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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무섬쟁이

오호호호, 너희들 모두 겁쟁이구나
<이원수 - 도깨비와 권총왕>(웅진주니어,1999) 90쪽

겁쟁이(怯-) : 겁이 많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겁(怯) : 무서워하는 마음

동시를 쓰던 권태응님이 1949년에 선보인 작품에 <아기는 무섬쟁이>가 있습니다. 무서움을 잘 타는 사람을 가리켜 '무섬쟁이'나 '무서움쟁이'라 합니다. 어떤 일에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두고 '두려움쟁이'라 하는데, '두렴쟁이'처럼 줄여서 쓰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으레 '겁쟁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이 낱말에서 '怯'(겁)이라는 한자는 '무서워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는 그냥 '무섬쟁이'나 '무서움쟁이'일 뿐입니다. "아, 겁이 나" 같은 말은 "아, 무서워"일 뿐입니다. "너는 겁이 많구나" 같은 말은 "너는 많이 무섭구나"일 뿐이에요.

덜덜쟁이 . 달달쟁이

춥거나 무섭다고 하는 모습을 가리키려고 '덜덜대다·덜덜거리다' 같은 말을 씁니다. '덜덜-'을 쓰면 큰말이고 '달달-'을 쓰면 작은말입니다. 그래서, 무서움을 잘 타는 사람을 두고 '덜덜쟁이·달달쟁이'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습니다.

ㄴ. 하나, 하나로, 한나라

죄없는 나를 왜 찌르는가 / 나를 꼭 찔러야 / 통일이 되는 줄 아느냐고 외치고
<서홍관-어여쁜 꽃씨 하나> (창작과비평사, 1989) 117쪽

한자말 '통일(統一)'을 이 나라에서 쓴 지 얼마나 됐을까 헤아려 봅니다. 한자로 지은 낱말이니 여느 시골사람은 이런 말을 쓸 일이 없었을 테지요. 나라나 겨레가 여럿으로 쪼개진 자리에서 이러한 낱말을 쓸 테니, 한국에서 이 낱말을 널리 쓴 때라면 아무래도 해방 언저리부터가 아닐까요.

한국말사전에서 '통일'을 찾아보면 "1. 나누어진 것들을 합쳐서 하나의 조직·체계 아래로 모이게 함 2. 여러 요소를 서로 같거나 일치되게 맞춤 3. 여러 가지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음"으로 풀이합니다. 찬찬히 간추리자면 "하나로 모이게 함"이나 "하나가 되게 맞춤"이나 "한곳으로 모음"을 '통일'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나타내는 셈입니다.

 하나되기
 하나로
 한나라

1980년대에 '통일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은 곧잘 '하나되기'를 말했습니다. 한자말 '통일'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한국말로 쉽게 적으려던 낱말인 '하나되기'입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조금 숨통을 트었다고 할 만합니다. 군사독재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조금 걷혔기 때문입니다. 이즈음 온갖 영어가 밀물처럼 밀려들기도 했지만, 한국말을 새롭게 엮어서 즐겁게 쓰려고 하는 물결도 살몃살몃 치기도 했습니다. 이러면서 '하나로'라는 낱말이 곳곳에서 불거졌어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여러 곳에서 '하나로'를 말했고, 회사이름이나 가게이름이나 물건이름으로 이 이름이 널리 쓰였습니다.

