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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가 불탔다
▲ 당신에게 실크로드 22 - 파미르고원 02 경찰서가 불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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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한때 마르코폴로가 지났던 길이다. 차는 힌두쿠시 산맥을 끼고 판즈강을 따라 끊임없이 달렸다. 이 강이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의 국경이다. 강 너머 아프가니스탄에는 네모 납작한 황토 벽돌 집들이 있었고, 하얀 옷을 입은 아프간 사람들이 밭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자 운전사는 강 건너편에서 아프가니스탄 스나이퍼가 널 노릴 수 있다며 괜히 겁을 줬다.

강을 기준으로 왼쪽이 아프가니스탄, 오른쪽이 타지키스탄이다
▲ 강이 국경 강을 기준으로 왼쪽이 아프가니스탄, 오른쪽이 타지키스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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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 건너면 아프가니스탄이다. 아프가니스탄. 유라시아 대륙의 정중앙이고, 끊임없이 다양한 문명이 지나간 통로였다. 알렉산더 대왕을 따라 이곳에 왔던 그리스인들은 박트리아라는 나라를 세우고, 불상을 만들었다. 흉노에 쫓긴 월지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 쿠샨왕국을 세웠다. 현장도 혜초도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로 갔다. 이렇듯 실크로드의 중요한 나라 중 하나지만, 사실 가 볼 생각조차 안했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이름 뒤에는 자연스럽게 '전쟁'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탈레반'이 생각난다. 연상 작용으로 2001년 탈레반이 폭파한 바미안 석굴도 떠오른다. 비이슬람 우상과 싸우고 마호메트의 시대를 열겠다며 1500년을 지켜오던 인류 문화유산을 돌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지난 2007년 샘물교회가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활동을 갔다가 탈레반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다. 두 종교의 부딪힘을 보며 종교적 신념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했다.

어쨌든 아프가니스탄은 눈앞에 있어도 갈 수 없는 나라다. 하지만 타지키스탄 이쉬카심 (Ishikashim)에서는 매주 한 번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을 수 있다. 매주 토요일에 국경 시장인 아프간 바자르가 열리기 때문이다. 국경 근처 다리에서 열리는 이 시장은 비자 없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잠시 밟을 수 있는 기회다. 양국 사람들은 자유로히 드나들 수 있고, 여행자들도 여권만 맡기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이 시장을 보기 위해 매주 주말이면 각국의 여행자들이 이곳으로 모인다.

다인종 국가인 타지키스탄. 파미르지역엔 유난히 푸른 눈이 많았다.
▲ 파미르의 아이들 다인종 국가인 타지키스탄. 파미르지역엔 유난히 푸른 눈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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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운이 없게도 내가 도착한 날엔 바자르가 열리지 않았다. 2014년 6월 14일. 그날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결선투표가 있는 날이었다. 4월에 있었던 첫 투표에서 두 후보 다 50%를 넘지 못해서 다시 선거를 하는 거란다. 허무해서 맥이 풀린다. 아프가니스탄 땅 한번 밟아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아쉽게 호로그로 향했다.

가운데 구멍에 햇빛이 통과하면 씨를 뿌렸다. 랑가르에서 이쉬카심 가는 도중에 있는 얌이라는 마을에 있다.
▲ 파미르 사람들의 해 달력 가운데 구멍에 햇빛이 통과하면 씨를 뿌렸다. 랑가르에서 이쉬카심 가는 도중에 있는 얌이라는 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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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가 불탔다

호로그(Khorog)는 고르노-바다흐샨 주의 주도다. 이 곳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시장에 가서 과일과 야채를 사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쌀과 콩만 먹다 보니 신선한 음식이 그리웠다. 숙소에서 내려와 시장 쪽으로 가는데 새까맣게 불에 탄 건물이 보였다. 시장 가는 것이 급해서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현지인들과 대화하면서 알았다. 그 건물이 한 달 전 불에 탄 경찰서였다는 것을.

