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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통일 토크콘서트로 정부·언론 '종북몰이'의 중심에 서게 돼 강제출국당한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 시민기자가 자신이 한국에서 직접 겪은 일을 정리해 보내왔습니다. [편집자말]
신은미 시민기자가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통일토크콘서트 종북 몰이'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왼쪽은 희망정치연구포럼 황선 대표.
 신은미 시민기자가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통일토크콘서트 종북 몰이'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왼쪽은 희망정치연구포럼 황선 대표.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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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국회의원이 주최하는 통일 토크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출국하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동안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언론사와 시사프로그램 출연진 그리고 필자들을 상대로 무료 소송을 해주시겠다는 변호사님들, 건강 검진과 영양제 주사를 놔주시겠다는 의사 선생님들, 보약을 지어주시겠다는 한의사 선생님, 수행비서를 자원하신 분들, 경호를 담당하시겠다는 분들, 지방의 특산물을 보내시겠다는 분들….

대부분이 내가 쓴 기행문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독자들이었다. 정계·학계·언론계·종교계에 계신 분들로부터 위로의 말과 함께 "지금 이대로 떠나면 안 된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질 뿐만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모국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당장 꺼져!"라는 연락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소수였다. 종편 채널에서는 '신은미씨가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보도했다. 어찌도 내 일거수일투족에 이렇게도 큰 관심을 보이는지…. 평론가로 종편 시사프로그램에 나온 한 여성 변호사는 '드디어 종북 신은미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꼬리를 내리며 짐을 싼다'는 식의 말을 하기도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듣고 있노라면 '방송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역시 종편에 등장하는 다른 평론가는 나를 향해 '머리가 아주 좋거나 아니면 머리가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평한다. 나의 발언을 두고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고 있으니 머리가 아주 좋거나, 황선씨 같은 '종북 인사'와 토크콘서트를 한 것을 보면 아주 머리가 나쁘다"고 말했다.

나는 국가보안법을 잘 알지 못한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을 의식해 스스로 발언을 검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생각을 말하는 데 있어서 함께한 상대가 누구인지 또한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 사는 가련한 평론가들에게는 아마 내가 그렇게 비친 모양이다.

같은 말도 누구랑 있었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신은미 시민기자가 통일부 Uni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을 당시 모습.
 신은미 시민기자가 통일부 Uni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을 당시 모습.
ⓒ UniTv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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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서울에 왔을 때 통일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통일부 인터넷 방송인 Uni TV 가 통일을 홍보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설명이었다. 그들은 내 여행기와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 좋겠다며 내게 출연을 제의했다. 나는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촬영에 응했다.

그 영상은 내가 '종북몰이'에 휩싸이기 전까지 통일부 누리집에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소위 '종북 인사'라 불리는 황선씨와 통일 토크콘서트를 한 것이 이슈가 돼자 통일부는 내가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누리집에서 삭제했다. 그 이유는 '신은미씨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것이었다.

2013년 통일부와 다큐멘터리를 촬영했을 당시의 내 발언과 2014년 통일 토크콘서트를 할 때의 내 이야기는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념적 편향성'을 문제 삼았다. 그렇다면 같은 말이라도 통일부와 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종북 인사'가 함께한 자리에서 하면 내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일까.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말일까. 어이가 없을 뿐이다.

나의 첫 여행기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2013년 상반기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부는 그 책 1200권을 사들여 전국 각지의 공공도서관 등에 배포했다. 어쩌면 '우수문학도서 선정'도 곧 취소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런 뉴스를 본 몇몇 지인들은 내게 '지금은 때가 아니니 몸을 낮추고 잠잠히 있다가 때가되면 그때 다시 목소리를 내라'는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나를 위한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충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북녘의 산하와 동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특별한 때가 있고 특별한 상대가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김정은 북한 제1위원장. 지난 2013년 9월 북한 로동적위군 열병식 당시 모습.
 김정은 북한 제1위원장. 지난 2013년 9월 북한 로동적위군 열병식 당시 모습.
ⓒ <민족통신> 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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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편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한 미 영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로베르토 파워스(Roberto Powers) 영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답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곧 출국을 하겠다'는 결정을 서서히 번복하고 있었다. 내가 결심을 번복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탈북자 독자들이었다. 그들은 '최근 몇 년간 신 선생님이 전해주는 북녘 동포들의 소식을 듣고 사진을 보면서 통일의 그날, 고향 땅을 찾아갈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며 강연을 계속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지난해 12월 2일 나는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남은 강연을 마치고 원래 예정했던 날에 출국하겠다"라고 발표함과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물론 만나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후일 돌아온 박 대통령의 대답은 '종북콘서트'라는 말뿐이었다.

행여 내가 정말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려고 했다.

'북의 동포들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이뤄진,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통일은 대박'에 백 번 공감합니다.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비극적 분단이 해결되려면 지도자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부디 역사에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그런 분이 돼주십시오.'

