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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기를 무려 1000번이나 반복한 조선 시대 선비가 있었다. 부친상을 비롯해 조모상, 조부상, 모친상 등 무려 10여 년을 상중으로 보내고도 환경을 탓하지 않은 선비였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 정쟁의 현장을 지켜보고 권력의 정점에서 오히려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을 돌아본 선비가 바로 덕계 오건이다. 덕계 오건을 만나러 가는 길은 봄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를 탓하지 않게 했다.

경남 진주에서 산청가는 국도 3호선 옆에 서계서원이 있다.
 경남 진주에서 산청가는 국도 3호선 옆에 서계서원이 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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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장가 가려는지 아침에 맑았던 하늘이 점심 때부터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경남 산청 서계서원으로 가던 4월 14일은 날씨가 얄궂었다. 진주에서 거창 가는 국도 3호선을 타고 내달린 차는 산청읍 쌀고개를 넘어 읍내로 들어갔다.

읍내 교육청 지나서 국도 밑 통로를 지나 아이사랑 어린이집 방향으로 들어가자 어린이집 바로 옆에 서원이 있었다. 서원 홍살문 앞에는 이곳 어르신들 말씀에 '떡뫼'라고 하는 흙무더기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서계서원 앞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떡뫼’라고 부른다.
 서계서원 앞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떡뫼’라고 부른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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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름 뿌린 논두렁 사이 '떡뫼'로 올라갔다. 하얀 명자가 반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서 있다. 그 주위에 소나무 여럿이 호위하는 모양새다. 저너머 필봉산이며 왕산이 보인다. 정상이라고 하기에 뭐한 높이지만 이곳에 큼지막한 돌들이 4개 있다.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경남 산청 서계서원 전경.
 경남 산청 서계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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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메'를 나와 다시 논두렁을 지나 서원 앞 홍살문 앞에 섰다. 붉은 홍살문 사이로 대문인 입덕루가 보이고 누각에 붙은 '입덕문' 현판이 보인다. '입덕(入德)'이란 <중용>에 나오는 말로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서원 정문에 걸어 놓아 서원을 들어오는 이들에게 성인의 덕을 배운다는 목적을 알린 셈이다.

입덕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고들빼기 하나가 계단 돌 사이로 노란 꽃을 피웠다. 돌 틈 사이 작은 먼지들로 이루어진 흙 속에 생명을 피운 고들빼기의 노력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입덕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가로질러 서계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이 나온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마당에는 하얀 냉이 꽃과 흰민들레가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서계서원 편액 아래 처마에 앉았다. 강당 마루는 지붕에서 떨어진 흙 부스러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경남 산청 서계서원 대문인 입덕루에서 바라본 강당.
 경남 산청 서계서원 대문인 입덕루에서 바라본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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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은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모신 곳이다. 오건(1521~1574)의 본관은 함양이며,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제자다. 한때는 퇴계 이황 선생에게도 배우기도 했다. 오건 선생은 서른 살 늦은 나이에 남명 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지극한 효자였던 선생은 열한 살 때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덕계 선생은 "너는 글을 열심히 읽어 집안을 일으키고 나아가 나라에 쓰일 큰 인물이 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집이 가난해 책이 별로 없어 눈에 띄는 <중용>을 집어 들고 무려 1000번이나 상중에 읽었다고 전한다. 중용에 나오는 작은 주석까지 송두리째 외울 뿐 아니라 내용까지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읽고 또 읽어 진리를 깨우친 공부법은 지금도 우리에게 뜻하는 바가 크다.

11세에 부친상을 시작으로, 14세에 조모상, 16세에 조부상, 24세에 모친상, 25세에 계조모상을 당하였다. 스물 입곱살이 되던 해 복을 시묘살이에서 벗어났다. 이런 까닭으로 늙은 나이에 남명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한 것이다. 남명도 덕계를 '선생'이라 호칭하며 대우했다.

‘떡뫼’에는 느티나무와 이를 호위하는 듯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떡뫼’에는 느티나무와 이를 호위하는 듯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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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는 1558년 (명종 13)에 과거에 급제했다. 선생은 선조 5년에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이조정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전랑천거법'에 따라 후임에 김효원을 천거했다. 그러나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외척 심의겸이 선례에 없는 반대에 나섰다. 이조전랑 천거로 불거져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선생은 정쟁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처마 아래 씀바귀처럼 쓴맛에 강당 뒤를 돌아 수수꽃다리를 지나 선생의 위패를 모신 창덕사로 올라갔다. 창덕사 앞마당은 가득한 솜방이꽃이 노랗게 물들었다. 창덕사는 문이 잠겼다. 기와에서 뚝~ 떨어지는 낙숫물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서원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으먼 남명과 덕계의 각별했던 사제지간 일화가 떠오른다.
 서원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으먼 남명과 덕계의 각별했던 사제지간 일화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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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과 덕계의 각별했던 사제지간 일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덕산에 자리 잡은 남명 조식 선생을 뵈러 덕계 오건이 찾아왔다가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는데, 작별을 못내 아쉬워하던 남명이 10리 밖까지 배웅했다. 스승의 전별주에 취한 오건은 말에서 떨어져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남명이 덕계에게 전별주를 대접했던 나무 아래를 송객정(送客亭)이라 부르고, 덕계가 말에서 떨어져 이마를 다친 곳을 면상촌(面傷村)이라 부르게 되었다.'(<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중에서)

면상촌과 송객정은 삼장면 덕교 마을에 있다고 한다. 창덕사를 내려와 왼편으로 덕천재를 지나 작은 문을 지났다. 문을 지나자 봄비에 젖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우산을 받쳐 든 나를 바라본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언덕 위에 소나무에 둘러싸인 선생의 묘소를 보았다. 길은 질퍽해서 올라가기를 포기했다.

서원 옆으로 덕계 오건 묘소가 있다.
 서원 옆으로 덕계 오건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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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신도비를 뒤로하고 덕계서원 앞 흙무더기 같은 언덕 '떡뫼'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마을회관에는 예닐곱 명의 할머니들이 점 10원의 화투놀이를 하고 있었다.

덕계서원 맞은편으로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과 가락국 마지막 왕의 전설이 깃든 왕산이 보인다.
 덕계서원 맞은편으로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과 가락국 마지막 왕의 전설이 깃든 왕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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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여섯의 박복년 할머니는 "내가 열여덟에 이곳에 시집올 때부터 떡뫼라고 부르던데.  올 초에 산림에서 나무를 많이 솎았어. 그곳에 그네를 매고 아이들이 많이 놀았지. 언제부터 느티나무가 있었는지는 몰라" 한다. 아쉽게도 '떡뫼'라 부르는 흙 동산에 얽힌 이야기는 더는 들을 수 없었다. 회관을 나오자 비가 그쳤다.

하루하루 앞만 보고 내달리기 힘겨운 요즘이다. 더구나 '빨리빨리'의 경쟁 사회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사치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과 잠시 떨어져 나 자신을 마주하기 좋은 곳은 여기가 그만이다. 10여 년의 상중(喪中)이라는 환경에 굴하지 않은 덕계 오건의 공부법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다시금 일깨운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 산청한방약초축제 블로그 http://blog.naver.com/scherbfest
해찬솔일기 http://blog.daum.net/haechansol71/



태그:#산청한방약초축제, #서계서원, #덕계 오건, #남명 조식, #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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