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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15년차 CCM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박요한씨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한 달이 안 돼 난임가정에 입양되어 자란 성인입양인이다. 대개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인터뷰를 꺼리고 입양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기 거북해 한다. 과거 비밀입양이 대세였던 시절을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그들의 몸에 배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요한씨와의 인터뷰는 과정은 어려웠으나 정작 그의 존재를 알고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는 흔쾌했다. 그에게 입양은 더 이상 상처나 아픔은 아니었다. 지나온 그의 삶이 순탄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순탄하지 못했던 삶들을 그는 남은 인생의 긍정성으로 바꾸어냈다. 거기에는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여준, 그를 길러주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끈질긴 인내의 힘이 있었다.

앞서 소개한 박요한씨 인터뷰 1부 기사(친자식도 아닌데... 의사도 깜짝 놀란 검사결과)는 뜻하지 않게 알게 된 입양사실에 상처받고 방황하던 시절과 그런 그를 무작정 기다려준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기사를 읽었고 그의 고백이 사람들의 가슴에 공명했다. 여기 그의 남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 기자 말

기독교음악(CCM) 가수 박요한
 기독교음악(CCM) 가수 박요한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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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은 자식도 아닌 입양한 박요한씨의 신장이 어머니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 일단 정말 신기했고, 다음은 정말 감사했다. 어머니에게 신장을 떼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랬고, 항상 죄스런 마음만을 지니고 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이 기적처럼 이제 겨우 아들 노릇 한번 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렇게 수술 날짜가 잡혔다. 그랬는데….

병원에서 난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어머니는 죽으면 죽었지 아들의 신장을 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단박에 수술을 거부했다. 그리고 끝까지 거부했다.

아들 신장 거부한 어머니, 결국... "아직 어머니 사진첩을 못 열어봐요"

- 강제로는 수술을 할 수 없었나요?
"없죠. 본인이 분명하게 의사를 밝히는 상황에서는…. 너무 힘들었죠. 이건 설득의 상황을 넘어서 화도 나고 그럴 정도였으니까요."

- 그래서… 그렇게 수술이 안 돼서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병원 투석기에 의존하면서 사시다가 얼마 못 가서… 2003년 9월에 돌아가셨어요. 그때가 겨우 오십 대 후반이셨어요."(박요한씨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 많이 비통하셨겠네요?
"너무 너무 말로 다 할 수 없죠. 제가 가수를 시작할 때 히트곡이 있는 팀으로 들어갔어요. 혼성그룹이어서 저는 고생 안 하고 자리를 잘 잡은 케이스거든요. 그래 이제 어머니한테 효도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정말…. 어머니와 나이가 같았던 아버지도 너무 힘들어 하셨고."

- 어머니 돌아가시고 언제까지 그렇게 힘드셨어요?
"저는요. 지금도 아직 어머니 사진첩을… 아직도 못 열어봐요. 지금도 막 너무 힘들어서 그 정도로 아직까지 제가 어머니만 생각하면…."(침통한 표정, 눈가에 또 물기가 비쳤다. 잠시 사이를 두고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 그럼 지금도 사진첩을 못 열어보는 이유가…?
"저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은 거죠. 그냥 그거예요. 저 때문에 어머니 병이 악화된 것도 맞고요. 그러니까 도저히 제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 가슴 속에는 어머님이 항상 아련하게 남아 있겠네요?
"그럼요. 그리고 더군다나 지금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더 많이 느끼죠. 순간순간. 문득문득. 저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결혼식 때 보통 울면 신부들이 많이 울잖아요. 저는 그때 눈물 참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어머니 생각에. 결혼사진 속에 제 표정을 보면 울지 않으려고 입을 앙다문 모습이 보여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 역사에 가정은 없고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지만, 만약에 본인이 입양사실을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기도 하나요?
"당시에는 시대가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 저라면 당연히 공개입양을 했겠죠. 저는 그게 옳다고 보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분명하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정확해요. 제 경험도 그렇고."

"어머니라 못 부르겠던 마음 어디 가고... 제일 먼저 나온 말 '엄마'"

- 한창 방황하던 시절에는 생모나 생부에 대해서 분노의 감정만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방황이 끝나고 나서는 문득문득 궁금증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찾아보려고 안 하셨어요?
"사실은 생모를 찾았어요. 한 2년 되네요."