나는 머지 않아 수양가족들을 만나러 북한에 갈 것이다. 북한에 가면 '김정은 제1위원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고, 똑같은 요청을 할 작정이다. 한낱 해외동포 관광객에 불과한 나를 만나주지도 않을 것은 물론, 어쩌면 '불경죄'로 북한에 억류돼 감옥에 간다고 할지라도 나는 만남을 요청할 것이다.

독자들의 도움을 받다

'종북몰이' 논란에 휩싸여 강제퇴거 처분을 받고 출국길에 나선 신은미 시민기자. 사진은 지난 1월 10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로비에서 출국 심정 밝히고 있는 모습.
 '종북몰이' 논란에 휩싸여 강제퇴거 처분을 받고 출국길에 나선 신은미 시민기자. 사진은 지난 1월 10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로비에서 출국 심정 밝히고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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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송의 천국'이라는 미국에 살고 있지만 배심원 자격으로 법정에 간 것 이외에는 단 한 번도 법정에 서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는 소송을 시작했다. 여러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나를 '종북' '북한의 지령을 받는 사람' 등이라 칭하며 마녀사냥과 같은 보도를 하는 소위 '보수언론' 그리고 그곳에 출연한 패널들, SNS상에서 온갖 막말을 해댄 사람들(상당수가 신원 불명이었다)을 상대로한 소송이다.

나를 돕겠다고 자원한 여러 분들 중 수행비서를 하겠다는 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언론사와 독자들로부터 오는 많은 양의 메시지를 우리 부부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언론사가 문제였다. 대체 어느 언론사가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를 하는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나도 언론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이미 허위보도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라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 한 종편 채널과 북한을 소개하는 인터뷰를 여러 차례 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은 인터뷰와 함께 내가 제공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내보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의 제작진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방송이 나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 큰몫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상황이 이러하니 나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그 어떤 언론사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내 기행문을 내보냈던 <오마이뉴스>도 언젠가는 내게 화살을 돌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수행비서를 자청한 분은 나와 동향인 대구 출신의 30대 초반 남성이었다. 내가 이 분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주변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줄 알고 그러느냐'며 극구만류하기도 했다.

사람의 눈을 보면 진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분을 처음 만났을 때 난 그의 눈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난 이 사람을 믿었다. 그리고 내 판단은 옳았다. 이분은 내가 강제출국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함께한 고마운 분이었다. 이별의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도 눈물이 맺힌 그의 선한 두 눈망울이었다.

'끝장토론' 하자는 탈북자들

지난해 12월 3일 탈북자 이순실씨 등 3명이 신은미 시민기자에게 '끝장토론'을 제안하는 기자회견 당시 모습. TV조선 보도 갈무리.
 지난해 12월 3일 탈북자 이순실씨 등 3명이 신은미 시민기자에게 '끝장토론'을 제안하는 기자회견 당시 모습. TV조선 보도 갈무리.
ⓒ 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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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국 결정을 번복하며 예정대로 토크콘서트를 모두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겠다는 기자회견을 하자 2014년 12월 3일 종편 채널에 자주 출연하는 탈북자들이 내게 '끝장토론'을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는 기자회견에 나선 탈북자 중 이순실이라는 사람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북한에서 들은 이야기를 확인시켜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첫 북한 관광 중 남편이 안내원에게 '탈북하다 잡히면 수용소에 가거나, 심하면 사형까지 집행한다고 알고 있다'고 말하자 안내원은 "그건 공화국에 대한 악선전입니다, 여러 번 탈북한 사람도 있는데 형벌이 그렇게 무섭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변했던 것을 들은 적이 있다(관련 기사 : 헉! 큰일났다, 남편이 '탈북자' 얘길 꺼냈다).

'아홉 번 붙잡혀 북송 당한 끝에 열 번 만에 (탈북에) 성공해 한국에 왔다'는 이순실씨의 말을 듣고 북한 안내원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들 탈북자들의 기자회견 요지는 '우리들은 지옥 같은 북한에서 탈출해 왔는데, (당신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하니 어디 끝장토론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허위·왜곡보도를 하는 언론사들과 그곳에 출연하는 평론가들, 그리고 기자회견을 한 탈북자들 모두 내 강연이나 토크콘서트를 들어본 적 없음이 분명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들은 나의 북한 기행문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서문조차 읽어보지 않은 듯하다. 나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그저 이들은 내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했다'는 종편의 날조된 보도를 듣고 부화뇌동하고 있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후일 경찰도 "통일 토크콘서트에서 '지상낙원'이라는 발언은 없었다"라고 발표하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는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내게는 이 탈북자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게는 북한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탈북자들이나 모두 한 동포일 뿐이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겪었다는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인 것이다(관련 기사: 부부바위 본 김정일 위원장, 이런 농담까지 했다니).

그런데, '끝장토론'을 제안한 탈북자들은 내가 한 말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문제삼기도 했다. 그 말은 바로 내가 강연 중에 한 말, "내게 연락을 해온 탈북자들 중 70%~80%가 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신은미, #재미동포, #토크콘서트, #종북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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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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