1970년대에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펴낸 한창기님은 '韓國'(한국)이라는 이름은 뿌리가 없다면서, 이 나라와 이 겨레에 참답고 슬기로운 뿌리를 밝히는 이름을 새롭게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면서 빚은 새 이름이 '한나라'입니다. 우리 겨레를 일컬어 '한겨레'라고 하듯이, 우리 나라를 일컬어 '한나라'라고 할 때에 올바르다고 했어요. 이 이름은 2000년대로 넘어선 뒤 어느 정당에서 제 이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통일이 되는 줄 아느냐
→ 하나가 되는 줄 아느냐
→ 하나로 되는 줄 아느냐
→ 한나라가 되는 줄 아느냐

한자말 '통일'을 쓰는 일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낱말을 안 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한테 가장 알맞거나 사랑스러운 낱말을 제대로 지어서 쓰는지 안 쓰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몸 . 한마음 . 한넋 . 한생각
 한나라 . 한누리 . 한별
 한삶 . 한노래 . 한사랑

'하나되기(하나가 되다)'를 생각할 수 있다면, 차츰 가지를 뻗어 "한몸이 되다"와 "한마음이 되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낱말로 추려서 '한몸되기'와 '한마음되기'도 생각할 수 있어요. '한넋'과 '한생각'이라는 낱말에다가 '한넋되기'와 '한생각되기'를 함께 생각해 볼 만합니다.

정치 얼거리로 따지면 '한나라'이고, 지구 얼거리로 따지면 '한별'이며, 온누리(우주)로 따지면 '한누리'입니다.

하나로 어우러진 삶이기에 '한삶'이 되면서, 한삶에서는 '한노래'를 부르고, '한사랑'을 나눕니다. 하나로 어우러진 삶으로 나아가면서 쓰는 말과 글이라면 '한말'과 '한글'이에요.

때와 곳을 가만히 살피면 "통일이 되는 줄"은 "하나가 되는 줄"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과 '하나'가 서로 똑같이 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 저 말 붙이지 않아도 '하나'라는 낱말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나눌 만해요.

하나 . 하나님 . 한 . 한님 . 한동무
온하나 . 온님 . 온벗 . 온사람

해를 해님이라 하고 별을 별님이라 하듯이, '하나'를 '하나님'으로 적을 수 있고, '한 + 님'이라는 얼개로 '한님'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었으면, 서로서로 '한님'이라 부를 수 있고, '한동무'로 삼을 수 있습니다. 크게 하나가 되거나 모두 하나가 되었으면 '온하나'인 셈이며, 온하나가 된 사람은 서로 '온님'이나 '온벗'이나 '온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ㄷ. 나들이옷

아마 나들이옷을 동네에 가지고 나가 파신 게지요
<현덕 - 광명을 찾아서>(창비, 2013) 14쪽

나들이옷 : 나들이할 때 입는 옷
나들이 : 집을 떠나 가까운 곳에 살짝 다녀오는 일
외출복(外出服) : 외출할 때 입는 옷
외출(外出) : 집이나 근무지 따위에서 벗어나 잠시 밖으로 나감

바깥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일을 가리켜 '나들이'라고 합니다. 한국말은 '나들이'입니다. 이를 한자로 옮기면 '외출'이 됩니다. 나들이를 하면서 입는 옷이라면 '나들이옷'입니다. 그리고, 외출할 때에 입는 옷은 '외출복'입니다. 하나는 한국말이요, 다른 하나는 한자말입니다. 두 낱말은 똑같은 옷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한국사람이 쓰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사람이 쓸 일이 없으나 널리 퍼진 말입니다.

봄나들이옷 . 여름나들이옷

봄에 나들이를 하면서 입는 옷이라면 '봄나들이옷'입니다. 겨울에 나들이를 한다면 '겨울나들이'입니다. 나들이를 하며 부르는 노래는 '나들이노래'이고, 나들이를 함께 누리는 동무는 '나들이동무'예요.

ㄹ. 맑끈끈띠·맑은 테이프 (투명 테이프)

속이 비치는 테이프를 쓰면, 말 그대로 '속이 비칩'니다. 누런 빛깔인 테이프를 쓰면, 속이 비치지 않고, 말 그대로 '누런 빛깔'을 봅니다. 푸른 빛깔인 테이프를 쓰면, 이때에도 속이 비치지 않고, 말 그대로 '푸른 빛깔'을 봅니다. 이밖에 '까만 빛깔'인 테이프가 있고, 알록달록 여러 빛깔로 된 테이프가 있습니다.

