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럽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패러다임과 시스템, 그 바탕에는 역사적 자산과 사회적 자본이 깔려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 자유와 평화, 협동과 연대, 자주와 자립, 이타심과 공동체 의식, 신뢰와 질서, 생태주의와 생명 사상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한 유럽'은 이런 바탕을 가진 유럽 7개국(영국,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일상 체험 여행기입니다. - 기자 말

-
▲ 중세 동화의 나라같은 프라하시가를 보헤미안 처럼 누비는 프라하시민들의 발, 트램(tram,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불후의 명곡이다. 1980년대 초 대학 앞 음습한 지하 다방에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백만 번쯤 들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절규에 가까운 열창을 듣고 나면 묵은 체증이나 응어리가 좀 풀렸다.

그 때 그 시절, 현재는 암울했고 미래는 막막했다. 지루하고 무서운 하루 하루를 겨우 버티던 힘을 그 노래에서 겨우 얻곤 했다. 지하 다방 구석 자리에서나마 자유로운 보헤미아의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꿈꿨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나를 설레게 한 나라는 단연 체코다. 보헤미아(Bohemia). 역사적으로 보헤미안, 또는 집시의 얼과 한이 서린 체코의 서북부 지방을 가리킨다.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보이오하이뭄(Boiohaemum)이라는 켈트 계통 부족이 이 지역에 거주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프라하 여행은 필생의 숙원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또는 '프라하의 봄'의 그 드라마틱한 프라하.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밀란 쿤데라의 그 문학적인 프라하. 바츠라프 하벨의 그 혁명적인 프라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드보르 작의 그 음악적인 프라하. 그 역사적인 프라하의 오래된 거리를 걸으며 보헤미안 랩소디를 듣다가 느닷없이 줄리엣 비노쉬를 마주치는 환상에 몇 번 시달린 적이 있다.

보헤미아로 망명 꿈꾸던 자유인, 프라하에 입성하다

영국 런던에서 에어버스를 타고 2시간 만에 프라하공항에 도착했다. 시차 때문에 런던의 대낮은 프라하의 한밤으로 돌변했다. 젊은 날 꿈꾸던 망명지인 보헤미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흥분하고 감격했다. 비록 바츠라프 하벨 프라하공항 로비에 보헤미안 랩소디는 울려 퍼지지 않았지만, 프라하의 봄의 히로인 줄리엣 비노쉬는 마중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를 만나면 이렇게 서로 주고 받을 체코어 인사말도 철저히 준비했는데.

"줄리엣, 도브리 덴(dobry den, 안녕), 제꾸이(dekuji, 고마워)."

대신 프라하공항의 모든 안내판에 한국인을 특별히 환영하려는듯 한글이 병기돼 있다. 안내판엔 영어조차 없는데 체코어, 러시아어 다음에 한글이 새겨져있다. 그래서 순간 착각하고 방심했다. 체코인들은 한국을 참 좋아하는구나, 체코 거리에서 길을 찾기는 어렵지 않겠구나. 안내판과 이정표만 잘 따라 다니면 되겠구나.

그러나 큰 오산이었다. 체코 거리의 모든 이정표는 체코 사람만 읽을 수 있도록 오직 체코어로만 쓰여있다. 세계인의 공용어인 영어도 단 한 줄도 없다. 체코어를 모르면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프라하공항 안내판이 한글로 쓰인 건, 한국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단지 대한항공 때문이다. 체코 국영항공(Czech Airlines) 지분을 40% 넘게 인수한 대주주 자본의 위력 때문이다.

공항을 빠져나와 프라하 도심에 이르려면 무시무시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이다. 거의 지하철만큼 빠른 속도로, 그것도 까마득한 깊이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린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면 마음을 좀 놔도 된다. 지상의 도심에서는 주로 느린 트램(tram, 전차)을 상대하면 된다.

프라하 도심은 중세의 동화 나라나 영화 촬영장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초행의 한국인 눈에는 대형 놀이공원이 겹쳐진다. 그런 도시 경관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순식간에 건너온 시간 여행자 기분이 된다. 과장이나 거짓말이 아니다.

특히 중세의 거리를 종횡무진 누비는 프라하 시민의 발, 트램(tram)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1970년대로 돌아갔다. 엄마 손을 잡고 노량진에서 영등포 시장으로 전차를 타고 장 보러 가던 유소년 시절로 회귀했다. 영등포 시장통의 연흥극장이나 영보극장에 신성일, 최무룡, 박노식, 윤정희, 남정임, 문희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갈 때 올라타던 전차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 집은 가난했고 나는 어렸고 전차는 느렸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립다.

보헤미안음식 전문식당 트라디체의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맥주와 돼지족
 보헤미안음식 전문식당 트라디체의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맥주와 돼지족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블타바강 유역에 펼쳐진 프라하 시가지는 광장과 골목이 적당히 어우러져 아기자기하다. 걸어서 얼마든지 한나절 도보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인간적인 규모다. 트램, 지하철 등 대중 교통 노선도 복잡하지 않다. 메트로 티켓 한 장으로 종일 무제한으로 타고 돌아다닐 수 있다. 물가도 싸다.

그러나 한밤에 도착한 첫날의 프라하는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낯선 도시의 밤길을 돌아다닐 시간도, 담력도 없었다. 숙소부터 찾느라 허둥지둥했다. 역시 프라하의 동서남북도 한국의 동서남북과 많이 달랐다. 프라하의 1km도 한국의 1km보다 더 먼 듯했다.

