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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슬로길에선 시간도 바퀴도 느릿느릿 흘러간다.
 청산도 슬로길에선 시간도 바퀴도 느릿느릿 흘러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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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그 어떤 섬보다 화사해지는 남도의 끝자락 청산도. 매년 4월이면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가 벌어진다. 굳이 지자체에서 축제를 펼치지 않아도 요즘 같은 봄날 섬 마을과 바닷가 풍광은 그 자체가 축제다. 축제의 주인공 '청산도 슬로길'은 청산도 주민들의 마을간 이동로로 이용되던 길이었다. 섬 마을 길, 해안 길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 하여 '슬로길'이란 이름이 붙었단다.

청산도 슬로길은 전체 11코스(17개길) 42.195km로 100리에 이른다. 청산도는 서울 면적 16분의 1 정도 크기의 작은 섬이다 보니 덕분에 달팽이처럼 느리게 걷기 좋다. 슬로길의 상징도 집을 등에 지고 가는 느림의 대명사, 작은 달팽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자주 나와 섬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된 당리, 남해바다 파도 소리 들려오는 벼랑 위 숲속길이 있는 1코스와 2코스를 걸어 보았다.

총 8km의 두 개 코스는 하루 걷기 길로 적당하다. 10km가 안 되는 걷기 길이 짧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직선이 없는 구불구불한 숲길, 해안 길이라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11개의 모든 청산도 슬로길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특징이다.

파시골목, 돌담가 유채꽃길 펼쳐지는 슬로길 1코스

파시 골목의 역사와 사진이 담겨 있는 도청항 뒷골목 안통길.
 파시 골목의 역사와 사진이 담겨 있는 도청항 뒷골목 안통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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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주민들이 사진으로 담은 섬 풍경을 볼 수 있는 '느림 카페'
 청산도 주민들이 사진으로 담은 섬 풍경을 볼 수 있는 '느림 카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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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슬로길이 시작되는 1코스는 섬의 관문 도청항에서 이어진다. 미항길-동구정길-서편제길-화랑포 길까지 약 6km의 길. 파시골목을 품고 짭조름한 갯내음 풍기는 항구를 지나 드라마와 영화 <서편제>로 유명해진 당리 마을 언덕배기 돌담길과 유채밭길, 옥빛 남해바다가 아득하게 펼쳐지는 화랑포 해안 절벽길 등 운치 있고 멋들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카메라를 들고 아무데나 찍어도 작품사진이 나오다 보니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길이기도 하다. 

슬로길 1코스의 시작은 청산도의 관문 도청항에서 이어진다. 청산도의 입구이면서 출구이기도 해, 오가는 사람들이 제일 많다. 시끌벅적한 항구 뒤편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고요하고 고즈넉한 길이 나온다. 도청항 안통길 파시골목이라 부르는 골목길이다. 파시(波市)는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는 해상시장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남 영광 '파시평'이 등장하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바다 위에서 어류를 사고판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길다.

과거 성어기에는 고기잡이배들이 조업하는 어장에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어선들은 생선을, 상선들은 식량이나 땔감 등을 팔았다. 점점 어업과 상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도청항엔 어판장과 선구점, 음식점, 술집, 숙박시설 등이 갖춰진 임시 촌락으로까지 발전했다. 그곳이 지금의 도청항 뒷골목의 안통길이다.

청산도 면사무소였던 '느림카페'에서 본 청산도의 비경, 다랭이논 같은 파도가 펼쳐지는 신흥리 해변.
 청산도 면사무소였던 '느림카페'에서 본 청산도의 비경, 다랭이논 같은 파도가 펼쳐지는 신흥리 해변.
ⓒ 청산도 '느림카페'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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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는 이렇게 예부터 고등어와 삼치 파시로 유명했다. 특히 고등어는 일제강점기 때, 삼치는 1960년대 이후에 파시가 호황을 누렸다. 생선을 실은 어선들이 항구가 비좁을 정도로 몰려들어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골목길 벽에 파시의 풍경이 담긴 당시 흑백 사진들과 신문기사들이 붙어 있어 파시의 추억을 전해 주었다. 당시엔 술집, 여관이었다는 옛 목조건물들이 골동품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적막함이 느껴지는 골목 분위기처럼 온갖 인간사가 들고났을 파시는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어획량이 감소하고, 어업기술의 발달로 더 이상 중간 기항지가 필요 없게 된 것 등이 그 이유다. ​처음 들어보는 파시에 대한 이야기와 옛 사진들까지 보니, 파시의 흔적이 겨우 남아 있는 쓸쓸한 뒷골목길이 새롭게 보였다.

