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불편할 것 같은 영화
▲ 영화 <강남 1970>의 포스터 불편할 것 같은 영화
ⓒ 모베라픽쳐스

관련사진보기

최근 내가 나이 들었음을 통렬하게 자각하는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지난 1월에 개봉한 영화 <강남 1970>을 접하고 나서였다.

영화 <강남 1970>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은 때부터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김래원이 주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를 잇는 거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인간 군상들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유하 감독의 작품들. 거기에다 1970년 강남을 제목으로 뽑았으니 영화에 담길 내용은 빤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강남'이 태동하던 시기, 욕망의 덫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겠지. 이는 사회학을 전공한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였다. 어쨌든 현재 우리의 자화상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그 시기에 대한 충분한 자기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영화 <강남 1970>을 보지 못했다. 볼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는데도 차마 볼 수 없었다. 영화를 봐야 한다는 책임감 비슷한 의지보다는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느끼게 될 불편함에 대한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이다. 영화 속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마냥 편하게 볼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사실 나이를 먹다보면 불편함을 피하고 싶은 욕망이 커지기 마련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따르고 싶고, 피곤하고 아픈 것은 굳이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 어차피 그동안의 경험으로 그 불편함의 원인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그 아픈 상처를 보면서까지 다시 원인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지 않다.

흔히들 나이를 먹으면 보수적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무언가 지킬 게 많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기가 믿어온 가치를 전복 당하기 싫어함'을 의미한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계속해서 자아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한데, 나이가 들어 자신의 생각이 확고한 사람일수록 이 과정은 매우 피곤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잘못을 자인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특히 분단 이후 흑백논리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진보'로 남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사회가 생각의 다양성보다는 획일적인 통합을 중시해온 이상, 그것을 뛰어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진영 안에서도 자신의 레짐에 빠진 보수적인 인물이 얼마나 많은가. 현 구조 속에서 젊었을 때 진보적인 이들이 나이가 들어 보수화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다.

이젠 <강남 1970> 정도 되는 불편한 영화는 굳이 선택하고 싶지 않은 나이가 돼버린 나. 그런데 최근 그런 나를 부끄럽게 만든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호 1주기였다. 세월호를 기억하며 느끼는 불편함은 영화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과연 내가 그 엄청난 사건을 온몸으로 올곧이 받아들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 것이다. 혹시 내가 무의식적으로 세월호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월호 트라우마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아 1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세월호특조위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아 1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세월호특조위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사실 세월호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1주기라고는 하나, 그것이 개개인에게 세월호를 다시 기억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 4월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300명이 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그 중 태반은 아직 채 꽃피지 못한 아이들이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만 봐도 눈시울을 적셨던 잔인한 봄. 1년 전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깊은 상흔에 깜짝 놀란다. 아마도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르겠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망각의 본능은 상처가 크고 깊을수록 세지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세월호 트라우마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데, 세월호의 침몰에 대한 부끄러움과 책임감은 나이에 비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993년의 서해훼리호 사고 이후 2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벌어진 세월호 참사. 그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서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비록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어도 세월호가 침몰할 만큼 사회를 방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썩어빠진 현실을 바탕으로 부를 모은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그들이 만든 체제 안에서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자포자기한 채 술잔만 기울였다.

물론 혹자는 그 와중에도 사회를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그들 역시 세월호의 책임에서는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어쨌든 그만큼 절박함이 모자랐기에 그들은 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을 설득시키지 못했으며, 결국 사회는 아직 '이 모양 이 꼴'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옅어지는 건 불편함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속성 때문이다. 내가 <강남 1970>을 차마 선택하지 못했듯이,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이 세월호를 끄집어내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망각을 부추기는 정부

18일 오후 세월호특조위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유가족들이 농성중인 광화문앞으로 행진하자 경찰이 물대포를 발사하며 저지하고 있다.
 18일 오후 세월호특조위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유가족들이 농성중인 광화문앞으로 행진하자 경찰이 물대포를 발사하며 저지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세월호를 잊어도 되는 것일까? 단지 아프다는 이유로, 불편하다는 이유로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세월호 참사를 그냥 기억 속에 묻어도 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아픔에도 불구하고 세월호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22년 전 서해훼리호 사고가 터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참사를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는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일인 동시에 우리의 자식들을 위한 일이다. 이번에도 세월호가 잊힌다면 우리는 공동체의 안녕을 장담할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은 곧 우리의 실존적 문제이며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장려해야 하는 정부가 오히려 사회의 집단적인 망각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침몰 이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구조작업과 수색작업은 그렇다고 치자. 사회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그 원인을 밝히고, 이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다시는 그와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인데 현 정부와 보수세력은 이와 같은 의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기존 자료만 취합해도 답이 나올 수 있는 침몰 원인을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밝혀내지 않고 있으며,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유 있는 항변은 정치적 쟁점화 시켜 그들을 오히려 종북몰이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유가족들의 요구와 상관없이 그들을 자식 팔아 돈 벌려는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고, 지루한 협상 끝에 겨우 출범한 세월호 특조위를 '세금도둑'이라고 폄훼하며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결국 이런 정부의 움직임은 사회 구성원들이 세월호를 기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맞닿아 있다. 현 정부와 보수세력, 그들 자신이 과거 적폐의 산물인 이상 세월호에 대한 기억은 이를 들춰낼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권장하는 것은 세월호에 대한 빠른 망각과 불편함에 대한 외면이다.

다행히 지난 주 우리는 아직 우리 스스로가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나와 유가족들을 위로했으며, 망각을 부추기는 세력들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비록 한 보수언론은 정체 모를 시위대가 태극기를 불태우는 사진을 게재하며 세월호 추모식 자체를 폄훼했지만 그렇다고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기억은 그 자체로 투쟁이다. 세월호를 기억하자.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세월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