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버지'라는 존재의 무게를 가까스로 떨쳐내려 하는 이가 있다. 아버지이기에 앞서 누군가의 자식이자 한 인간으로 나서 자라온 그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아버지'라는 사명이 결코 당연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그는 아버지라는 역할을 받아든 채 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대신 평생 그 주변을 맴도는 삶을 택한다.

피난통에 두 모녀(권지숙, 주인영 분)를 억지로 집에 남겨놓고는 “너희는 둘! 내는 쏠로! 진정 외로운 사람은 내다!”라고 외치는 경숙 아배(김영필)의 모습에서 ‘아버지’로서의 면모는 눈 씻고도 찾기 힘들다.
 피난통에 두 모녀(권지숙, 주인영 분)를 억지로 집에 남겨놓고는 “너희는 둘! 내는 쏠로! 진정 외로운 사람은 내다!”라고 외치는 경숙 아배(김영필)의 모습에서 ‘아버지’로서의 면모는 눈 씻고도 찾기 힘들다.
ⓒ 수현재컴퍼니

관련사진보기


피난통에 두 모녀를 억지로 집에 남겨놓고는 "너희는 둘! 내는 쏠로! 진정 외로운 사람은 내다!"라고 외치며 장단 맞출 장구만 챙긴 채 홀연히 떠나가는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 속 경숙 아배의 모습에서 '아버지'로서의 면모는 눈 씻고도 찾기 힘들다. 그 뿐인가. 수용소 동기인 꺽꺽이 아재를 대타로 두고 떠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부 출신 새엄마 자야를 팔에 매달고 나타날 때는 남아있던 일말의 연민마저 들어내 버린다.

아무리 꿈 찾아 떠나라는 제 아배의 말만 붙들며 살아왔다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한 채 바람처럼 떠도는 경숙 아배의 행적은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이 설사 어미의 정 없이 자란 결핍에서 연유했다 한들, 이젠 그 자신이 또 다른 누군가의 '아배'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었으나 부모가 되어가는 험난한 길 대신 낯설지만 때때로 속정이 깊은, 옆집 아저씨(?) 같은 주변인에 머물기를 자처한다.

정작 경숙 아배를 기다려온 기나긴 세월동안 가족이 된 이들은 그가 데려온 꺽꺽이 아재와 자야였다. 꺽꺽이 아재와 경숙 어매 사이에 피치 못할 자식이 생기고 경숙 아배의 기막힌 일편단심에 떠나갔던 자야가 다시금 경숙이 모녀에게로 돌아오면서, 이들은 황당무계한 가족으로서의 연을 돈독히 맺어간다.

딸의 졸업식날, 그래도 아버지라고 구두를 들고 나타난 경숙 아배의 뒷모습에서는 앞서와는 다른 서글픔과 쓸쓸함이 한데 묻어나왔다.
 딸의 졸업식날, 그래도 아버지라고 구두를 들고 나타난 경숙 아배의 뒷모습에서는 앞서와는 다른 서글픔과 쓸쓸함이 한데 묻어나왔다.
ⓒ 수현재컴퍼니

관련사진보기


극의 마지막, 딸의 졸업식장에 밤손님처럼 나타난 경숙 아배는 등 돌린 딸의 손에 구두 한 켤레를 쥐어주고는 늘 그랬듯 마지막까지 "어댈 그리 바쁘게" 떠나간다. 그럴거면 차라리 나타나지 말 것을, 그래도 아버지라고 "인생 모진 걸 알아야 어매가 되고 부모가 된다"는 모질디 모진 말만 남기고는 영영 돌아갈 곳 없는 어딘가를 향해 끝끝내 발길을 돌린다.

아직도 갈 데가 그리 많냐고, 그 군화는 언제 벗을 꺼냐고 오열하는 경숙의 눈물에 내 일 마냥 복장이 터질 무렵, 문득 시야에 차오르는 그의 뒷모습에서는 앞서와는 다른 서글픔과 쓸쓸함이 한데 묻어나왔다.

젊을 적 흐드러진 젓가락 장단에 맞춰 쑥스러운 듯 뽑아내던 구성진 노래가 떠오른 탓인지, 나이든 아배에 대한 막연한 안쓰러움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는 번듯한 그들의 가족이 될 수 있길 부단히 소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자식을 통해 비로소 부모가 되어가듯 가족 역시 스스로 지켜나가려는 각자의 노력 없인 결코 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로서는 자연스레 깨달을 방법이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지레짐작만 할 뿐이다.

기실 경숙 아배의 이야기는 비단 그만의 이야기는 아니리라. 운명처럼 부모가 되고 부모란 이름이 주어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겪어야 하는 숱한 시행착오가 마침내 그를 아버지로, 부모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경숙 아배를 향한 알 수 없는 연민은 인물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느새 숙명처럼 '아버지'로서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아배들에 대한 찡함일 것이다.

해를 거듭하면서 더해진 연출력과 배우들의 단단한 연기 탓에 극은 연극과 삶을 넘나드는 기이한 경험을 숙제처럼 안겨주었다. 어디선가 뽕짝의 가락이 들려올 때면 경숙 아배의 장구 치는 모습이 물기 어린 아련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게재된 기사입니다.



태그:#경숙이 경숙아버지, #박근형, #김영필, #고수희, #문화공감 박소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