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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경씨의 야생화 농장에는 600여 종의 야생화가 재배되고 있었다. 홍천군청 농업정책과 김승렬 귀농귀촌 담당계장에게 야생화 보존과 재배를 통한 소득창출을 위하여 전시장 확보가 중요하다며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백학경씨의 야생화 농장에는 600여 종의 야생화가 재배되고 있었다. 홍천군청 농업정책과 김승렬 귀농귀촌 담당계장에게 야생화 보존과 재배를 통한 소득창출을 위하여 전시장 확보가 중요하다며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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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4시간이 너무 짧은 사람이 있다. 달력에 빽빽하게 메모되어 있는 일정만 보고도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나 어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2012년 경남 창원에서 강원도 홍천으로 귀농한 백학경(53세)씨와 정승현(62)씨 부부다. 부부는 새벽부터 일어나 150여 평의 하우스에서 야생화를 살펴보는 것으로 일상이 시작된다.

야생화 전도사 백학경씨

아침 9시가 되면 남편 정승현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홍천군 체육센터에 출근하고, 부인 백학경씨는 야생화 돌보기에 본격적으로 매달린다. 하우스 안에서는 백두산 할미꽃과 영월에서 서식하는 동강노랑할미꽃, 그리고 오공구라꽃, 매발톱꽃, 암초롱꽃 등 600여 종의 야생화가 긴 겨울을 잘 이겨내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꽃은 습지에서 서식하는 '흰누운주름잎'입니다. 줄기식물로 4월에서 5월까지 꽃이 피지요. 그리고 이 애들은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앵초인데, 흰앵초는 귀한 꽃이랍니다. 또, 이 아이는 설란 원종입니다…." 

꽃 하나하나를 설명해주는 백학경씨의 표정이 환하게 핀 야생화처럼 싱싱했다. 하우스 안에 있는 수많은 꽃들을 다 설명해줄 기세였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수많은 꽃들의 생경한 이름은 물론 꽃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다. 꽃 한 송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처음에는 취미로 야생화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야생화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백학경(54세)씨는 경남 창원이 고향이다. 농사를 많이 짓던 부모님 밑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나이 쉰이 되도록 창원을 떠나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창원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총무과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아이 넷을 낳아 키웠다.

그러나 인생사가 생각처럼 순탄하지는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던 남편이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지만 더욱 악화되었다. 병원 생활을 5년 넘게 했다. 직장 생활도 할 수 없었다. 백학경씨가 가장이 되어야 했다. 새마을금고, 지역 농협 등에서 근무했다.

"직장 다니던 남편이 쓰러졌어요"

백학경씨 남편 정승현씨가 포토작업을 하고 있다. 정승현씨는 매일 출근 전에 부인 백학경씨 일을 거들어주고 나서 출근을 한다고 한다
 백학경씨 남편 정승현씨가 포토작업을 하고 있다. 정승현씨는 매일 출근 전에 부인 백학경씨 일을 거들어주고 나서 출근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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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아이들은 크고, 남편은 한쪽이 마비되어 있었으니까요. 둘째 딸이 대학에 입학해야 하는데, 등록금 마련이 너무 어려웠지요. 딸아이가 등록금을 벌겠다며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월급을 제대로 받지를 못하고 그만두더라고요. 그래서 농담 삼아 집에서 키우던 야생화를 팔아서 등록금에 보태라고 말했는데, 정말로 가지고 나가서 팔아오더라고요…."

그때가 8년 전이었다고 백학경씨는 말했다. 야생화 재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문적인 공부도 시작했다. 밭에 하우스를 설치하고 야생화를 재배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창원에서 홍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5년 동안 야생화를 재배하던 밭이 종합병원 부지로 강제수용 되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이전해야 했는데, 토지 보상금으로 밭은 돈으로는 창원에서 적당한 땅을 구입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알아보니까, 자연생태환경과 우리나라 토종 야생화가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강원도였지요. 때마침 홍천에 가격이 적당한 임야가 있어서 구입하게 되었고, 홍천과 인연이 된 것입니다."  

