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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때 직장을 잃고, 창업 후 실패를 한 남편과 함께 정든 부산을 떠나 충북 청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렵사리 새 직장을 얻은 남편은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나는 남편 없는 빈자리를 메우고자 더욱 아이들에게 집중하면서 조심스레 밝은 내일을 꿈꿨습니다.

실직과 창업으로 소요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질구레한 액세서리 등을 팔고, 책을 팔고, 때론 살림살이들을 팔기도 하면서 버티듯 살아낸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에 얼마가 됐든 꼬박꼬박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에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하루 열두 시간 주야 교대 근무를 하면서 남편은 등골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1년 남짓, 어쩌면 우리는 남편의, 아빠의 등골을 빼먹는 줄도 모르고 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부터 남편은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방바닥을 짚고, 벽을 짚고, 아직은 어리기만 한 아들 아이의 양어깨를 짚고서야 겨우 일어서는가 하면 다시 고통에 신음하며 주저앉곤 했습니다.

일어나지 못하는 남편

 어느날 남편은 스스로 일어서지 못했다. 남편의 병명은 '척추관 협착증'이었다.
ⓒ wiki commons

난생 처음 겪는 일인지라 어찌할 줄을 몰라 부들부들 떨기만 하다 병원을 찾았습니다. 피검사, 소변 검사, CT촬영, MRI 검사 등을 받고 알게 된 병명은 '척추관 협착증'. 디스크 4번, 5번이 거의 망가져 지금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수술 아니고서는 어떤 치료 방법도 없다"고 말해줬습니다.

하루 열두 시간 주야 교대 근무를 하면서 20kg 이상 제품 원료 포대를 끊임없이 옮기고 또 옮겨 놓는 일이 마흔이 넘은 남편의 몸에 무리가 된 것이었습니다. 주야 근무의 특성상 정상적인 일상 생활이 불가피하고, 주기적으로 밤낮을 뒤바꿔 생활하는 통에 가뜩이나 건강을 돌볼 겨를도 없는 상황에서 피로가 점점 쌓여만 갔던 겁니다. 그리고는 어느날 아침, 남편의 몸이 와르르 무너져내렸습니다.

척추관 협착증. 남편의 병명을 알게된 뒤, 솔직히 말하자면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제 어떡하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눈 앞을 가득 덮어버렸습니다. 아직은 어리기만 한 아이 둘과 낯선 도시, 낯선 골목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단 1분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남편, 지금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남편에게 멀쩡하게 건강하기만한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일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남편이었습니다. 입원 수속을 하고 빠른 시일 안에 수술을 받게 해야 했습니다. 수술 후 재활 기간 동안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것인가는 그 다음 문제였습니다. 지금 당장 남편에게 환자복을 입혀 입원시키고, 수술에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걸어다닐 수만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남편이 한사코 입원을 거부하는 겁니다.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깟 돈이 무슨 대수라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입원하고 수술받자고 마구 큰소리를 냈습니다.

지팡이 대신 우산에 의지해 식은땀을 흘리며 병원에 왔던 남편은 병원을 찾을 때보다 더 힘들게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어쩌면 평생을 제대로 서 있지도,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남편은 몹시 떨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수술 외에는 완쾌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못 들은 척하고, 남편은 이튿날부터 척추관 협착증 비수술 방법만을 수소문했습니다. 신경외과를 찾아 통증 억제 주사를 맞기도 했고,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고 뜸을 뜨기도 했습니다. 또 비전문가를 찾아 위험천만한 시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차가 있어서, 자동차 앞까지는 힘겹게 걸어가 자동차를 타고 운전대를 잡아 목적지에 도착, 시술을 받은 뒤 다시금 운전을 해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정말이지 두 눈 버젓이 뜨고 마주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 하지도,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 하지도 않겠습니다. 제발 남편의 건강만 회복할 수 있게 해주시면 저 남은 생애 동안 감사히 여기고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로또 대박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남편의 아픈 허리만 낫게 해주시고, 남편이 두 다리로 서서 걸어다닐 수만 있게 해주세요."

그 즈음, 끝까지 수술 만큼은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남편을 설득하지 못해 밤이면 밤마다 울면서 올린 기도입니다. 장난으로라도 복권 따위는 사지 않을 테니, 농담으로라도 부자로 살게 되길 기대하지 않을 테니, 남편이 두 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되길 염원했습니다.

