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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민감해진 것은 '오늘의 날씨'이다.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이기 때문에 봄이면 봄다운 날씨, 여름이면 여름다운 날씨를 예상하거나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그야말로 '아일랜드 날씨'를 즐겨야만 한다.

따뜻한 봄에 두꺼운 외투를 껴 입고 다니거나 추운 겨울에 얇은 반팔 셔츠를 입고 다니기도 한다. '오늘의 날씨는 맑다가 비가 오다가 바람이 불다가 흐려지다 다시 맑아집니다'라는 기상캐스터의 말도 안 되는 일기예보가 수긍이 가는 곳이 바로 아일랜드이다.

이런 날씨 탓에 우리 가족은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날이면(특히 주말이면) 어디든 여행을 떠나게 되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이번 여행도 4월의 어느 토요일,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햇살 좋은 날에 떠난 아일랜드 여행 이야기이다.

일기예보에 '커다란 노른자'가... 오늘은 여행가는 날

아란제도의 이니시모어섬은 유일하게 게일릭어가 보존된 지역이기도 하다. 상점의 간판들에서 게일릭어를 살펴볼 수 있었다.
 아란제도의 이니시모어섬은 유일하게 게일릭어가 보존된 지역이기도 하다. 상점의 간판들에서 게일릭어를 살펴볼 수 있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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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일기예보를 확인했을지라도 아침이 되어 봐야 아는 아일랜드 날씨.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쳐 놓은 창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는 순간 나는 이내 기쁨의 쾌재를 불렀다.

"오예, 오늘 날씨 좋다!"

이른 아침에 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는 날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날씨가 좋은 동네에 살 때는 따뜻한 햇살은 당연한 하루의 시작과도 같았지만 아일랜드에 이사를 온 이후 아침을 반겨주는 햇살은 하루의 가장 큰 선물이 되곤 했다. 특별히 좋은 일이 없어도 날씨 하나만으로도 즐거워질 수 있는 동네, 아일랜드에 이사를 오면서 달라진 나의 삶의 변화 중 하나이다.

오늘의 여행지는 아란 제도(Aran Island) 중 이니시모어(Inishmore)란 곳이다. 아란제도는 아일랜드 서쪽 끝에 떨어진 작은 섬으로 이니시모어(Inishmore), 이니시어(Inisheer), 이니시만(Inishmaan) 세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대서양의 장엄한 풍경을 보기 위해 아일랜드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이자 아일랜드에서 게일릭어가 보존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섬으로 들어가는 첫배를 타기 위해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이니시모어 섬으로 가는 배는 하루 3차례 정도 운영되는데 당일치기로 섬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첫배를 타야 한다. 집에서 선착장까지 가는 주소를 잘못 설정해놓은 탓에 막판에 아일랜드의 좁은 도로를 전력 질주하여 가까스로 선착장에 도착했다.

아일랜드에서 꽤나 유명한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선착장 앞의 개표소는 허름하다 못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 특유의 소박한 이미지를 추구하나보다라고 생각을 했다가 우연히 보게 된 주인집 벤츠 자가용을 보는 순간, 허름한 개표소가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왕복 25유로라는 다소 비싼 요금을 지불하고 우리 가족은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는 이미 많은 여행객을 태운 배들이 순차적으로 떠나고 있었고 우리는 거의 마지막 배를 타고 이니시모어섬으로 향했다.

이니시모어섬에서 만난 자유

이니시모어섬의 낮은 돌담길 및 풍경
 이니시모어섬의 낮은 돌담길 및 풍경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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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여를 달려 이니시모어섬에 도착했다. 배가 정박하는 선착장 앞에는 자전거를 빌리는 여행자들로 작은 섬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니지모어섬은 걷기에도 힘들지 않은 곳이지만 보통 차량투어나 자전거투어, 마차투어로 섬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 자전거 투어가 단연 으뜸인 동네인데 인적이 드물고 차가 많지 않은 좁은 돌담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가져다 주었다.

햇살이 가득한 이니시모어섬은 참으로 평화롭고 포근했다. 제주도처럼 낮은 돌감길을 달리며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얼굴에 미소가 절로 머금어지고 기분 좋은 함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거칠기는 하지만 푸른 초원이 사방에 보였고 저 멀리는 시원한 대서양의 바다가 잠잠히 섬을 감싸고 있었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만발했고 눈에 들어오는 농가의 모습도 하나같이 예뻐 잠시 멈췄다가 출발하는 일이 빈번할만큼 카메라에 담고 싶은 풍경이 많은 곳이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낑낑거리며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내리막길에선 시원한 바람을 한없이 맞으며 나의 모든 수고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이니시모어 안의 물개가 출몰하는 지점.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개들이 바닷가 근처에 몰려있었다.
 이니시모어 안의 물개가 출몰하는 지점.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개들이 바닷가 근처에 몰려있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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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인류의 터전이었던 '던 앵거스' 가는 길

이니시모어섬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이 섬의 하이라이트 장소인 던 앵거스(Dún Aonghasa)로 가는 길이 나타났다. 이곳은 골웨이 위쪽에 위치한 모허 절벽과 함께 대서양의 장엄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던 앵거스의 절벽은 특별한 안전 장치가 없는 곳이라 아슬아슬한 스릴감을 느끼며 확 트인 바다를 제대로 직면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허 절벽이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곳이라면, 던 앵거스의 절벽은 남성스럽고 거친 자태를 발산하는 곳이다.

