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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AM 6:24 모처럼 여행에 설렌다. 탈출이란 표현이 더 와 닿을 만큼. 

매일 보는 아침 풍경은 더욱 애틋하고 감사하다.

매일 보는 아침
 매일 보는 아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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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 식사는 남은 김치찌개와 유통기한 지난 식빵, 스파게티 토마토 소스와 땅콩잼. 이런 조합마저 좋은.

여행이 주는 긍정의 힘이다. 

'마침내 길 위에 다시'
 '마침내 길 위에 다시'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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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길 위에 다시. 몇 걸음 내딛다 완벽한 기분을 위해 휴대전화로 음악을 켠다. 매일 걷던 거리도 여정의 일부가 되면 부활한 듯 생기가 돈다. 둥글고 옅은 우윳빛 막이 몸 주위를 감싼 듯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이 어이없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 계속해 발목을 잡히자 마지못한 내 암시였는지도. 역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었는데 오늘은 나도. 일탈이 얼마나 고팠는지 실감한다.

역에서
 역에서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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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0:17 기차역 플랫폼에 서니 가슴이 뛴다. '살아있는 느낌!'.

플랫폼에서
 플랫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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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께서 "아가씨는 어디까지 가요?" 묻는다. '어디'가 아니라 '아가씨'란 단어에 흐뭇해지는 내가 우습다.

AM 11:05 "음악 같이 들으실래요?" 할머니께 여쭈니 "좋지!" 하며 반기셨다. 건넨 이어폰을 더듬더듬 꽂으시며 "젊은 사람 듣는 음악 (나도)들어보지"라고 하셨다. 그냥 놔둘까도 싶었지만 얼른 선곡을 다시 했다.   

가진 노래 중에서 에픽하이 '트로트' , 장미여관·심은경 '나성에 가면', 강산에 '예럴랄라' 등의 순으로. 

어느샌가 아랫배 위에 가지런히 포개져 있던 할머니의 오른손 엄지가 까딱까딱, 고개도 끄덕끄덕. 곡이 끝나면 움직임도 멈추는 게 즐기고 계심이 분명했다. 결국은 할머니도 나도 왼손으로 무릎을 치며 흥에 취해 갔다. 

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와
 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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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명 지나 울금 가는 길. 차창 밖 낙동강 변에 선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지나가는 기차나 비행기를 보면서 손을 흔드는 사람의 마음.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나 역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것. 나와 같은 마음이 있음을 믿고 또 응원하는 그러한 마음.

김밥
 김밥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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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여행엔 김밥이 진리!

배불리 점심을 먹고 카페칸에 있는데 정차역에서 20대의 젊은 이들이 후닥닥 뛰어들어와 바닥에 풀썩 앉는다. 일반실 통로는 물론 느린 기차의 실내는 자리를 사지 않은 여행자로 북적인다. 문득 기타로 즐거운 노래를 연주하고픈 열망에 휩싸인다.

25일>

AM 8:00 돼지가 사는 어느 게트하우스에서의  아침. 오래된 '콜라택' 간판이 붙은 허름한 건물인데 내부는 머물수록 편안하고 재미난 매력이 있다. 나 역시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꾸리면서, 공간은 그것을 채우는 사람의 무의식까지 비추는 거울 같다고 느낀다.

돼지가 사는 어느 게스트하우스
 돼지가 사는 어느 게스트하우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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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이 작은 미니돼지를 옥상에서 만났다. 냉장고 속 요구르트를 신나게 핥아 먹는 중이었다. 그러고는 기분이 좋은지 하얀 요구르트 범벅인 코를 들이밀기도, 꼬리를 흔들며 걷기도, 발랑 누워 햇볕을 쬐기도 한다. 뒷다리로 배를 긁는 모습까지 개와 많이 닮았다. 싫고 좋은 감정과 불편하고 아픈 감각을 느낌에 사람과도 실은 다르지 않다. 

여느 제 종족과 달리 존중받는 삶을 살고 있는 녀석을 보며, 유대인 학살과 같은 숱한 인류의 잔혹사가 실은 절대 다수 보통 사람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 행해졌음을 자각한다. 오늘날 인간의 육식 문제는 고기를 먹고 안 먹고의 차원이 절대 아니다.

다른 생명의 가치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외면하고, 더 이상 생명을 생명답게 대하지 않음에 무시무시한 심각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육식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한 사회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게스트하우스에 사는 돼지
 게스트하우스에 사는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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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 귀향한 지 3년. 하지만 자유와 고독은 한몸이었다.

너무 보고 싶어 수 시간 차로 달려 비로소 만난 벗들과 늦은 밤까지 함께 있었지만 여전히 또 보고 싶다. 결혼해 아이가 둘인 친구더 제 집에서 하루 더 있어라 성화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일상의 외로움에 더욱 강해져야지 생각하면서. 

안쓰럽기도 겁쟁이 바보 같기도 해서 눈물이 찔끔 솟는다.

광화문 세월호 추모 현장
 광화문 세월호 추모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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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5:25 광화문 세월호 추모 현장. 멀리서 볼 때는 잊혀지는 것만 내쳐지는 것만 같았는데 이곳에선 '건강한'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더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큰 슬픔 한가운데서 같이 슬퍼하므로써 생기는 힘... 다행스럽고 고맙고 비로소 안심 되는.

슬픔이 하나가 아님을, 하나의 슬픔에서 또다른 슬픔을 내 살처럼 아프게, 귀하게 여겨야 함을 체감한다. 지하도 아래선 장애와 그에 대한 편견으로 외로이 죽어간 장애인들의 영정과도 마주한다.

또 하나의 슬픔
 또 하나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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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11: 10 그저 누리는 행복에 죄책감 갖지 말 것. 순수하게 기뻐하고 감사하되 불이 불을 키우듯 내 가진 행복을 나눌 것.  

한동안 짓눌린  듯 답답했던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잦아들길 여러 번. 속이 시원해진다.

다시 나의 일상
 다시 나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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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00:49 역시 여행은 희망과 감동을 일깨워주는 최고의 명약.

안녕, 다시 나의 일상!

덧붙이는 글 | 2015년 4월 25일 저녁 7시20분 서울발 무궁화호에서 만난 구강운 역무원 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용산역 매표소에 놓고 온 짐가방을 친절하고도 재빠른 조치로 찾아주셨습니다.



태그:#1박2일, #SBCH, #미니돼지 , #광화문세월호, #공감각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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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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