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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일)은 24절기의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穀雨)다. 농경사회 시절에는 곡우 무렵에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내렸고, 그 물로 못자리를 하였다. 물이 꼭 필요한 이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곡우 때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고 걱정할 정도였는데, 하늘이 염려라도 했는지 아침부터 반가운 봄비가 온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었다.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4·19혁명 제2주년 기념식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4·19혁명 제2주년 기념식
ⓒ 군산사범학교 1963년 졸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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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아침부터 비가 내리더니 오후에는 불그레한 태양이 구름 사이로 살포시 얼굴을 내밀었다. 4·19혁명 55주년 기념일이어서 그런지 저녁에는 '3·15 부정선거 무효!', '이승만 독재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하던 학생들이 경찰의 곤봉과 총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처참한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서쪽 하늘이 유달리 붉게 보였다.

1960년 당시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 대화를 귀담아듣고, 이튿날 급우들에게 자유당의 폭정을 설명해주는 해설사 역할도 하였다. 여야(與野)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미국에서 날아온 조병옥 박사 서거 소식에 한탄하던 어른들 표정과 서울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추모행렬 장면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수십 년 후퇴시킨 5·16 군사쿠데타를 예견이라도 했는지 이듬해부터는 4월 19일을 전후해서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어느 해인가, 빗줄기가 함석지붕을 때리는 '타다닥' 소리를 들으면서 "요새 비는, 비가 아니라 생죽음당한 학생들이 하늘에서 흘리는 눈물이랑게···."라며 한숨을 길게 내쉬던 앞집아저씨 모습도 지워지지 않는다.

1960년 4월 군산의 풍경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야당 선거위원들이 정치깡패들에게 폭행당하는가 하면 대리투표에 투표함이 바뀌고 개표장이 갑자기 정전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선거였다. 군산도 공무원이 동원됐고, 동네 통반장이 이끄는 3인조, 5인조 공개투표가 자행됐다.

그해 4월 초 경남 마산에서 열리는 부정선거 규탄대회에 갔다가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학생이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체로 떠오르자 학생들 분노는 하늘로 치솟았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 중심의 시위가 각 지방 중소도시로 번져나갔던 것. 

시위 학생들과 희생자 추모식 광경 사진
 시위 학생들과 희생자 추모식 광경 사진
ⓒ 군산사범학교 1961년 졸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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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이랑 대구랑 서울서는 굉장허던디 느그들은 왜 데모 안 허냐... 다른 학교 학생들이랑 공원서 합쳐가꼬 중앙로 쪽으로 밀고 내려오믄 경찰들도 꼼짝 못헐틴디.."
"예! 그러잖혀도 학생회의에서 시위허기로 결정했어요. 중학생들도 함께 헌다고 허던디요."

그해 4월 어느 날. 아버지와 신문을 앞에 놓고 시국을 걱정하던 앞집 아저씨와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형님이 주고받은 대화이다. 형님 말대로 군산에서도 10여 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군산고, 군산동중 학생 200여 명은 4월 22일 오후 월명산에 집결,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산발적으로 가담한 군산상고, 군산여고, 군여상, 군산남중, 군산중, 군산북중, 군여중, 중앙여중 학생들과 시민이 합세, 12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학원에 자유를 달라!', '이승만 정부는 각지에서 무참히 쓰러져간 학도들을 책임져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하고 오후 7시쯤 자진 해산하였다.(1960년 4월 23일 자 <동아일보>)

민주당 군산지구당 건물(1959년)
 민주당 군산지구당 건물(1959년)
ⓒ 군옥약진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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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데모가 있기 하루 전날(21일) 오전 10시 민주당 군산시 지구당은 집회신고서를 군산경찰서에 제출했다. 경찰이 집회를 불허하자 군산·옥구 당원과 간부 80여 명은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 이날 정오 당 사무실에 모여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다음 시가행진을 벌이려다 정보를 탐지하고 달려온 정사복경찰 60여 명과 옥신각신 끝에 한걸음도 전진을 못하고 제지되고 말았다.

55년 전 신문에서 만난 아버지

1960년 4월 25일 300여 명의 대학교수가 이승만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거리시위를 전개했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군산 시민과 학생들은 동아일보가 펼친 '4월 민주혁명 순국학생위령탑' 건립기금 모금에 성금을 내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1960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학생위령탑 건립기금 군산시 접수자 명단.
 1960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학생위령탑 건립기금 군산시 접수자 명단.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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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검색하던 중 순국학생위령탑 건립 성금 기탁자 명단에서 48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趙光錫)와 고향동네 아저씨들 이름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당시 아버지는 어머니와 군산 째보선창에서 쌀가게를 했는데, 낯익은 이름을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기억에서 사라진 추억들까지 떠오르며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졌다.

동아일보 군산지국에 성금을 접수한 40여 명 중 필자가 기억하는 기탁자는 조광석(1000환)을 비롯해 공건식(2000환), 제빙공장(1000환), 김석두(1000환), 권복수(5000환), 문수동(3000환), 문오덕(1000환), 김일산(500환), 박연길(2000환), 차홍준(5000환) 등이다. '원양제빙'으로 불리었던 제빙공장은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아 회사 이름으로 내지 않았나 싶다.  

김일산, 박연길씨는 어머니와 돈거래를 해서 왕래가 잦았으며 문오덕씨는 어업조합 중매인, 공건식, 권복수씨는 선구점을 운영했다. 풍채가 좋았던 김석두씨는 선주이자 째보선창에서 가장 큰 젓탱크를 소유한 부자였다. 문수동씨와 차홍준씨는 민주당 군산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차씨는 계림주조장 사장과 동아일보 군산지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른 분들과도 유대가 깊었으나, 당시 민주당 군산지구당 김판술(3선 의원) 위원장과 절친했던 앞집 아저씨(문오덕) 권유로 성금을 낸 것으로 생각된다. 10환으로 국화빵 10개를 사 먹던 시절. 아들들에게 설날 세뱃돈을 한 푼도 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학생 위령탑 건립기금을 냈다니 놀랍고,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4,19혁명기념일,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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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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