2014년 5월 21일, 이곳에서는 마약밀매범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그 후 반정부 성향의 주민들이 경찰서, 법원 등 관공서 건물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파미르 퍼밋 발급이 중단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라흐몬 대통령. 1994년부터 대통령이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5년도 길게 느껴지는데.
▲ 호로그시내에 있는 대통령 초상화 라흐몬 대통령. 1994년부터 대통령이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5년도 길게 느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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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대표적인 마약생산국이다. 국토의 3분의 1에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한다. 그리고 타지키스탄은 구소련연합 중 가장 가난한 나라다. 2014년 1인당 명목 GDP순위에서 152위를 차지했다. 이곳에선 강 하나만 건너면 아프가니스탄이다. 강폭이 20m도 안 되는 지역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여름에는 물이 말라붙어 걸어서도 건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타지키스탄 사람들이 보드카 한 박스를 들고 강을 건너 헤로인과 바꿔온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심지어 호로그 시내에 외제 차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마약밀매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아서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불과 3주 전만 해도 경찰서가 불탈 정도로 긴박한 정세였다는 이곳. 하지만 예상과 달리 호로그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호의적이었다. 길을 걷다가 결혼식에 불려가기도 했다. 내 앞으로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나는 귀빈이 되어 그 집안사람들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술에 취해 있던 신랑에 비해 붉은 옷의 신부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곳 여성들은 늘씬한 몸매에 높은 코, 움푹 들어간 눈매가 매우 아름답다.
▲ 붉은 옷의 신부 이곳 여성들은 늘씬한 몸매에 높은 코, 움푹 들어간 눈매가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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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파미르 지역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밝고 적극적인 여성들이었다. 토요일 저녁 레스토랑, 여자들은 중앙으로 나와 춤을 췄다. 막춤 일색이었던 키르기스스탄 여인들의 춤과 달리 파미르 여인들의 춤은 우아했다. 깊은 눈과 큰 키, 그리고 늘씬한 몸매가 춤을 더 멋지게 보이게 했다. 재미삼아 공중에 휘날리는 팔 동작을 따라해 보고 있는데 젊은 여성이 내게 와 춤을 청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나는 중앙에 끌려나왔다. 난감하다. 앞에서 춤추는 아가씨처럼 우아하게 춤추기 위해 애써봤다. 불가능했다. 게다가 신체조건에서 이미 졌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호로그에서 3시간 정도 차를 달리면 바탕 밸리에 위치한 지제브(Jisev, Geisev)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 소개된 내용 때문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 가기 위해선 수동 케이블카에 매달려 강을 건너야 한단다. 그리고 2시간 정도 걸으면 마을이 나타난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숨겨진 마을이라니... 흥미가 생겼다. 영국, 독일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다. 둘 다 내 나이 또래의 여성 여행자다.

일단 차를 타고 강을 건너는 지점까지 갔다. 하지만 가이드북에 소개된 케이블카는 운행 중단이고 그 옆에 긴 현수교가 새로 놓여 있다. 운행 중단된 케이블카는 내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강 이쪽과 저쪽을 로프로 연결해 놓았고, 초소처럼 생긴 작은 깡통 집이 있다. 이게 케이블 카였다. <론리 플래닛>의 최대 문제점은 사진이 없다는 거다. 말로만 설명을 해두니 짐작이 안 간다. 심지어 저 깡통집이 강 건너에 있을 때는 로프에 매달린 작은 판자때기를 타야 했단다. 현수교가 생겨서 다행이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2~3시간 가야 마을이 나온다
▲ 지제브 마을로 가는 현수교 여기서부터 걸어서 2~3시간 가야 마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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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교가 안 생겼으면 저걸 탈 뻔했다.
▲ 케이블카 현수교가 안 생겼으면 저걸 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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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교를 건너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자갈길을 지나고, 숲길을 지나고, 중간에 비가 와서 바위틈에 숨기도 하며 두 시간을 올랐다. 개울을 건너자 "Welcome to Jisev(웰컴 투 지제브)"라고 적힌 바위가 보였다. 그 후론 온 세상이 꽃밭으로 변했다. 꽃을 헤치며 길을 걸었다.

우연히 만난 파견 간호사 로라는 노란 꽃은 위장에 좋은 꽃이고 하얀 꽃은 두통에 좋은 꽃이라고 설명해줬다. 옆의 친구가 황홀한 듯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바로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천국이 이렇게 배낭 메고 오르는 거라면 사양하겠어."

