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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가 조금 불편했던 탓도 있겠지만, 구름 위를 걷는 듯 했던 로마에서의 첫날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아니면 흔히들 말하는 시차 적응 때문인지 약간 멍한 상태로 둘째 날 아침을 맞았습니다. 오늘 아침, 첫 일정은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입니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 http://www.trevifountain.net/
▲ 트레비 분수 로마의 트레비 분수 http://www.trevifount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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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수많은 분수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분수인 '트레비'. 그런데 이번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트레비 분수'가 전면적인 보수 공사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로마 여행자들이 반드시 거치는 '뒤로 서서 동전 던지기'를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트레비 분수'를 아예 일정에서 뺄까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온 여행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라도 그동안 공사가 많이 진척되어 분수의 일부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공사장 가림막 너머라도 '동전 던지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도 해봅니다. 그래서 계획보다 일찍, 아직 해도 뜨지 않은 로마의 거리로 나섰습니다.  

오늘은 처음부터 걷습니다. 어제처럼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앞을 지나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인 '퀴리날레 궁전(Palazzo del Quirinale)' 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어제 제법 많은 거리를 걸었는데도 생각보다 아침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보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겨울 아침인데 의외로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론 저렇게 매일 온몸으로 로마의 아침을 맞는다는 게 부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로마에서의 일상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여행자인가 봅니다. 

그렇게 로마의 아침을 호흡하며 30분 정도 걸으니 눈앞에 공사장 가림막이 나타납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참담합니다. 원래 '폴리 궁전'의 파사드(건물의 정면)를 장식하고 있는 '트레비 분수'는 그 자체가 건축물처럼 여겨질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그런데 보수 공사를 위한 구조물들 때문에 그 큰 분수의 아주 작은 부분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른 아침이기도 하지만, 나 말고는 찾아오는 관광객이 한 명도 없습니다. 아쉬운 탄식이 그냥 흘러나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트레비' 아니 공사장 주위를 한 바퀴 휘 둘러 봅니다. 그랬더니, 고맙게도? 공사장 전면에 '동전 던지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작게 마련해 놓았습니다.

가림막에 가린 트레비 분수 아쉬운 탄식만이

공사 중이라 분수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초라하게 동전 던지기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놓았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알아보니 지금은 저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 보수공사 중인 '트레비 분수' 공사 중이라 분수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초라하게 동전 던지기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놓았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알아보니 지금은 저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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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에 실소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는 '트레비 분수' 보수 공사 현장에서 혼자 '동전 던지기'를 합니다. 속설처럼, 정말이지 로마에 꼭 다시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트레비 분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트레비 분수'에서 서쪽으로 두 블록 정도 걸음을 옮기면 '콜론나 광장(Piazza Colonna)'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광장의 중심에는 거대한 원기둥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기둥(Marcus Aurelius Column)'입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과 게르만족의 침입, 시리아 총독의 반란 등으로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황제는 진중에서 저 유명한 '명상록'을 남기게 되는데 학창 시절, 윤리 시간에 배웠던 스토아학파의 거의 마지막 계승자가 바로 아우렐리우스입니다.  

콜론나 광장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원기둥'. 원기둥 전체엔 마르코만니인과의 전투가 부조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원기둥 콜론나 광장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원기둥'. 원기둥 전체엔 마르코만니인과의 전투가 부조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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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홀로 맞이한 원기둥은 그 크기부터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자세히 보면 원기둥 전체가 작은 부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게르만족인 마르코만니인들과 벌인 전쟁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첫 전투 장면도 바로 이 전쟁입니다. 영화에서는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도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 전쟁 과정에서 병사하게 됩니다. 때마침, 아침 햇빛이 떠올라 세월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황제의 원기둥을 은은하게 비춰줍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로마에서의 둘째 날, 시작해 보겠습니다.

여행자의 발걸음은 아직 햇빛이 스며들지 못한 로마의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성 이그나치오 디 로욜라 성당'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온 것일까요? 9시 반에 문을 연다는 안내문과 함께 성당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이제 갓 8시를 넘긴 시간.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근처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Sopra Minerva)'으로 향합니다.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소박한 고딕양식의 외관을 가진 도미니크 수도회의 본당 성당입니다.
▲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소박한 고딕양식의 외관을 가진 도미니크 수도회의 본당 성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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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 광장에 도착하니 먼저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제 '포폴로 광장'에서 보았던 것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인데 받침으로 쓰이고 있는 코끼리 상이 독특합니다. 베르니니의 디자인으로 제자가 조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덩이를 짊어지고 있는 게 힘들다는 듯 긴 코로 오벨리스크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합니다. 코끼리와 오벨리스크, 그리고 저 멀리 살짝 보이는 '판테온'에게 눈길을 주고는 성당 문 앞에 섭니다. 다행히 성당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곳,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에 온 실감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로마에 왔다는 실감이

