준다면 극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강렬한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실이 가진 힘은 다큐멘터리 양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다큐멘터리가 주목하는 세상에서는 때로 극영화보다 더욱 영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하고 현실의 부조리가 가감 없이 드러나 보는 이를 분개하게 하기도 하며 가장 건조한 관객의 눈시울조차 뜨겁게 만드는 감동적인 내용이 빚어지기도 한다. 더불어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뿐 아니라 가치 있는 이야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카메라로 담아내는 과정을 통해 감독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은 다큐멘터리가 지닌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이 영화 <파울볼>을 찍은 조정래, 김보경 감독은 고양 원더스의 창단부터 해단까지 약 3년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부족한 점 투성이인 오합지졸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과 코치들의 지도 아래 능력 있는 선수로 거듭나 하나하나 프로구단에 지명받는 모습, 패배를 거듭하던 약팀에서 퓨처스 리그 최고수준의 강팀으로 발전하는 과정, 급작스럽게 닥친 팀의 해체 소식에 고뇌하는 감독과 선수들의 모습 등을 가까이서 담았다.

 영화 <파울볼>의 한 장면. 고양 원더스를 거쳐 SK 와이번스에 입단한 설재훈 선수

▲ 파울볼 고양 원더스를 거쳐 SK 와이번스에 입단한 설재훈 선수 ⓒ 오퍼스픽쳐스


다큐멘터리임에도 기존의 스포츠 영화들과 같은 곡선, 즉 우정과 고난, 극복, 승리의 파노라마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직업인으로서의 감독을 넘어 진정한 스승이기를 선택한 김성근 감독, 그를 믿고 따르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는 선수들, 이들이 조금씩 분명한 성장을 이뤄내는 과정은 스포츠를 소재로 한 이름난 극영화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감동을 자아낸다.

영화는 단순히 밀릴 대로 밀린 선수들이 기회를 얻어 재기하는 모습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다. 창단 이후 서른 명이 훌쩍 넘는 선수들을 프로구단에 입단시키며 한국 야구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고양 원더스가 그 놀라운 성취와 기여도에도 해단에 이르게 된 상황의 부조리를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박동희 야구전문 기자와 양준혁 해설가의 인터뷰를 통해 야구단을 가진 기업들이 고양 원더스의 리그 진입을 반기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KBO가 단계적인 정규리그 진입이라는 허민 구단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 등을 의도적으로 부각한다. 이로써 영화는 무능한 KBO와 기득권을 가진 기존 구단들이야말로 고양 원더스의 해단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주체임을 분명히 한다. 박근혜, 문재인 등 유력 정치인이 고양 원더스의 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보이는 장면에선 이러한 감독의 의도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영화 <파울볼>의 한 장면. 고양원더스 김성근 감독과 선수들

▲ 파울볼 고양원더스 김성근 감독과 선수들 ⓒ 오퍼스픽쳐스


생각하면 할수록 파울볼은 요상한 규정이다. 정해진 선 안에 들지 못한 파울볼은 결코 안타일 수 없는 타격임에도 타자에게는 계속해서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영화는 그 제목을 통해 고양 원더스를 파울볼에 빗댄다. 그럼에 이 영화는 단순한 스포츠 영화일 수 없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낙오되고 소외되는 이들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이며 우리 사회에 더 많은 파울볼 규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웅변이다. 거듭 파울을 내도 버틸 때까지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안타를 칠 수 있어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다.

원더스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매번 홈경기를 찾았던 소년 팬이 마침내 오열하던 그 순간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소년도 차차 알게 되겠지만 때로 이별은 불현듯 찾아오고 슬픔이란 아무렇지 않게 가슴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영화가 그리고 있는 소년의 울음은 절망보다는 차라리 희망이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운동장을 달리는 선수들을 보고서 슬픔에 북받쳐 오열하던 소년, 이 척박한 세상에도 희망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마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사이에 이어진 가느다랗고 희미한 끈으로부터.

어느덧 4월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낸다던 바로 그 잔인한 4월이다. 찬란한 3년을 꽃피운 고양 원더스는 이제 시들어 떨어졌지만, 파울볼을 아웃이 아닌 파울볼이게끔 하는 제2, 제3의 원더스가 다시 태어날 것을 나는 믿는다. 척박한 겨울을 지나 다시 고개를 쳐드는 한 송이 라일락처럼, 그렇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빅이슈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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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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