사실 입이 딱 벌이지는 풍경은 아닌데, 걷고 있으면 행복한 곳이었다.
▲ 지제브 마을 사실 입이 딱 벌이지는 풍경은 아닌데, 걷고 있으면 행복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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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한 지 2시간 반, 첫 번째 마을이 나타났다. 이 지제브 계곡에는 세 개의 마을이 있는데, 총 가구 수는 15가구다. 첫 번째 마을에서 40분 정도 걸으면 두 번째 마을, 30분 후엔 세 번째 마을이 나온다. 마을마다 홈스테이 하는 집이 있다. 역시 전통적인 파미리 집이다.

첫 번째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저녁식사로 나온 감자스프는 빈약했다. 세수는 집 앞 도랑에서 했다. 태양열 전기는 일찍 끊겼고, 일찍 누운 우리들은 잠이 안 와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30대 여성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결혼과 일.

호수에서 바라본 첫 번째 마을. 10가구 정도 살고 있다.
▲ 첫번째 마을 호수에서 바라본 첫 번째 마을. 10가구 정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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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트레킹에 나섰다. 방을 나와 마당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 도랑을 건너고, 꽃을 따라 계곡을 건너고, 다시 오솔길을 지나면 에메랄드 색을 한 호수에 닿는다. 유난히 물빛이 푸른 건 석회석 때문이란다. 호숫가에 앉아 호로그 여행정보센터에서 샀던 책을 꺼내들었다. 파미르 지역의 풍습과 전설에 관한 책이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 색깔이 새파란 것은 석회암 때문이다.
▲ 호수 가는 길 물 색깔이 새파란 것은 석회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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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세상을 만들 때, 신은 사람들에게 땅을 분배할 테니 자신의 땅을 그려오라고 했다. 파미르 사람들의 대표자는 작은 몸을 가지고 있었고, 또 선량해서 다른 사람들을 팔꿈치로 밀치지 못했다. 그래서 줄의 맨 끝에 서게 되었다. 그가 신 앞에 도착하자 신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내가 계산을 잘못했구나! 이제 너에게 줄 땅이 남아있지 않다." 파미르 대표자는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 어찌나 슬펐는지 신도 함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신은 다시 말했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사실 내 정원을 만들기 위해 작은 땅 하나를 남겨두었다. 이 땅을 너에게 주니, 앞으로 이 땅을 바다흐션이라 부르도록 하여라" (Robert Middleton 'Legends of the parmirs'에서 발췌 )

그렇게 파미르 사람들은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 그러나 신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 이곳의 길은 반드시 누군가의 집을 지난다. 길을 걷다 보면 고양이가 먼저 뛰어나와 있고, 고개를 들면 파란 눈을 한 파미르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차를 권하기에 마시고, 약간의 돈을 찻잔 아래에 넣어두고 나왔다. 이곳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처럼 돈을 꺼내면 손사래부터 쳤다. 신의 정원처럼 아름답긴 하지만 모든 것이 척박한 이 곳. 하지만 넘치는 것이 있다면 파미르 사람들의 정이었다.

두 번째 마을에 도착하자 고양이가 먼저 뛰어 나왔다. 개 대신 기르나보다.
▲ "누구신지...?" 두 번째 마을에 도착하자 고양이가 먼저 뛰어 나왔다. 개 대신 기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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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제브 마을에서 만난 파란 눈의 할아버지
▲ "차 마시고 가" 지제브 마을에서 만난 파란 눈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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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호로그에서 지제브 마을 가는 법
가장 쉬운 방법은 호로그 시장 앞에서 합승택시 기사와 흥정을 하는 거다. 혹은 근처 도시인 루샨으로 가서 다시 바탕 밸리로 가는 차를 타는 방법이 있다. 현수교를 건너 오르막길을 2~3시간 오르면 첫 번째 마을이 나타난다. 길은 외딴 길이어서 잃을 염려는 없다. 세 마을 다 합쳐서 전체 가구 수는 15가구 정도다. 각 마을마다 홈스테이가 있고 가격은 식사 포함 USD $15다. 간단한 영어가 통한다. 태양열 전기가 있고, 태양열 샤워시스템이 있긴 하지만 큰 기대는 않는 게 낫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타지키스탄, #파미르, #이쉬카심, #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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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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