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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패러다임과 시스템, 그 바탕에는 역사적 자산과 사회적 자본이 깔려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 자유와 평화, 협동과 연대, 자주와 자립, 이타심과 공동체 의식, 신뢰와 질서, 생태주의와 생명 사상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한 유럽'은 이런 바탕을 가진 유럽 7개국(영국,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일상 체험 여행기입니다. - 기자 말

프라하의 계절은 늘 봄이다. 내게는 그렇다. 기상학적으로야 2월의 프라하는 마땅히 겨울이다. 거리에는 동유럽의 찬 바람이 행인들을 매섭게 다그친다. 블타바(Vltava) 강의 서정과, 카를(Karl) 교의 서사를 유유자적 관조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다. 두터운 외투와 목도리를 하지 않고는 선뜻 거리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겨울의 프라하에서 굳이 '프라하의 봄'을 만끽하려 애를 썼다. 수시로 카페에 들려 '끓인 와인(mulled wine)으로 한기를 쫓아가며 프라하의 '따뜻한 기운'을 오장육부로 느끼려고 기를 썼다. 1980년대 젊은 날, 나의 정신과 영혼을 사로 잡은 한 편의 영화를 프라하의 시공간 이곳저곳에서 마음껏 추억하고 싶었다. 

<프라하의 봄>. 줄리넷 비노쉬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 레나 올린 등 매력적인 명배우들이 공연한 추억의 명화. 영화 뿐 아니라 체코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원작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오직 그 영화 한 편과, 그 소설 한 편 때문에 프라하는 내게 '영원한 봄'의 도시로 각인되었다.

참을 수 없이 짧고 가벼웠던 '프라하의 봄'

 블타바(Vltava) 강에 가로놓인 카를(Karl) 교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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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이야기다. 젋고 잘 생기고 능력있는 의사 토마스는 자유분방하다. 인생을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살아간다. 반면 아내 테레사의 삶의 태도는 진지하다. 줄리넷 비노쉬 특유의 깊이 있는 표정을 떠올리면 된다. 진지한 아내는 자유로운 남편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다. 게다가 역시 자유로운 화가인 사비나와 오랜 불륜 관계이기까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가 된 알렉산드르 드부체크 서기장은 두려움 없고, 자유로운 사회주의를 프라하 시민들에게 약속했다. 개혁파로 불리며 '프라하의 봄'을 열었다. 하지만 '봄'은 소련의 침략으로 7개월만에 단명하고 만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스위스로 도망가지만 애증과 갈등에 서로 시달리다 프라하로 돌아온다.

그때 프라하에서 테레사와 토마스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자유가 아니었다. 가혹한 소련의 숙청작업이었다. 자유도, 직업도, 재산도 다 빼앗기고 농촌으로 쫓겨난다. 그들 앞에 남아있는 건 오직 생물학적인 죽음 뿐이다.

그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당시 조국의 현실과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의 현실을 자꾸 혼동했다. 영화와 소설과 현실이 뒤죽박죽이 되어 기분이 엉망이 되고말았다. 너무나 가벼운 도시생활의 거부감, 국가권력에 대한 무기력함, 자유를 향한 갈망, 농촌 또는 태어난 곳에 대한 향수 같은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과 감상에 사로잡혔다. 이후 나라는 인간과, 나의 일상을 특징짓고 있는 주요한 성질이 그때 집중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천년 동안 건축한 프라하성에 사는 대통령

 프라하성 달리보르가탑 지하감옥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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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나는 '프라하의 봄'의 강력한 인력과 자기장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숙소가 있는 안델지구에서 22번 트램을 타고 프라하성 밑 정거장에서 내려 네루도바 언덕 길을 걸어 올라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프라하 성문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프라하의 봄'의 영향력을 겨우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일단 프라하성 앞에 서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잡념이 들지 않는다. 차라리 사원이나 수도원을 접하는 경건하고 성스러운 기분이 된다. 오로지 프라하성의 존재감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성의 품격과 역사성의 무게에만 저절로 주목하게 만든다. 가볍고 들뜬 관광객일수록 진지하고 차분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성의 규모와 위용 자체부터 압도적이다. 멀리서 쳐다보면서 벌써 기가 죽고 들어간다. 프라하 블타바 강 서쪽 언덕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넓이가 7만㎡, 길이가 570m, 폭이 130m에 이른다.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고성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체코의 상징이라 불린다. 체코공화국 국민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이라는 말이겠다. 

'천년왕궁'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9세기에 성 비투스 대성당(Basilica of St. Vitus)을 지은 이래 20세기인 1927년에 비로소 완공이 되었기 떄문이다. 시공에서 준공까지 1000년 넘게 걸린 셈이다.

특히 14세기 카를 4세의 전성기를 거쳐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등 다양한 유럽의 건축양식을 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성 비투스 성당을 비롯해 구 왕궁, 이르지 수도원, 황금소로, 왕실정원 등 단순히 성채로서의 건축물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고 있다. 건축학을 모르면 점점 답답해진다.

그동안 수많은 체코의 왕들은 물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이 천년왕궁에 머물며 천년제국과 천하를 다스렸다. 오늘날 일부 성채는 체코공화국의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그 마당 안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든다. 승효상 건축가가 '봉건적 건축'이라 비판하는 한국 대통령의 집무실과는 차원과 격이 다르다. 보초를 서고 있는 근위병들은 무섭지 않다. 동화나라 장난감 병정처럼 만만해보인다.

