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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종말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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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 국세청 법인세 신고 기업 51만 7000여 개 가운데 10대 기업이 기록한 매출액은 전체(4313조 5천 억)의 24.8% 수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전체의 4.6%를 차지하며 전년대비 그 비중을 더욱 늘렸다. 거대 기업의 영향력이 갈 수록 확장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삼성, 현대, LG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은 핵심사업분야에서의 전문성 뿐 아니라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섬유, 철강, 조선, 전자 등 산업 전 부문에서의 규모를 키워왔다. 마치 규모를 키우는 게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조건처럼 보였고 거대함은 기업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유명한 경영사학자 앨프리드 챈들러가 이같은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역작 <보이는 손 The Visible Hand>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한 경영자의 '보이는 손'이 시장지배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대체하면서 근대기업의 주요한 추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요약하자면 거대 기업이 가진 권력이 시장이 지닌 힘과 비견할 만큼의 실질적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연합하고 시장지배를 강화하며 신종 산업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대기업들이 출현하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이러한 분석은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성질이 있으며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생산수단의 독점과 이로 인한 계층의 고착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은 이같은 환경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산유국과 중국 등 신흥개발도상국의 재벌, 미국의 헤지펀드 경영자, 인터넷 벤처기업가가 새로운 부유층으로 떠올랐다.

이들 가운데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태국의 탁신 친나왓, 미국의 루퍼트 머독과 조지 소로스 등은 끊임없이 정치에 개입하였고 빌 게이츠와 같은 재벌은 미국과 전 세계의 공공정책에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득권자가 새로이 탄생하지만 그때마다 돈과 권력이 서로를 강화하며 기성체제가 더욱 공고해지는 모습을 대중은 목격해온 것이다.

국내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관피아 논란이 빚어지며 알려진 것처럼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정관계 유력 인사를 적극 영입해 해당 분야의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명백히 자유경쟁의 시장질서에 어긋난 이와 같은 현상은 권력이 그 규모와 위력을 점차 키우며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 가지 혁명이 새로운 시대를 말하다

<포린 폴리시>의 편집장으로 유명한 모이제스 나임의 저서 <권력의 종말>은 권력이 더욱 강화된다는 이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그는 책에서 미시권력의 출현과 함께 권력이 크기와 규모의 족쇄에서 풀려나올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양적증가혁명, 이동혁명, 의식혁명'을 이야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양적증가혁명이란 인류가 과거에 비교해 전반적으로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필수품도 더 잘 제공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더 풍족한 삶을 살 때, 그들을 철저히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다'는 게 양적증가혁명이 가져오는 변화의 핵심이다.

이동혁명이란 인종, 종교, 직업에 따른 이주의 증가, 사상, 자본, 신념의 전파 등이 과거보다 훨씬 쉽게 이루어지고 이로부터 포박된 수용자가 소멸하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 의식혁명은 앞의 두 가지 변화와 연계된 개념으로 선진국 뿐 아니라 개발 도상국과 후진국의 시민들도 점차 더 좋은 상품과 서비스 등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모이제스 나임에 따르면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이같은 혁명적 변화는 기존 권력을 공고히 하던 장벽을 무력화하고 구멍을 뚫으며 침식시킨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연합이 불법이민이나 밀무역을 막지 못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마약유입을 저지하지 못하는 것, 가톨릭 교회 등 관습과 윤리적 의무에 호소하는 기존의 권력이 여러 부분에서 점차 어려움을 겪는 현상을 예로 들며 이를 입증한다.

그는 과거엔 무시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미시권력micropower들이 이같은 혁명적 변화 속에서 각 분야를 지배했던 거대권력, 대규모 관료조직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고립시키는 경우가 잦아질 것이라 예측한다. 미시권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득권 세력을 지치게 하고 활동을 방해하고 기반을 무너뜨려 권력의 붕괴를 촉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권력이 규모와 무관해지면서 권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했던 거대한 관료조직이 무의미해지는 현상은 이제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게 그의 일관된 인식이다.

전방위적으로 위협받는 권력,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저자는 세계적인 중국전문가 밍신 페이의 말을 빌려 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표현한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들은 지나간 호시절을 공공연히 이야기해요. 그때는 전임자들이 수많은 블로거, 해커, 국적을 초월한 범죄, 부패한 지방 관리, 해마다 18만 건씩 민중 항의를 조직하는 사회운동가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시절이죠. 과거에는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그들을 처리하려고 정치 지도자들이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어요. 오늘날 지도자들도 권력은 있지만 수십 년 전만큼 강하지는 않지요. 이 사람들의 권력은 꾸준히 약해지고 있어요."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 대선후보로 사르코지에 맞선 세골렌 루아얄의 활약은 이같은 변화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모든 당원에게 예비선거를 개방한 사회당의 정책변화에 발맞춰 루아얄의 선거캠프는 투표권을 행사할 신규당원의 모집에 대대적으로 나섰고 예비선거에서 61%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 사회당은 2011년에는 예비선거를 유권자 일반에게까지 개방하는 혁신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프랑수아 올랑드가 사회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어 사르코지를 꺾었다.

모이제스 나임은 이같은 사례가 세계적 흐름의 일환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이 직면한 도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이같은 변화는 비단 정치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저자가 군사분야에서 제시하는 통계자료는 이러한 추세를 조금 더 명확히 보여준다. 책에 따르면 알 카에다는 9.11 테러 자금으로 약 50만 달러를 썼다. 하지만 그날 미국이 입은 피해액과 반격하는데 들인 비용을 합치면 3조 3천억 달러에 이른다. 뿐만 아니다. 2006년 헤즈볼라는 6만 달러짜리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해 이스라엘 해군의 첨단 코르벳함 하니트Hanit를 침몰시켰다. 이 함정은 2억 6천 만 달러 짜리였다.

알려진 것처럼 오늘날 전쟁은 재래식 대규모 군사력으로 다루기 힘든 새로운 양상을 띤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군대로 보기 어려운 소규모 병력이 정규군과 맞서는 비대칭전, 비정규전의 비중이 갈 수록 늘어간다. 소규모 군사력이 꾸준히 성과를 거둬온 사례를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은 전방위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정치, 경제적인 민주화가 확산되는 반면 지역 분리주의, 외국인 혐오, 반 이주민 운동, 종교 근본주의 등이 득세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을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고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권력의 양태가 변화하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모이제스 나임은 권력의 완전한 종말과 소멸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권력이 일찌기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 영향력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책은 미시권력의 등장과 맞물려 거대권력의 생존도모 역시 이뤄지고 있으며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험과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변화에 직면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언급하며 논의를 마친다.

모이제스 나임의 대안은 사실 그 분석보다는 얄팍하고 가벼운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적극적인 참여와 자기혁신이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가장 단순하며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권력의 종말>(모이제스 나임 지음 / 김병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02. / 2만 2000원)



권력의 종말 - 다른 세상의 시작

모이제스 나임 지음, 김병순 옮김, 책읽는수요일(2015)


태그:#권력의 종말, #책읽는수요일, #모이제스 나임, #김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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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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