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사학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아 학내 구성원과 갈등을 지속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공립화 됐다. 선인학원이 한때 거느린 학교는 14개, 그곳에 다닌 학생이 3만 6400여 명, 교직원이 1만 4000여 명에 달했다. 1980, 1990년대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불렸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 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기자말

선인학원 설립자 백인엽의 형 백선엽의 등장으로 선인학원 정상화는 중단됐고, 신군부를 등에 업은 백인엽은 관선이사를 몰아냈다. 그리고 백씨가 추천한 이사가 주도하는 새로운 이사회가 구성됐다. 관선이사였던 고려대 교수와 국회의원, 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민병기(閔丙岐,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손자) 학장도 결국 백씨를 추종하는 교수들과 학교당국이 조종한 백씨 추종 학생들의 공작에 의해 물러났다.

백파 추종 교수에, 학생 프락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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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민주적이고 파행적인 학교 운영에 분노한 학생들은 종종 총장실 점거 농성을 벌였다. 이런 과정에서 백파 추종 교수와 학생 프락치 조작의 실체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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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쫓겨난 백인엽은 못다 이룬 '선인왕국' 건설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추종하는 교수와 학생조직을 규합했다. 백씨를 추종하는 세력을 당시 학생들은 '백파'로 칭했다.

백씨를 추종한 교수들은 수요회·목요회·금요회 등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모임엔 교수 15~20명이 참여했고, 회장과 간사까지 뒀다.

보직교수 중심으로 구성된 이런 모임은 백씨를 반대하는 소장파 교수 세력을 제압하고, 백씨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했다. 금요회는 인천대의 나이든 교수를 중심으로 구성됐고, 목요회는 인천전문대 교수로 구성됐다. 수요회는 인천대의 비교적 젊은 교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백씨는 교수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분상 위협으로 복종을 강요했다. 백씨는 '학생 지도를 철저히 하기 위해'라는 명분 아래 교수들의 출·퇴근 시간을 엄격히 하는 한편, 외부 대학 출강, 특히 인접한 인하대 출강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백씨는 '백파' 교수와 교직원을 동원해 '학생 프락치'를 조직해 운영했다. 학교 당국이 프락치를 조직해 운영한 것은 1986년 학원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학교가 작성한 내부 문건이 발견되면서 드러났다.

이 문건을 보면, 학교 당국은 1982년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 학생 프락치 조직을 구성해 학생과 민주 성향의 교수 동태를 파악하는 활동을 하게 했다. 1983년 학생1과 직원에 의해 작성된 노트와 경리과 장부 등에는 '호교회(학생자체연락망)'란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1984년 3월 학생처에서 나온 '1984년 1학기 학원 대책 사업'이란 보고서를 보면, '지하서클 발생에 대비해 호교회 구축'이라고 적혀 있다.

학생들은 그동안 학교 당국이 프락치를 심었을 것이라 추측하긴 했지만,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 1986년 학내 민주화 투쟁에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호교회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사례가 있다.

'이재영 총학생회장(1985년)이 당선되자, 호교회 회원인 한 단과대 학생회장은 총학생회장에게 접근해 학생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총학생회는 이 정보에 근거해 학생들의 숙원 사업인 도서관·대학본부 등, 중지된 건물의 공사 재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총학생회는 민병기 학장이 무능해 도서관과 대학본부 등의 공사가 재개되지 않는다고 믿고 싸웠다. 결국 민 학장은 1986년 2월 졸업식을 마치고 인천대를 떠났다- <선인학원 시립화 성공사>'

사실 도서관과 대학본부 공사는 백씨가 자금줄을 쥐고 있어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민 학장이 물러나자 백씨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인사를 학장에 앉혔고, 보직교수들도 자신의 추종세력으로 교체했다. 이런 힘을 이용해 백씨는 1986년 재단에 '건설본부'를 신설하고, '건설본부 자문위원'이란 직함을 가지고 재단에 공식적으로 복귀했다. 1986년 2월 18일, 이호 이사장은 이사회에서 선인학원을 설립자(백인엽)에게 돌려준다는 당국의 방침을 확인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그해 백씨는 선인학원을 다시 한 번 공사판으로 만들고, 이 과정에서 부를 축적했다. 이 일이 그해 5월 선인학원 학내 민주화 투쟁이 촉발된 계기가 됐다.

낯 뜨거운 인천대 교수의 참회진술서

백씨의 복귀 이후 선인학원은 또 다시 망가지기 시작했다. 결국 학생들은 1992년 80여 일간의 수업거부투쟁을 전개했고, 문교부는 관선이사를 파견했다.

1992년 학내 민주화 투쟁 때 발견된 한 교수의 '참회진술서'를 보면, 학문의 자유를 위해 노력해야 할 교수들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나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참회진술서는 1992년 교육부의 종합감사가 마무리되고 관선이사 파견을 위한 학생들의 투쟁이 절정을 이루던 5월 8일 발견됐다.

자필로 A4용지 네 장을 가득 채운 이 '참회진술서'는 놀랍다기보다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이 교수는 재임용에서 보류됐다가 백씨에게 자신을 '재단의 반역죄인'이라고 참회하는 진술서를 쓴 뒤 재임용됐다.

'선인학원 재단에 대한 반역죄인 김○○은 본 재단의 설립자이신 존경하는 백인엽 장군님께 참회하여 이실직고하니 이 죄인이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라는 서두로 시작한 이 참회진술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열 가지로 제시했다.

▲ 재단투쟁 대정부 청원서에 서명한 죄 ▲ 인천대 재단투쟁위원회 위원으로 가입한 죄 ▲ 재단투쟁 '10가지 이유, 100가지 사례' 문서 작성 참여 죄 ▲ 재단투쟁위원회 집회활동 참여 및 10만원 투쟁활동기금 공여 죄 ▲ 교육부 장관을 만나 재단 및 학교의 명예를 실추하고 모독한 죄 ▲ 한국정치학회 강△△ 회장 및 이□□ 교수를 만나 재단 및 학교의 명예를 실추한 죄 ▲ 이철 의원 비서관 및 박석무 의원 비서관에게 ▽▽과 학내문제 문서를 제공한 죄 ▲ 채×× 조정관의 호의를 악의로 받아 들여 감정을 상하게 한 죄 ▲ 같은 과 선배 교수를 폭행하여 품위를 손상한 죄 ▲ 학생들을 방조, 선동한 죄.

이 참회 진술서 각 항목의 끝에는 '저의 탐욕과 어리석음의 소치였습니다', '실로 재단 내막도 제대로 모르면서 저 죽을 줄도 모르고 저지른 어리석은 범행이었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고 우쭐하는 철부지 같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등의 문구가 담겼다.

이 진술서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장군님! 저의 기억으로 10가지 죄목을 적어 보았습니다만, 이러한 죄 이외에도 제가 느끼지 못한 죄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장군님께서 지적하여 일깨워주시는 대로 참회하여 응분의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1991년 10월 14일 재단 반역자 김○○.'

이 참회진술서는 당시 인천지역사회뿐 아니라, 언론의 관심사가 됐다. 당시 <조선일보> 등은 '재임용 보류되자 죄인자처 인천대 모 교수 진술서 물의'란 내용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제3자가 읽어도 얼굴을 붉힐 정도로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이 진술서는 선인학원 구성원들이 왜 그토록 절실하게 학원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는지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이 참회진술서가 세상에 알려진 후 재단 정상화와 학원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학생과 교수들은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오히려 격려를 받기도 했다. (계속 이어짐)

○ 편집ㅣ홍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