순전히 야생화만 생각하고 홍천으로 이주를 실행했다는 설명이었다. 자녀들이 걱정했지만 아직 중학생인 막내아들을 키우려면 경제활동을 해야 했다. 백학경씨는 홍천의 임야를 구입한 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창원에 있는 야생화를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꼬박 일 년여가 걸리는 작업이었다.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 너무 힘들었어요"

백학경씨가 운영하는 별초롱야생화농원이다. 뒤로 보이는 하우스는 600여 종류의 야생화를 재배하는 곳이고, 앞에 보이는 하우스는 백학경씨 부부와 중학생인 막내아들이 거처하는 임시숙소이다. 세들어 살던 집 주인과 갈등때문에 지난해 임시로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백학경씨가 운영하는 별초롱야생화농원이다. 뒤로 보이는 하우스는 600여 종류의 야생화를 재배하는 곳이고, 앞에 보이는 하우스는 백학경씨 부부와 중학생인 막내아들이 거처하는 임시숙소이다. 세들어 살던 집 주인과 갈등때문에 지난해 임시로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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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마을에서 세를 얻어 살았어요. 중고하우스 대를 사서 설치하고, 창원에 있는 야생화를 옮기기 시작했죠. 미치지 않고는 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그러나 저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힘든 것은 몸으로 하는 일 때문이 아니었어요. 밭을 도지 얻어 하우스를 설치했는데, 2년 만에 비워달라는 거예요. 게다가 마을의 어느 분과 갈등이 시작되었지요.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백학경씨는 그 대목을 말하면서 눈시울이 불거졌다. 지역민들의 편견이 무서울 정도였다는 것이었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마을 일에 참여해서 활동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해서 의견을 말하는 것도 오해의 불씨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홍천군에서 운영하는 귀농센터 상담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긍적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요.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활동하기 시작했고요. 귀농자를 위한 교육도 열심히 받았지요. 그러면서 시작한 것은 '우리 꽃 연구회' 활동이었습니다. 지금은 홍천에서 야생화에 관심을 갖고 계신 회원이 많이 늘어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종야생화를 재배하여 소득을 창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어 질문했다. 수도권과 그리 멀지 않은 홍천이지만, 도시로 가지고 나가 판매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게다가 야생화를 재배하여 판매하기에는 홍천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집에서 내다보이는 것이 산이고,  집밖으로 나가면 바로 산이나 들에서 보는 게 야생화였다.

"돈 벌려고 귀농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봄비 내리는 날 야생화 포토작업을 하기 위하여 밭에 서 있는 부부를 찍었다
 봄비 내리는 날 야생화 포토작업을 하기 위하여 밭에 서 있는 부부를 찍었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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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생각하면서 야생화를 키우는 건 힘들 거예요. 꽃을 정말 좋아하니까, 꽃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고 병원 생활을 5년 정도 하고 회복되었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접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꽃을 키우면서 우리 가족과 함께 밥만 먹고 살면 만족해요. 욕심 없이 살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젊은 시절 회사원으로 살다가 갑작스런 계기로 귀농을 한 백학경씨와 정승현씨 부부는 욕심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야생화가 좋아서 고향을 떠나 홍천에 터전을 마련하고 누구보다 지역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부부였다. 그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수영장 탈의실에서 근무하는 남편은 돈벌이가 녹록하지 않은 아내의 야생화 재배를 적극 후원하는 후원자였다.

기자는 취재를 마치면서 달력에 체크되어 있는 백학경씨의 바쁜 일정표를 다시 보았다. 지역 활동과 귀농교육 등의 일정이 메모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부지런함을 엿볼 수 있었다. 어느덧 귀농 15년차가 된 기자의 마음가짐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정말 너무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귀농이었다. 시골출신이라는 것만 믿고 덤벼들었다가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귀농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신중한 준비 과정과 귀농 교육을 통한 정보 수집과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백학경씨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야생화 농장 책상에 있는 달력에 귀농교육과 지역활동에 바쁜 백학경씨의 4월 일정이 메모되어 있었다.
 야생화 농장 책상에 있는 달력에 귀농교육과 지역활동에 바쁜 백학경씨의 4월 일정이 메모되어 있었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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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귀농귀촌, #홍천군 귀농, #귀농번지, #백학경,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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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아재양념닭갈비를 가공 판매하는 소설 쓰는 노동자입니다. 두 딸을 키우는 아빠입니다. 서로가 신뢰하는 대한민국의 본래 모습을 찾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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