파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안통길을 걷다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느림 카페'도 놓치면 안 된다. 과거 일제 강점기 땐 신사가 있던 자리였다가 청산면사무소에서 지금은 카페를 겸한 향토역사문화전시관으로 바뀌었다. 도청항 주변 동네가 보이는 카페 창가도 좋고, 청산도 주민들이 마을과 사람, 자연풍경을 담았다는 사진을 무료로 전시하고 있어 꼭 들러볼 만하다. 봄은 물론 여름, 가을, 겨울의 섬 풍경은 이방인인 관광객이 찍은 사진들과는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특히 전남 완도군에서 한 사진전 대상을 받았다는 청산도 신흥리 해변의 파도 사진은 흡사 청산도 다랭이논(표준어는 다랑논)을 연상하게 해 누구나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말 그대로 비경이었다. 슬로길 7코스에 있는 신흥리 해변에 가면 나도 저런 사진을 꼭 찍어봐야겠다 생각하고 바닷가 풍경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마음속에 미술관을 짓게 한 마을, 당리  

섬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을 구경하고 있는 당리 주민 할머니.
 섬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을 구경하고 있는 당리 주민 할머니.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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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처럼 구불구불 천천히 걷게 하는 섬 길.
 달팽이처럼 구불구불 천천히 걷게 하는 섬 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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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항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해풍 때문인지 한껏 지붕 높이를 낮춘 도락리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당리 마을이다. 도락리 마을 해안에 이어진 바다와 작은 집들, 아늑한 정자, 마을 수호신 같은 소나무들이 눈을 잡아당겼다. 바닷가에 펼쳐진 노란 유채꽃밭은 또 얼마나 싱그러운지 후일 귀가해서도 자꾸만 눈 앞을 아른거리게 했다. 드문드문 빈집이 있는 한적한 어촌 마을 골목길, 찾아온 관광객들이 쓸쓸해 할까봐 친절하게도 담벼락에 청산도 풍경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당리 언덕배기에 오르면 나타나는 돌담길도 풍광이 멋지지만 실제 아름다움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 풍경도 일품이다. 언덕 오른편은 바다가 살짝 안쪽으로 패어 곡선 해변이 아름다운 도락마을이고, 왼편은 당리와 읍리 마을이다. 당리와 읍리 마을은 빨갛고 파란 원색 지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딱히 주민들이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란다. 호기심에 몇몇 주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섬에 오는 업자가 한정돼 있는 데다 그나마도 여러 색의 페인트를 구하기 힘들어서라고. 제주도나 남해의 섬 마을 집 지붕색깔에 대한 내 오래된 궁금증이 비로소 해소됐다.  

아름다운 섬의 봄날은 무덤마저 봉긋하고 정답게 느껴지게 했다.
 아름다운 섬의 봄날은 무덤마저 봉긋하고 정답게 느껴지게 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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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근시안이 됐던 눈을 멀리 트이게 해준 화랑포 해안길.
 도시에서 근시안이 됐던 눈을 멀리 트이게 해준 화랑포 해안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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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리 마을엔 한국영화 최초 100만 관객을 동원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의 명장면인,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는 장면이 촬영된 언덕배기 돌담길이 있다. 어깨 높이의 투박한 돌담과 샛노란 유채꽃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돌담길은 보기만 해도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마음이 푸근해진다. 수년째 청산도 홍보대사를 하며 올해도 섬을 찾아온 배우 손현주의 말대로 '가슴속에 넣어 두었다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꺼내 보고픈' 곳이다.

청산도 봄의 상징 유채꽃과 청보리가 짙은 대조를 이루며 마을과 언덕을 정취와 운치로 가득채우고 있다. 근처 밭에서 바로 봄나물을 캐는 동네 할머니들이 돌담에 걸터앉아 섬 구경을 온 관광객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불편하진 않으시냐고 말을 건넸다. 적적하지 않아 좋다고 하신다. 바다를 바라보며 당리 언덕 위에 숨은 듯 자리한 묘비 없는 무덤들에서도 단절감이나 죽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봉긋한 모양새가 오히려 내 어머니의 젖가슴같기도 해 정답고 자연스레 다가왔다. 

영화 세트장이자 인기 있는 사진 찍기 명소가 된 '언덕 위의 하얀집'을 지나 한 굽이돌면 옥빛 남해바다가 나온다. 가파른 언덕 아래 푸른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청산도 주민들은 이 길을 화랑포라 부른다. 한자를 보니 꽃 화(花)에 물결 랑(浪)자. 파도에 물살이 뒤집어지는 모습을 청산도 어른들은 '꽃이 물결 일렁이듯 핀다'고 시적으로 표현했단다. 쓰러진 고목을 벤치로 만들어 놓은 나무에 앉아 갯바위에 잔잔히 다가오는 하얀 파도와 눈부신 남해바다를 실컷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가까운 것만 보고 사느라 근시안이 돼 버린 눈, 청산도에 있는 동안 내내 '안구정화'를 하는 호강을 누렸다.

