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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계획에 없던 중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후, 이듬해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 현지대학교에 입학한 32살 늦깎이 유학생입니다. 올해 7월 졸업을 앞두고, 이후 중국을 더 가까이 느끼고자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중국의 일상생활과 유학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 기자 말

내 생일을 챙겨준 평화소학교 꼬마 천사들
 내 생일을 챙겨준 평화소학교 꼬마 천사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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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생 실습을 위해 처음 출근하던 날,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2014년 9월부터 12월까지 교생 실습을 했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외국이기에 무엇을 하더라도 낯선 환경에 대한 막연한 걱정은 늘 따라다녔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위축감이나 불안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날도 이런저런 쓸모없는 걱정만 잔뜩 안은 채 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설렘보다 두려움에 가까웠지만 겁쟁이가 되긴 싫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을 외면할 순 없지 않은가.

학교의 유명인사, 한국인 교생이 떴다!

중국 초등학교 교실 전경. 수업시간이 끝나고 학생이 칠판을 지우고 있다.
 중국 초등학교 교실 전경. 수업시간이 끝나고 학생이 칠판을 지우고 있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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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교문에 들어섰을 때, 하던 일을 멈추고 바라보던 아이들의 시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반짝이는 눈빛과 뚝뚝 떨어지는 호기심이 내가 움직이는 걸음걸음마다 따라 붙었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용케도 외국인임을 알아본다. 으쓱하기보다 부담스럽고 쑥스러웠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웬만하면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었다.

물론 아이들은 나를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단지 중국학교에 외국인이 활보하니 신기하게 쳐다본 것일 뿐이다. 공연히 시선이 부담스러워 부리나케 도망 다니는 것이다. 어쨌든 수백 개의 시선이 동시에 따라 붙는다는 것은 마냥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외국인 교생은 큰 이슈 그 자체였다. 전교에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한류스타까지는 아니어도, 유명인사까진 되는 것 같았다. 중국에 살면서 어지간한 사람들의 관심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의 후끈한 열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주변을 맴돌며 나를 관찰하기를 며칠, 마침내 서서히 인사를 건네고 한 두 마디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물꼬가 트이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주위에서 여러 명이 시끌벅적 떠들어대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여러 질문이 한데 뒤섞여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을 수 없다. 연예인이 이런 것인가? 스타가 된 오묘한 느낌이었다.

스타(?)라면 거쳐야 할 여러 고충들

중국 아이들에게 해준 사인만 수백 여장이다.
 중국 아이들에게 해준 사인만 수백 여장이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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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작은 호의였다. 순박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선생님, 이름이 뭐예요?"
"김희선이야."
"와! 진짜 한국인 같다. 한국어로 어떻게 써요?"
"진짜 한국인이야. 적어 줄게. 자, 이렇게 쓰는 거야. 신기하지?"

그렇게 이름을 적어 준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나의 한국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받아든 아이는 기뻐하며 그대로 단숨에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에게 자랑했나 보다. 초등학생 때는 별게 다 부러울 나이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다. 부러웠던 꼬마들이 어느새 벌떼가 되어 모여 들었다.

"라오싀, 워이에야오! 워이에씨에게이워!(선생님 저도요! 저도 해주세요!)"

그게 뭐라고 입소문을 타고 전교생에게 퍼져 매일 이십 여장 이상씩 사인을 했다. 꽤 해준 것 같은데도 내 사인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의 사인을 원하는 아이들은 날마다 늘어났다. 귀여웠던 아이들이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때로는 복사해서 나눠주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들의 요구사항은 더욱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선생님,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도 한글로 적어주세요!"
"선생님, '김수현, 전지현, 이민호'도 한글로 사인해주세요!"

헐-이다. 이 순진한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보다 못한 선생님이 나서서 화를 내며 아이들을 쫓아냈다.

"니먼비에다라오라오싀, 콰이디알후이취바!(너희들 그만하고 교실로 돌아가!)"

그제야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아쉬운 듯 흩어졌다. 이처럼 종종 선생님이 구출(?)해 주긴 했지만, 실습이 끝나는 날까지 쉼 없이 사인을 해야 했다. 일부러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만 박혀 있어도 누군가가 끊임없이 종이뭉치를 가져와 해맑게 웃으며 들이민다. 방법이 없다. 꼼짝 못하고 앉아 이름을 썼다. 내 사인을 못 가진 평화소학교 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나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주위에 구름떼같이 몰려들어 오고가는 길을 배웅한다. 거기다 매일같이 뽀뽀, 악수, 포옹 등을 해달라고 조른다. 난감할 때도 있지만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다. 한껏 안아주면 국경을 초월한 따스함이 온몸으로 파고든다.

생각해보면 그때 약간 연예인병이 걸렸던 것도 같다. 매일같이 한껏 치장하고 미스코리아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살랑 살랑 흔들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단단히 미쳤던 것 같다. 현재는 예전처럼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데, 인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이 가끔씩 그립긴 하다.

평화소학교 귀요미들의 감동적인 깜짝 선물

아이들에게 받은 생일선물. 소소하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채우기엔 충분했다.
 아이들에게 받은 생일선물. 소소하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채우기엔 충분했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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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은 어느새 막바지로 향하며 겨울이 오고 있었다. 언젠가 유난히 나를 따르던 여자아이가 이름, 생년월일 등을 물어 내 프로필을 작성해 갔었다. 초등학생의 풋풋한 취미였다. 나 또한 어릴 적 친구들과 프로필을 교환해 다이어리에 모았었다. 그렇게 모인 친구컬렉션을 보며 뿌듯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 실습이 끝나갈 때 내 생일이 다가왔다. 별 생각 없이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아이들이 나를 찾아 모여 들었다. 그리고 부끄럽게 무언가 내밀며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다. 내가 써준 프로필의 생일을 기억하고 고사리 손으로 쓴 편지와 조그만 선물을 가져왔다.

코가 콱 막혀왔다. 타지에서 잊고 살았던 생일을 꼬마 천사들이 챙겨 준 것이다. 잊지 못할 그때의 감동을 어떻게 다 전할까. 정식 교사는 아니었지만, 선생님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을 맛 본 기분이다. 뿌듯하고 보람됐고 가슴이 뻐근해졌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아이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이 이야기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빼놓지 않고 들려주던 귀엽고 따스한 추억이다. 하도 반복하다보니 주변에 더 이상 들어줄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글로나마 이 풋풋하고 깜찍한 이야기를 영원히 새겨놓는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세상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보내주던 착한 천사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중국, #중국유학, #중국대학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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