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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에 펜으로 그린 커플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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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을 지나 4월, 학교로 치면 아직 새 학기-새 학년이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고, 중학생은 고등학생이 되거나 집을 떠나 거리의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고등학생은 대학생이나 재수생이 되거나, 혹은 군인이 되거나 일부는 아무 것도 안 되거나 한다. 그게 다다. 대한민국에서 학생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진학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특수 신분'이다(안타깝고 이상하게도 새학년-새학기가 돼도 학교는 학교이고 선생도 그냥 선생이다).

근래에, 중학생 그 가운데서도 중2를 콕 집어서 괴물, 정신병자 혹은 반인반수 등이라 부르는 어른들이 많이 생겼다. 심지어 그것을 치명적인 병으로 간주하고 '중2병'이라는 말도 흔하게 쓴다. 아직 무엇이 될지 안 될지조차도 잘 모르는 이들을 가리키는 어른들의 용어치고는 살벌한 기운마저 감돈다. 자신들이 '특수 신분'이던 때를 까맣게 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가혹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 살벌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중학생들과 함께 살며 관찰한 기록을 시작할까 한다. 그들이 정말 괴물인지, 도대체 누가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는지, 진정 그들은 누구인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가지 실화를 바탕으로 중학생에 대해 말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당연하게도 이 글에서 다루는 일화들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적인 열 다섯 살 중학생들의 '리얼' 그대로의 이야기지만 보는 눈에 따라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중학생들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열 다섯 살은 '중딩'이기도 하지만 '중(~ing)'이기도 하다. 이제 그 놀랍고도 눈물겨운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아래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장면①] 사랑 고백 했더니 3초 만에...

준기는 '중2'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무섭다고 말하는 바로 그 중학교 2학년. 그러나 준기는 온순하며 성실하고 착하다. 이런 추상적인 표현들로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괜찮은 친구다. 굳이 흠 아닌 흠을 찾으라면 또래들보다 좀 몸집이 크고 둥글둥글하다는 것 정도.

이팔청춘 15세, 인생의 봄인 사춘기에 발동이 걸리면서 바야흐로 준기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위 송곳니 두개가 덧니로 나온 같은 반 명지한테 한눈에 반한 것이다. 준기는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안도현 시, '풍산국민학교' 중에서)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속앓이를 한 세월만 해도 서너 달. 준기와 친한 친구들은 준기가 명지를 마음에 두고 짝사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준기는 담임인 내게도 슬쩍 그런 속마음을 드러냈다. 친구들은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해 보라고 조언했지만 준기는 그럴 숫기가 없었다. 명지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쿵, 멈추는 것 같은데 고백이라니.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고 계집애/고 계집애는 실처럼 자꾸" 준기를 "휘감아왔다".

그렇게 두어 달이 더 지난 어느 날. 준기가 사랑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고백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두근거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연이라니? 사정을 알아보니 이랬다.

준기의 속앓이를 보다 못한 친구들의 강력한 부추김에 용기를 내어 3교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명지에게 고백을 했단다.

"명지야! 나, 너 좋아해. 나랑 사귈래?"

단도직입! 짧았지만 온 마음을 담은 진심어린 표현이었다. 명지의 대답도 분명하고 또렷했다. 짧았으며 단호했다.

"난, 너, 싫어!"

명지의 대답이 준기의 머릿속에서 벼락처럼 번쩍이더니 메아리가 되어 막 울렸다고 했다. '싫어! 싫~어~! 싫~어~어!~~~'라고. 그 순간 준기는 잠깐이나마 자신의 고백을 무참하게 만든 명지의 그토록 예뻐보이던 덧니를 몽땅 뽑아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준기의 고백은 무너졌다. 겨우, 3초 만에, 그 엄청난 일이, 훅 날아갔다.

그 후로도 명지의 마음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준기의 '3초 고백' 사건은 한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었다. 숯가마에서 굽는 삼겹살도 아닌데 3초만에 홀랑 타버린 준기의 고백.