던 앵거스 지역은 단순히 장엄한 풍경만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놀라운 사실은 기원전 15세기경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아일랜드의 고고학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디스커버리 프로그램(The Discovery Programme)에 의하면 1992년에서 1995년 사이에 이곳을 굴착하는 과정에서 언덕 꼭대기에서 인류의 활동이 약 2500년간(BC 15세기~AD10세기) 지속되어 왔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던 앵거스에서 바라본 대서양의 모습
 던 앵거스에서 바라본 대서양의 모습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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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앵거스로 올라가기 전에 들린 비지터 센터(Visitor Centre). 멀리서 바라본 던 앵거스의 모습에는 과거에 지어진 요새의 모습을 뚜렷히 살펴볼 수 있었다.
 던 앵거스로 올라가기 전에 들린 비지터 센터(Visitor Centre). 멀리서 바라본 던 앵거스의 모습에는 과거에 지어진 요새의 모습을 뚜렷히 살펴볼 수 있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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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꼭대기에 둘러 싸여진 담은 기원전 11세기경에 지어졌고 요새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기원전 8세기경이라고 한다. 당시 던 앵거스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오직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이 요새 안에 살 수 있었다.

기원전 7세기경부터 이곳의 중요성이 줄어들어 약 천 년간 소유자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고 중세 시대(AD 5세기~10세기)에 대대적인 구축사업이 시행되었지만 결국은 버려진 땅이 되어버렸다. 던 앵거스는 19세기 말에 아일랜드 국가 유적으로 지정되어 대규모 보수작업을 거친 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 이곳을 발견하였을 당시에 일곱 채의 건물 초석이 있었는데 건물 바닥은 포장되어 있었고 그중 한 채는 돌로 만들어진 난로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직경 5미터에 달하는 원형 건물 외벽의 흔적은 서쪽 담 근처에 여전히 남아 과거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게 해준다. 건물 벽이 부분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점으로 이 건물들이 방어전을 위한 마지막 구축 작업보다 일찍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육류와 곡식과 더불어 물고기와 조개도 청동기 시대 말의 인간들에게는 중요한 식량이었고 굴착 작업 중 약 8톤의 삿갓조개 껍데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일상 도구들(망치, 도끼, 숫돌, 맷돌)은 돌로 만들어졌고 뼈로 만든 바늘로 양털이나 깃털을 엮어 옷을 만들었다. 발견된 바늘의 종류도 당시 사람들이 다양한 천연 재료들로 옷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아일랜드다운, 그러나 '가장 위험한 절벽'

던 앵거스 절벽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던 앵거스 절벽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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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모허 절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안전 장치가 전혀 없는 절벽이라는 것이다. 모허 절벽은 관광객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설치해 놓았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스릴 넘치는 풍경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은 모허 절벽보다 이곳을 더 찾는다. 너무 위험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곳이라고나 할까?

이곳에 오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엎드려서 절벽 아래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상당히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지만 너도 나도 엎드린 채 절벽 아래의 파도를 감상하는 모습이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바짝 엎드린 채 조심조심 절벽 끝으로 기어갔다. 맑은 날씨였지만 절벽 아래 펼쳐지는 세상은 무시무시한 파도가 쉼 없이 절벽을 때리고 있어 순간적인 공포감이 밀려왔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절벽 아래의 아름다운 경관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평온하고 고요한 절벽 위의 잔디밭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거칠고 야성적인 파도의 숨소리는 내 심장을 더 쫄깃하게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평온함과 겸손함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한참 동안 절벽 아래에 내리치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느낌이었다면 어느 순간 장엄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낸 몸과 마음에 담고 있는 기분이었다.

고요한 평지 아래에 펼쳐진 역동적인 파도의 움직임이 있는 곳,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가 이내 먹구름이 짙게 껴버린 하늘로 변하는 곳, 켈틱 타이거라는 별명이 생길 만큼 단기간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뤄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지만 막상 오면 지나치게 소박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 이렇게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가 아일랜드가 아닐까? 그래서 아일랜드는 매력적인 나라이다. 어울리지 않는 묘한 대조가 함께 공존하는 곳. 아일랜드를 여행하면 할수록 더 이 나라의 매력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 * 골웨이 근처 로자빌에서 이니시모어 가는 방법

로자빌(Rossaveal, Ros-a-Mhil) - 이니시모어(Inishmore)
4 - 10월 : 10.30 am, 1.00 pm, 6.30 pm
(이니시모어 도착 시간 12.00 pm, 2.15 pm, 7.45 pm)
11 - 3월 : 10.30 am, 6.30 pm

이니시모어(Inishmore) - 로자빌(Rossaveal, Ros-a-Mhil)
4 - 5월,10월 : 8.15 am, 12.00 pm, 5.00 pm
6 - 9월 : 8.15 am, 12:00 pm, 4 pm, 5.00 pm, 6.30 pm
11 - 3월 " 8.15 am, 5.00 pm

페리 시간표 및 예약, 가격 안내
http://www.aranislandferries.com/



* 골웨이 근처 둘린에서 이니시모어 가는 방법

둘린(Doolin) - 아란제도(Aran Islands)
10.00 am, 11.00 am, 1.00 pm, 5.00 pm

페리 시간표 및 예약, 가격 안내
http://www.doolin2aranferries.com/



태그:#아일랜드, #아란제도, #이니시모어, #던앵거스, #해안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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