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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나 한가위가 되면 온 나라가 들끓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시골로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거꾸로 시골에서 도시로 가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도시를 빠져나가서 시골로 가는 사람들 물결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설이나 한가위에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는 사람들은 '오래도록 떨어져 지낸 어버이'를 만나려는 마음입니다. 자가용을 몰건 기차나 버스를 타건 저마다 찻길에서 온 하루를 쏟아부은 끝에 비로소 시골집에 닿습니다.

여느 때에는 시골이 고요합니다. 여느 때에는 시골마을에 오가는 차가 아주 드뭅니다. 여느 때에는 시골마을에서 찻소리를 들을 일이 없습니다. 군내버스와 택배 짐차가 아니라면, 여느 때에 시골마을 둘레를 지나가는 자동차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서 도시에서 살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잊거나 잃은 채 도시에서 복닥거리면서 살까요?

고향은 꼭 태어난 곳만 가리킬 수 없습니다. 태어나서 어린 나날을 보냈으나 스무 살부터 쉰 살이나 예순 살까지 도시에서 지냈다면, 이제 도시가 고향이라고 할 만합니다. 더욱이, 아주 젊은 날에 시골을 떠나서 도시에 뿌리를 내린 뒤, 도시에서 짝꿍을 만나 아이를 낳았으면, 아이들한테는 도시가 고향입니다. 시골집은 아이들 어버이한테나 고향입니다.

.. 명절날 나는 어머니 아버지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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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한집안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가 퍽 어렵습니다. 설이나 한가위에도 얼굴을 못 보기 일쑤입니다. 새마을운동이 일기 앞서는 도시로 떠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 으레 한집안이 가까이에 옹기종기 모여서 지냈을 테지요.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뒤부터 시골을 빠져나간 사람들이 아주 많고, 경제개발이 춤추는 가락에 휩쓸려 공장 노동자는 설도 한가위도 잊은 채 쳇바퀴로 굴러야 했습니다. 이무렵부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요즈음은 비정규직과 시간제 노동자가 고향을 못 찾기 일쑤요, 한국으로 찾아온 이주노동자가 고향나라로 못 가기 일쑤입니다.

따로 나뉘어 사는 형제나 자매 가운데 누군가 아기를 낳으면 한집안 사람들이 모여서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집안에서 누군가 숨을 거두어야 비로소 한집안 사람들이 모여서 낯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여느 때에는 한 달에 한 번쯤 얼굴조차 못 보며 지내기 일쑤는 아닐까요. 어머니 품에서 함께 사랑을 물려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고된 하루를 보내지는 않는가요.

..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할 때마다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복숭아나무가 많은 마을에 사는, 신리 고모 ..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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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 그림책' 아홉째 권으로 나온 <여우난골족>(창비, 2007)을 읽습니다. 백석 님이 쓴 글에 맞추어, 홍성찬 님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같은 문명사회로 접어들기 앞서, 한겨레가 어디에서나 맞이한 설날 언저리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설을 앞두고 누구나 웃음지으면서 어우러지는 삶을 그리고, 설을 맞이해서 서로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하루를 그립니다. 설을 쇠는 동안 어른과 아이가 무엇을 하며 노는가를 그리고, 큰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조그마한 시골집에서 따사로이 피어나는 숨결을 그립니다.

제금을 나서 살던 살붙이가 하나둘 모입니다. 저마다 제금을 나면서 낳아 돌본 아이를 이끌고 모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어우러집니다. 조그마한 시골집 한 채에 그야말로 다닥다닥 붙어서 일을 하고 놀이를 합니다.

.. 그득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안방에들 모이면, 방 안에서는 새 옷 내음새가 나고 ..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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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이해서 설빔을 아이들은 몹시 설레면서 기쁠 테지요. 설을 앞두고 아이들한테 설빔을 마련해 주는 어버이도 바느질을 한 땀 두 땀 할 적마다 설레면서 기뻤을 테고요. 모처럼 한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였으니, 늙은 어버이도 한결같이 웃음꽃이 될 테고요.

그렇지만, 모처럼 만난 한집안 사람들이 곧 모두 헤어져야 합니다. 그야말로 먼걸음을 했을 텐데, 멀리서 찾아온 사람은 더 일찍 고향집을 나서야 합니다. 가까이에서 찾아온 사람도 어느새 고향집을 나서야 합니다. 기쁜 웃음꽃도 어느새 저물면서, 시골마을 고향집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 그래서 창문에 처마 그림자가 비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 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에서,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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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꼭 한집안 사람들끼리만 어울려서 살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웃과 동무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웃이 있고, 사랑스러운 동무가 있습니다. 모두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누구와 살더라도 한결같은 웃음꽃일 수 있으면 됩니다. 어디에서 살더라도 한결같은 사랑노래일 수 있으면 됩니다. 나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줍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물려준 사랑을 고이 받아들여 기쁜 몸짓으로 북돋웁니다.

노래를 부르는 삶입니다. 늘 얼굴을 마주하든, 설이나 한가위에만 겨우 얼굴을 마주하든, 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삶입니다. 시골마을에서는 꿈을 키울 수 없다고 여겨서 도시로 갔으면, 도시에서 꿈을 키우면서 살면 됩니다. 도시에서 키운 꿈을 곱게 갈무리하고 마무리지었으면, 시골로 돌아와서 수수하면서 투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시골마을에서 꿈을 키워서 지을 수 있고, 이제는 굳이 도시로 가지 않더라도 시골에서 새로운 꿈과 이야기와 노래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림책 《여우난골족》을 생각합니다. 꽁꽁 얼어붙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이지만, 모두 웃음노래입니다. 웃지 않거나 노래하지 않는 사람은 안 보입니다. 반가우면서 살가운 한집안 사람들이니, 웃음이 끊이거나 노래가 끊일 일이 없습니다. 웃음과 노래가 늘 이어지니, 한겨울에도 추위가 아닌 웃음이랑 노래를 떠올립니다.

'한집안 사랑노래'가 자라고 자라서 '한마을 사랑노래'가 됩니다. 한마을 사랑노래는 자라고 자라서 '한나라 사랑노래'가 됩니다. 한마을 사랑노래는 다시 자라고 자라서 '한별 사랑노래'가 되고, 이윽고 '한누리 사랑노래'가 됩니다.

조그마한 집에서 샘솟은 노래가 마을과 나라를 지나서, 지구별에서 흐르다가 온누리로 넓게 퍼집니다. 오늘 하루도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기쁘게 웃음지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마음에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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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여우난골족> 백석 글, 홍성찬 그림, 창비 펴냄, 2007.2.9.
* 이 글은 제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여우난골족

백석 지음, 홍성찬 그림, 창비(2007)


태그:#여우난골족, #백석, #홍성찬, #그림책, #어린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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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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