집주인마저 나가라니... 청천벽력

엎친 데 덮친 격...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빼라는 연락이 왔다.
 엎친 데 덮친 격...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빼라는 연락이 왔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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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시간이 더디게만 흘러가고 있던 어느 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1800만 보증금에 전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집이 팔렸으니 비워줘야 하겠다고요. 주인은 '이사 경비는 부담해줄 것테니 빠른 시일 안에 집을 비줘달라'고 통보했습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전세 계약 기간도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사 경비를 부담해준다는 걸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입을 벌리면 한숨이 나왔고, 눈을 껌뻑이면 눈물만 나왔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겨우 1년 남짓 벌어먹고 살려고 부산에서 멀고도 먼 충북 청주까지 달려왔는데... 아픈 남편을 데리고,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아는 동네 한 곳도 없는 이곳에서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하나.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갔지만, 대책을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유 배달을 하고, 식당 음식 배달을 하려고 해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 쉽사리 취직조차 못하고 있는 내게 엄청난 시련이 닥쳐온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지 힘과 지혜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이곳 청주에서 굶어 죽으나, 부산 가서 굶어죽으나 매한가지다. 애들 데리고 다시 돌아가야겠다."

길 눈이라도 밝으면 신문 배달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남편을 설득해 부산으로 되돌아왔습니다. 2001년 8월, 지독하게도 덥던 날이었습니다.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 그것 하나만 품고 떠났던 곳에 부유는 고사하고 떠날 때보다 더 참혹해져서 돌아온 것이었지요. 그때까지도 남편의 척추관 협착증은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산에 되돌아와 이삿짐을 풀자마자 나는 취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시어머니께 맡기기로 했고, 남편은 방문과 방문 사이에 철봉같은 봉을 설치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래 매달리기 등을 하며 운동요법으로 병을 치료하겠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절망의 순간 떠오른 기도

수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완쾌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남편과 함께 들은 나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주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남편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수술만은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지요.

몇백만 원은 족히 들어가는 수술비도 문제였지만, 간혹 수술 후 재활에 실패하면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남편은 운동요법을 통해 스스로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2001년 9월 나는 기적적으로 취직에 성공했습니다. 아이들과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대비책을 마련한 것이지요.

2012년 1월, 내 나이 마흔. 서른 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10대 때도 겪지 않았던 사춘기 몸살을 앓았습니다.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했고,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매일같이 집, 회사, 집, 회사로 반복되는 일상에 멀미가 났습니다.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났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나 자신이 땅속으로 꺼져들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부자가 되게 해달라 하지도,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 하지도 않겠습니다. 제발 남편의 건강만 회복할 수 있게 해주시면 저 남은 생애 동안 감사히 여기고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로또 대박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남편의 아픈 허리만 낫게 해주시고, 남편이 두 다리로 서서 걸어다닐 수만 있게 해주세요."

불현듯 이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남편이 두 다리로 걸어다닐 수만 있게 된다면, 내 생애 전부를 바쳐 착하게 살겠다고 간절하게 애원했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삶의 기준

2015년 4월 5일. 남편과 둘이서 화명수목원에 다녀왔습니다. 수목원 넒은 길을 남편과 천천히 걸었습니다. 화려한 꽃들과 과묵한 나무들 속에서 남편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차 한 잔은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살아가면 행복할 것이라 속삭였습니다.

남편이 두 다리로 걷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시간이 내게 있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눈물로 애원했던 간절한 소망을 나는 이뤘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수목원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걸어서 등산을 할 것이고, 휴일이면 남편과 함께 걸어서 시장에 갈 겁니다.

남편은 철봉 오래매달리기 등 운동요법과 일상생활 속에서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척추관 협착증 진단을 받은 뒤 1년 6개월 만에 자신의 의지로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호전됐습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위기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마흔앓이 열병으로 아무 곳에나 쉽게 주저앉아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남편에 대한 아이들에 대한, 주변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내가 아직 '어른'으로 덜 자라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힘들었고, 두려웠고, 막막했던 위기의 시간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 시간들은 살면서 웬만한 어려움 앞에서 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어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를 알게해주는 기준이 된 것 아닐까요.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공모 '위기의 순간들'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위기의 시간들, #오마이뉴스기사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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