프라하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착한 안델(Andel) 역을 나서자 밤이 깊어 인적마저 드물었다. 멀리 차가운 네온사인만 요란했다. 안델지구는 신흥 비즈니스 지구로 구시가지와는 달리 호텔, 금융기관, 쇼핑몰 등 현대식 건축물이 즐비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체코인이지만,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역시 잘 못하는 영어로 길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안델(andel)호텔을 물어봤는데, 알려준 곳을 찾아가니 엔젤(angel) 호텔이었다. 체코인들의 영어 수준이 거의 내 수준이라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한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 번의 시행착오를 할 수는 없었다.

보헤미안 맥주와 보헤미안 족발 안주

스마트폰에서 비장의 무기, 구글 지도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안델 호텔 프론트데스크에 도착하자마자 배고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프라하에 왔는데, 보헤미아에 왔는데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다.

"배가 고프다. 근처에 전통 보헤미안 스타일의 오래된 맛집이 있다면 알려다오. 물론, 세계 최고의 맥주, 체코의 명품 맥주, 필스너 맥주를 먹을 수 있는."

호텔 매니저가 알려준 대로 찾아간 식당은 트라디체(tradice). 말 그대로 체코어로 전통, 관습이라는 뜻이다. 간판에는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표시도 선명하다. 우르켈(Urquell)이라는 단어는 굳이 체코에서 생산한 오리지날(Original) 필스너 맥주임을 나타내려 붙인 상표다. 독일식 필스너와 구분하려 체코식 보헤미아 필스너로 부르기도 한다. 맥주 하나에 담긴 체코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한국에서도 어느 지방을 가든 술집이나 식당의 분위기를 척 보면 알아채는 경지에 이른 나로서는, 일단 트라디체 식당의 첫인상부터, 겉모습부터 믿음이 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가 찾던 바로 그 보헤미안 스타일의 전통 식당이다.

일단 자유분방해 보이는 보헤미안들이 삼삼오오 테이블마다 차지하고 마치 서로 싸우듯 웃고 떠들고 있었다. 물론 필스너 맥주잔을 하나씩 끼고. 근심도 걱정도 없는 행복한 체코인의 일상 풍경이다. 만취해 주정을 부리는 손님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여느 한국인처럼 술을 퍼마시고 취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친구, 이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주목적인듯 보였다.

마땅히 필스너 맥주부터 시켰다. 1842년 체코 필젠에서 만든 세계 최고의 보헤미안 황금빛 보리로 만든, 세계 최초의 황금빛 라거맥주로 특유의 쌉쌀함과 달달함이 조화를 이룬 맛으로 유명하다. 나같은 통풍 환자에게 맥주는 쥐약이지만, 그 사실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필스너 맥주의 맛과 통풍의 통증 쯤은 얼마든지 맞바꿀 수 있다는 각오였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심정으로 보헤미안들이 먹던 맥주를 들이켰다. 극락의 맛이었다.

보헤미안 맥주의 세계화는 한식과 달랐다

-
▲ 프라하성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네루도바 거리의 겨울 한기는 단돈 50코루나(CZK)짜리 '끓 -
ⓒ 안숙영

관련사진보기


필스너 맥주의 감동은 시작에 불과하다. 백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안주들이다. 특히 콜레노(Koleno)는 압권이다. 돼지 넓적다리를 숙성해 구워낸 체코식 돼지 족발이다. 체코에 오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보헤미안 지방의 대표 음식이다.

지난해 독일 뮌헨의 세계 최대의 맥주홀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우연히 맛본 독일 바이에른식 돼지족발 '슈바인 학센'의 맛을 잊지 못한 터. 개인적으로는 바이에른식 돼지족발보다 보헤미안식 돼지족발이 더 입에 맞는다. 물론 독일보다 값도 더 싸고.  

거기에 체코 프라하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맛의 결정판은 '글루 바인(gluh wein)'이다. 영어식으로는 멀드 와인(mulled wine). 수필가 전혜린이 뮌헨 슈뱌빙의 추운 겨울날 점심 식사 대신 마셨다는 바로 그 '끓인 와인'이다. 프랑스 등에선 감기약 대용으로 마신다고 한다. 한국인이 감기 기운을 물리치려 즐겨 먹는 쌍화탕이나 쌍화차의 약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와인에 오렌지나 레몬, 계피, 정향 같은 향신료, 꿀을 넣어 끓여 만든다.

나는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네루도바 거리에서 프라하의 겨울 한기를 만났다. 목도리도 하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이국의 모진 감기와 맞닥뜨렸다. 그때 단돈 50코루나(CZK), 한국돈으로 2000원 짜리 멀드 와인을 파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그럴 것이다. 그 한 잔의 와인으로 체코의 감기를 거뜬히 물리쳤다.

세계적인 맛의 보헤미안 맥주, 안주를 먹으면서 한식 세계화 사업에 매달리고 있는 조국의 속사정을 생각했다. 떡볶이, 비빔밥, 전통주, 김치 등 4가지 음식을 정해놓고 매년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돈을 들인 만큼 뚜렷한 소득이나 성과가 없다. 심지어 이전 정부인 이명박 정부 시절, 한식 세계화 사업을 무리하게 국책 사업으로 추진하면서 '영부인 사업'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고 있다.

합리적이고, 현명하고, 냉정한 세계인들은 한국 정부가 억지로 급조해 강요하는 듯한 한식에 관심이 없다. 맛도 낯설다. 세계 최고의 보헤미안 음식, 필스너 맥주와 콜레노는 체코 정부가 나서서 억지로 세계화한 게 아니다. 세계인이 먹어보니 맛이 좋아서 저절로 세계화가 된 것이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프라하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