'테이프(tape)'는 영어입니다.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네 가지 뜻풀이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종이나 헝겊 따위로 만든 얇고 긴 띠 모양의 오라기. '띠'로 순화" 같은 뜻풀이처럼, 한국말로 '띠'로 적어야 하는 자리에 '테이프'를 잘못 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테이프 커팅'을 한다고 하는 자리에서는 '띠 끊기'나 '띠 자르기'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붙이려고 친친 감는 끈적끈적한 띠일 때하고, 소리나 영상을 담는 띠일 때에는 '테이프'를 따로 고쳐쓰기 어렵습니다. 이때에도 고쳐쓰려면 얼마든지 고쳐쓸 수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녹음 테이프'라 하지 말고 '소리띠'라 할 수 있어요. 다만, '소리띠' 같은 말을 쓰자면 처음부터 이렇게 썼어야 하는데, 이제껏 한국사람 스스로 이와 같이 쓰려고 생각을 기울인 적이 없습니다. '소리띠'로 써야 올바를 테지만, 이렇게 쓰자고 말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한 가지를 더 생각하면, "붙일 때에 쓰는 테이프"는 '끈끈띠'나 '끈끈이'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파리 끈끈이"를 떠올리면 되거든요. 파리가 달라붙도록 길게 드리운 띠를 '끈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붙일 적에 쓰는 것에는 '끈끈띠' 같은 이름을 붙여도 됩니다. 다만, 이때에도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와 같이 썼다면 널리 고쳐쓸 만할 텐데, '테이프' 같은 영어를 한국말로 어떻게 쓰면 즐겁거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띠 . 끈 . 오라기
 소리띠 . 그림띠
 끈끈띠 . 붙임띠

띠나 끈이나 오라기를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마땅히 이 낱말로 써야 올바릅니다. 녹음 테이프나 붙이는 테이프를 가리키는 자리라면 오늘날 흐름에서는 '테이프'로 쓸 때가 한결 나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테이프' 같은 낱말을 그대로 쓰면서도 아이들한테는 '소리띠'나 '끈끈띠' 같은 말마디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오늘은 '테이프'로 그대로 쓰더라도 앞으로 백 해나 오백 해 뒤는 말이 어떻게 거듭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아이들한테는 한국말로 생각을 살찌우거나 키울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한국말을 스스로 생각하고 가꿀 수 있도록 말길을 열 수 있습니다.

적어도, "'테이프'는 붙이는 띠를 가리키지. 한쪽이 끈끈해서 붙일 수 있는 띠라고 하는 것에 '테이프'라는 이름을 붙였어"처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한마디를 덧붙여 "어른들은 끈끈하게 붙이는 띠에 '테이프'라는 이름을 지어서 쓰는데, 너는 어떤 이름으로 지어 볼 수 있을까? 네가 한 번 새롭게 이름을 지어 보겠니?" 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맑은 끈끈띠 . 맑은 테이프 ↔ 투명 테이프 . 유리 테이프
누런 끈끈띠 . 누런 테이프 ↔ 황 테이프
푸른 끈끈띠 . 푸른 테이프 ↔ 청 테이프

붙이는 띠를 가리키면서 '투명(透明)'과 '황(黃)'과 '청(靑)' 같은 한자말을 자주 씁니다. 어른들은 이 낱말이 익숙하니 어른으로서는 이녁 말을 고치기 어려울 테지만, 아이들은 이런 이름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기 일쑤입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투명·황·청'을 쓰더라도 아이들 앞에서는 '맑은·누런·푸른'을 쓸 수 있습니다. 글잣수를 줄인다면 '맑테이프·눌테이프·풀테이프'처럼 쓸 수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태그:#우리말, #우리말 살려쓰기, #한국말, #삶말,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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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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