그날 이후 준기는 명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우울해했다. 여전히 명지의 그림자가 실처럼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 모습 그대로 유유자적. 아, 삼겹살보다 못한 고백의 애처로움이여, 열 다섯 살 무정한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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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규와 송이 산에는 때죽나무가 하얀 꽃을 종처럼 댕그렁댕그렁 달고 있었다. 그 아래에 후두둑 떨어진 작은 종들은 축복처럼 은은한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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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②] 때죽나무 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 사랑도 떠났다

동규는 새 봄 새 학기를 맞으면서 같은 반이 된 송이랑 사귀기로 했다. 동규는 키도 크고 인물도 잘 생긴 편이어서 여학생들에게 워낙 인기가 높았다.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나자 송이는 다른 여학생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쉬는 시간에도 둘이는 꼭 붙어있으면서 애정행각을 벌여 친구들의 원성을 사는 일도 많았다. 다행히(?) 선생님들한테 둘의 애정 행각이 걸린 적은 아직 없었다.

5월 어느 날, 담임선생님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동네 산에 가는 날이었다. 동규와 송이도 따라 나섰다. 산의 입구부터 둘이는 꼭 붙어서 걸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등산로에 나뭇가지가 가로놓여 있으면 동규가 그걸 치워주기도 했다. 동규가 무어라고 속삭이면 송이가 웃음소리를 하늘로 피워 올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긴 했지만 웃음소리는 맑고 크게 번졌다. 움트기 시작한 숲의 새잎들이 환해졌다. 동행한 친구들은 그런 둘을 무심한 듯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산에는 때죽나무가 하얀 꽃을 종처럼 댕그렁댕그렁 달고 있었다. 그 아래에 후드득 떨어진 작은 종들은 축복처럼 은은한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동규와 송이의 사랑은 그 날 이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성격 차이'로 헤어지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동규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커플링까지 손가락에 나눠 끼고 새로운 애정 행각을 펼치기 시작했다. 송이는 나홀로의 삶을 만끽하며 독야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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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의 흔적 운동장 스탠드(위)에도 전봇대(아래)에도 중딩들의 연애는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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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③] 700일 넘어 헤어진 이유? "너무 지쳐서요"

현이(여)와 빈이(남)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눈이 맞았다. 서로 반은 달랐지만 100미터도 넘는 일자형 복도에서 스치듯 마주친 이후 첫 눈에 반했다. 쉬는 시간이면 서로를 찾아다니며  붙어있기를 3년째. 9학급이나 되는 같은 학년 모든 아이들이 둘의 사랑을 공인한 것은 물론 선생님들도 둘이 사귄다는 건 내놓고 알고 있었다. 애정행각을 금지한 학교 규칙에 한 번도 걸리지 않으면서 현이와 빈이는 그렇게 알콩달콩 사랑의 배터리를 빵빵하게 충전해 가고 있었다.

현이와 빈이가 사귄 지 700일 하고도 수십 일이 지난 어느 날. 3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의 첫 화요일. 빈이가 현이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우리 이제 그만 사귀자."
"왜?"
"그냥 ..."
"……."

둘은 그렇게 새봄맞이 이별을 했다. 현이는 빈이의 갑작스러운 통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700일 넘게 사귀면서 둘이 싸우고 화해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헤어지자니, 일방적인 이별 통보라니!

시간이 얼마쯤 더 흐른 후 나는 빈이에게 슬쩍 물어봤다. 왜 헤어지자 했느냐고. 빈이가 대답했다.

"700일 넘으니까 너무 지쳐서요."

하루하루의 고단한 삶도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사랑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때가 종종 있다. 어른들만 느끼거나 체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열 다섯 살들도 사랑에 지칠 때가 있다. 사랑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사람'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그러하듯 중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사귀고 헤어지는 일은 흔하다(고딩이라고 해서 별반 다른 건 아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사귀는 일도 종종 있다. 구관이 명관 아니 옛사랑이 내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나 뭐라나. 본인들도 그걸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친구들도 헤어졌다 재결합하는 걸 비난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도 사랑의 이동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다. 어른들 눈에는 한없이 볼 품 없고 유치하겠지만 분명, 중딩도 사랑을 한다!  왜냐고? 사랑은 죄가 아니므로. 학교 규정이라는 이름의 온갖 징계의 장벽과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란듯이. 멀고 먼 옛날 옛적, 이팔청춘 이몽룡과 성춘향이 애틋했듯 로미오와 줄리엣이 격렬했듯.

* 덧붙임 : 700일을 넘기며 지쳤다고 사랑 중단을 선언했던 현이와 빈이는 잠깐 쉬면서 기운을 차렸는지 다시 시작해서 1000일을 넘겼다. 발칙하게도!

○ 편집ㅣ최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