성녀 카트리나의 무덤이 놓여 있는 성당의 중앙 제단입니다.
▲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중앙 제단 성녀 카트리나의 무덤이 놓여 있는 성당의 중앙 제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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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에선 작은 미사가 진행되고 있나 봅니다. 성당 전체를 울려오는 사제들의 독경 소리와 찬송가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조각상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미켈란젤로의 '십자가를 쥔 예수상'!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소름이 돋습니다.

미켈란젤로 '십자가를 쥔 예수상'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중앙 제단 옆 기둥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 십자가를 쥔 예수 미켈란젤로 '십자가를 쥔 예수상'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중앙 제단 옆 기둥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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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오래 전, 유행처럼 번졌던 문화유산 답사 시절, 혼자 불국사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전율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 물론 유홍준 교수는 불국사의 종소리를 형편없다고 했지만 초보 답사객이었던 나에게는 그 소리마저 황홀하게 느껴졌습니다. 왜일까요? 종교도 가지지 않은, 심지어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부정적 시각까지 가지고 있는 내가 왜 이 '예수상'을 보고 소름이 돋았을까요? 

주위를 둘러봅니다. 아직 찾는 이가 없는 어두컴컴한 성당, 한 쪽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독경 소리는 계속해서 온 성당을 울립니다. 미네르바 신전 위에 지어진, 도미니크 수도회의 본산과도 같은 성당. 시에나의 성녀, 카트리나의 무덤이 있고, 피렌체에서 만날 프라 안젤리코의 무덤도 있는 성당. 그리고 저 유명한,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이 열렸던 곳. 하지만 내 소름과 전율은 이런 백과사전적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미켈란젤로 '십자가를 쥔 예수 상'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 예수상 미켈란젤로 '십자가를 쥔 예수 상'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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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예수상'을 봅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제자에 의해 완성된 때문인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품. 원래 누드였지만 로마 가톨릭의 반발로 어울리지 않는 청동 천 자락이 덧대어진, 본 모습을 잃어버린 작품.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다른 작품들처럼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예수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종교 이전에, 오랜 세월 동안 로마인들의 삶 속에 함께 살아온 미켈란젤로의 정신이기도 하겠지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느낀 것은 이탈리아와 로마에 대한 실감이었습니다. 어제의 로마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면, 오늘의 로마는 여행자인 나에게 저 미켈란젤로의 '예수상'을 통해 살아 숨 쉬는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어느 새 미사가 끝났는지 사제들이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카펠라(부속 예배당)에서 나옵니다. 나이 지긋하신 사제 한 분이 이른 아침부터 성당을 찾아온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본 조르노!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 따뜻한 인사에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라치에!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싱긋이 웃으며 지나가십니다. 나도 모르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셈이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길 잘 한 것 같습니다.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는 예수상 외에도 꼭 보고 가야할 작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 제단 옆 '카라파 예배당(chapelle Carafa)'에 있는 필리피노 리피의 '수태고지'입니다. 필리피노 리피는 어제 '바르베리니 국립미술관'에서 만났던 필리포 리피의 아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들 필리피노 리피의 '수태고지'에도 아버지의 그림처럼 주문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부전자전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필리피노 리피 '수태고지'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아버지 필리포 리피와 마찬가지로 '수태고지'에 주문자들을 그려 놓았다.
▲ 수태고지 필리피노 리피 '수태고지'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아버지 필리포 리피와 마찬가지로 '수태고지'에 주문자들을 그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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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를 끝으로 성당 문을 나섭니다. 그런데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원래 계획이었던 '성 이그나치오 디 로욜라 성당'이 아니라 광장 너머 오른쪽에 손 잡힐 듯 우뚝 서 있는 건물로 향합니다. 로마의 또 다른 상징, '판테온(Pantheon)'입니다.  

원래 계획과 달리 뭔가에 끌린 듯 '판테온'으로 향합니다.
▲ 광장 너머로 보이는 판테온 원래 계획과 달리 뭔가에 끌린 듯 '판테온'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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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이준호 기자

덧붙이는 글 | 2014년 12월 5일부터 2015년 1월 4일까지 이탈리아 미술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트레비분수, #로마, #이탈리아, #이탈리아여행, #산타마리아소프라미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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