파도가 들려오는 숲길이 있는 남도의 해안길, 슬로길 2코스

초분이라는 섬의 장례풍습이 무척 흥미로웠다.
 초분이라는 섬의 장례풍습이 무척 흥미로웠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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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철썩이는 벼랑 위 해안길, 아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발길을 붙잡는다.
 파도가 철썩이는 벼랑 위 해안길, 아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발길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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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2km의 2코스(연애바위-당리재-읍리앞개)와 연계하면 하루 걷기 길로 적당하다. 1코스와 2코스, 총 8km 걷기 길이 짧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직선이 없는 구불구불한 마을 길, 돌담 길, 숲길, 바닷길은 8km가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을수록 좋은 청산도 섬 길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랑포 길이 끝나는 지점에 낯선 초가 무덤이 있다. 청산도에서만 볼 수 있는 초분(草墳)이다. 청산도 사람들은 부모가 세상을 떴다고 해서 바로 땅에 묻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초분을 지내는 집 자식들은 효심이 있다고 인정을 했다고. 시간상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점에 있는 초분은 3~5년간 관리한 후 좋은 날을 골라 다시 매장한다. 초장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절차가 복잡한 만큼 화장이나 매장에 비해 돈이 두 배로 든다. 따라서 청산도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 치르는 장례 방식이었단다.

이런 장례풍습은 지금까지도 일부 남아 있는 이중장례(二重葬禮) 제도로 상주가 먼 곳으로 출타했을 때 초상이 나면 돌아올 때까지 시신을 땅 위에 보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열흘이고 보름이고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던, 그 옛날 섬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와 산업개발시대를 거치면서 매장과 화장이 이 독특한 장례 풍습을 대신하게 되었다. 초분을 엮은 새끼줄에 소나무 가지가 꽂혀 있다면, 이는 자식들이 다녀갔다는 표시라고 한다.

초분을 지나면 숲 속 언덕길이 나온다. 바로 오른편 발치 아래 남해 바다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걷는 해안절벽 위 숲속 길은 참 상쾌했다. 관광객들 가득한 슬로길 1코스와 달리 갑자기 인적이 뚝 끊겼다. 덕택에 낭랑한 목소리로 지저귀는 귀여운 새들의 노랫소리, 숲의 고즈넉함과 해안절경의 운치를 내내 즐길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사람을 진정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문화나 예술이 아닌 자연의 영역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길, 달팽이처럼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새소리,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울창한 숲 길, 정말 의사없는 재활병원이다.
 새소리,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울창한 숲 길, 정말 의사없는 재활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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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리 마을에 있는 몽돌해변에선 '자그락 자그락' 파도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읍리 마을에 있는 몽돌해변에선 '자그락 자그락' 파도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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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의사도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재활병원이고, 사람들은 이 병원의 영원한 환자'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르는 풍경이 느리게 걷는 내 다리 속도에 맞춰 천천히 펼쳐졌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난 해안 길 아래로 아찔한 벼랑이 이어졌다. 벼랑 아래로 굵은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히며 만들어낸 하얀 포말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섬 앞 바다는 양식장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었다. 청산도 혹은 완도군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전복 양식장이다. 전복의 먹거리인 미역, 다시마 양식장도 따로 있다. 굴착기를 배에 단 어선들이 어부의 손처럼 양식장을 정성스레 돌보고 있었다. 여행자에게 바다는 그저 낭만이지만 섬 주민에게 바다는 삶의 현장이다.

먼 거리지만 내 시선을 느꼈을까, 흘깃 이쪽을 쳐다보는 까맣게 탄 얼굴의 어부 아저씨에게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청산도 슬로길을 걷다보면 껍데기에 푸른 빛이 도는 전복 양식장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목하게 들어간 해안이 많은 청산도는 섬사람들에게 천혜의 양식장이 되어 준 듯했다.

하늘과 바다가 어찌나 눈부시도록 푸르른지 서로 위치가 뒤바뀌어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도 바다도 하늘도 모든 것이 푸르다 해서 청산도라더니 맞는 말이구나 싶었다. 해안 벼랑길 위에 자리한 재미있는 이름의 연애바위와 모래날 길을 지나면 2코스의 마무리인 읍리앞개에 도달한다.

읍리 마을에 있는 해변은 동글동글한 돌들이 많아 신발 벗고 발 마사지하기 좋은 몽돌 해변이다. 순한 파도가 바닷가에 닿을 적 마다 '자그락 자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맨발로 햇볕에 달구어진 몽돌위를 걸었더니 발마사지가 제대로 됐는지 심신이 나른해졌다. 해변 가 솔숲 그늘 아래 놓여있는 평상에 누웠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자그락 자그락' 파도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려왔고, 봄볕은 이불처럼 따스했다.   

* 청산도 슬로길 1코스~2코스 : 도청항 - 안통길 파시골목 – 도락리 어촌마을 – 당리 언덕 돌담 길 – 화랑포 길 – 초분 – 해안가 절벽 위 숲속 길 – 모래남길(당리재) - 읍리앞개  (총 8km)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11일에 다녀 왔습니다.



태그:#청산도 슬로길, #파시골목, #당리 유채꽃 돌담길, #도락리, #초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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