프라하성 창문 밖으로 던져질 뻔한 왕

 프라하성 '창문 투척 사건'의 그 무시무시한 창문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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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프라하성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볼 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한 창문이다. 1618년 30년 전쟁이 촉발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의  그 창문이다. 종교 탄압에 항의하던 개신교 귀족들이 국왕의 섭정을 20m 아래 성의 창밖으로 집어던진 사건이다.

사건의 빌미는 보헤미아 왕위에 취임한 페르디난트가 제공했다. 왕이 되자 보헤미아의 종교를 가톨릭으로 선언하고 개신교를 탄압했다. 분노한 보헤미아 귀족과 백성들이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로 몰려갔다. 마침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흥분한 개신교 귀족들은 국왕을 대신해 보헤미아를 다스리던 섭정과 비서관을 3층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창문 밖 건초 더미 위에 떨어져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달아났다. 역모 보고를 받은 페르디난트는 전쟁을 선언한다. '창문 투척 사건'은 국제 전쟁으로 번지면서 30년 동안 독일은 초토화된다.

어쩌면 괴담 같기도 하고 전설 같기도 한 이야기다. 20m 성문 밖으로 떨어졌는데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니.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어쨌든 그 무시무시한 창문 앞에 서서 프라하 시가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무서운 생각을 했다. 지금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 혼을 내주고 싶은 사람이 몇 있다는.

무서운 생각에서 어서 빠져나와 어느 후미진  골목에 접어들었다. 작은 골목 안으로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몰려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질렀던가.

"아, 그래, 카프카."

16세기에 세워진 11채의 작은 집들이 모여있는 '황금소로'다. 22호 파란벽 집이 카프카의 작업실이다. 마치 동화나 만화에 나오는 스머프의 버섯집이 연상된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가 행복하게 살았을 법도 하다. 중세에 황금을 만드는 연금술사들이 모여살았다고 그렇게 불린다는데 전설이나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인 듯하다.  

금박을 만드는 가난한 금세공 장인들과 성채를 지키는 수비대원들이 살았다는 설은 믿을만하다. 성벽에 붙어있는 작은 집들의 위층은 전부 요새화되어 있다. 복도에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는 중세의 무기와 갑옷들은 그 사실을 증거한다.

황금소로와 카를 교 지나 만난 '혁명과 용서의 광장'

 혁명의 광장에서 용서를 생각하게 만드는 '천문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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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성 언덕을 내려와 프라하 동쪽 구 시가지로 넘어가려면 블타바 강을 건너야 한다. 14세기에 축조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 카를 교로 건너면 된다. 500m의 길이에 30여 개의 성인 조각이 다리의 무게와 가치를 더해준다. 살아있는 듯 조각상들의 근육과 옷깃은 역동적이다. 다리는 그대로 무명 화가들과 가난한 음악가들의 예술 경연장이자 생계의 터전이기도하다. 프라하에서는 걸인마저 더럽지 않다. 자유로운 보헤미안 같다. 편견일지 모른다. 

카를교를 건너와 중세의 골목을 몇 굽이 누비다보면 골목마다 출몰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흐느적거리게 된다. 그 동화에 동화된다. 자유롭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프라하의 심장부라는 구시청사 광장에 이른다. 14세기 이후 건축된 르네상스 양식의 고건축물들이 마치 어제 지은 것처럼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구 시청사는 고딕양식이라 서로 대비된다.

'프라하의 봄'에도 프라하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몰려들어 혁명을 힘차게 노래했을 것이다. 요즘은 광장의 천문 시계탑 주변에 시민혁명군 대신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진을 친다. 매시 정각만 되면 작은 창이 열리면서 종소리가 울리고 12천사의 인형이 순간적으로 출몰하는 인형극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걸 굳이 보겠다고 모여드는 것이다. 뮌헨시청의 그것보다는 규모는 작지만 모양은 더 예술적이다. 그리고 시계탑에 서려있는 비감한 스토리텔링 때문에 극적 효과는 배가된다.

이 시계는 프라하 대학 수학 교수인 하스주 본슈네가 1856년에 만들었다. 그러자 유럽 각국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시계를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폭주한다. 그러나 교수는 의문의 사고를 당해 장님이 되고 만다. 프라하 시청에서 시계탑을 유일하게 독점하려고 교수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설이다. 충격을 받은 교수는 결국 화병을 앓다 죽고 만다. 이렇게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내가 이들을 용서하도록 시간을 주소서."

하스주 교수가 죽은 날, 시계는 돌연 멈춘다. 시청에서 아무리 시계를 수리하려 했으나 아무도 고치지 못한다. 고장난 원인조차 알 수 없다. 교수가 죽고 400일 정도가 지나서 시계는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하스주 교수가 그들을 용서하는 데 400일이 걸린 셈이다.

거듭 고백하건대, 나도 지금 프라하성 3층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고 싶은 공공의 적이 몇 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창문 밖으로 결코 집어던지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들이 먼저 세상에 사죄하고 부디 용서를 빌어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려면 400일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프라하성을 지은 천년의 시간만큼, 억겁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솔직히 용서를 할 자신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기도한다. 그들이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오기를. 그러면 나도 그들을 제발 용서해줄 수 있기를. 이제 서로 그만 미워하고 해치기를.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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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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