- 궁금해서 직접 찾으신 거예요?
"제가 실은 우연한 기회에 출판을 하시는 분을 알게 되면서 제 이야기를 담은 책(<요한의 고백> 지혜의샘 펴냄, 2013년)을 냈어요. 그 책 원고를 써야 하는데 막막하잖아요. 전문 작가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입양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하다가 중앙입양원이란 곳을 알게 됐고요. 거기 홈페이지를 보니까 '뿌리 찾기'라는 게 있더라고요. 전화를 했더니 신분확인을 하고 나서는 바로 알려주더라고요. 홀트에서 입양되었다면서 담당자 전화번호까지.

통화를 했죠. 2년 전이니까 제가 서른여덟 살 때예요. 긴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너무 감사하게도 자료가 깨끗하게 잘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입양 갈 때 기록들을 봤죠. 위탁 가정에 잠시 맡겨졌던 것도 알았고. 생모와 생모 어머니가 함께 기관으로 온 것도 알았고요.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담당자가 자료를 정리하다가 서류 한쪽 귀퉁이에서 전화번호를 보게 돼요. 나중에 알았는데 4, 5년 전에 생모가 제가 너무 궁금해서 홀트를 찾았다가 본인 허락 없이 (연락이) 안 되는 걸 알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남겨 놓은 거였어요. 담당자가 전화를 했더니 생모가 받은 거죠. 저에게 만날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럼요. 당연하죠.' 얘기를 했죠."

- 만나기 전에 자료를 보고는 어떤 분노나 그런 건 못 느꼈나요?
"그때는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라 꼭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생모를 만나면 꼭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만나면 '왜 나를 버렸냐'는 질문부터 한대요. 근데 저는 그게 아니라 어머니를 용서해 드리고 싶었어요. 청소년 시절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부모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생모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죄책감에 평생을 힘들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용서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거예요."

- 그래서 어디서 만났어요?
"홀트에서. 거기 5층에서 만났어요.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내가 38년 만에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고, 그때 심정으로는 아들인데도 어머니라고 못 부르겠는 거예요. 또 그래도 손이라도 잡아드려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지 아무것도 자신이 없는 거예요. 도착해서 올라가기 전에 한참을 망설이며 기도하고 용기를 내서 올라갔죠."

- 생모가 먼저 와 계셨나요?
"먼저 도착하셨더라고요. 담당자 만나서 울면서 기다리신 것 같아요.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제가 참 신기한 게요, 어머니라고 못 부르겠던 그런 마음이 어디 가고 제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이 글쎄 어머니도 아니고 '엄마'였어요. 그러면서 안았죠. 안아드리면서 말했어요. 엄마한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만나자고 했다고, 엄마를 용서하고 싶다고. 그러고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죠.

어휴, 근데 그게 저도 쉬운 건 아니었어요.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이 떠오르는 거예요. 하지만 용서라는 말을 하고 나니까 정말 그런 마음이 가슴에 새겨지는 거죠."

- 생모를 아니, 엄마를 만나셨으니 요한씨 탄생의 배경을 다 알 수 있었겠네요?
"생부는 동네 오빠였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였고 둘이 사귀었는데 실수로 임신을 한 거죠. 그런데 할머니가 너무 엄하신 분이셨나 봐요. 엄마가 무서워서 아무한테도 말도 못하고 혼자 숨기고 지냈대요. 생부한테조차 말도 못했나 봐요.

어리니까 산달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갑자기 들통이 나고 난리가 난 거죠. 병원에서 저를 낳자마자 그 엄하신 할머니가 젖도 한 번 못 물리게 하고 하루 뒤에 저를 기관에 보내 버린 거죠. 생부는 그 뒤로도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사시다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아마 저의 존재도 알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좋아요. 엄마가 정말 좋고,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 그간 어머님은 어떻게 지내셨다고 그래요?
"한참 뒤에 결혼도 하고 아들도 하나 낳고 사시다가 이혼하시고, 지금은 혼자 일하면서 사세요. 저에게는 뒤늦게 남동생도 하나 생긴 셈이죠. 결혼 생활이 힘드셨던 것 같아요."

- 어머니 연세는… 새로 생긴 남동생은 몇 살이고요?
"어머니가 오십 대 후반이세요. 동생은 삼십 대 초반이에요. 동생은 디자인 쪽으로 열심히 살고 있어요. 저하고도 사이가 정말 좋아요."

- 홀트에서 생모를 처음 만난 뒤로 정기적으로 계속 만나시나요?
"정기적은 아니지만 일 년에 몇 번씩은 봬요. 가끔이긴 하지만요. 카톡은 자주 하고."

- 생모의 삶은 경제적으로나 모든 부분에서 평범하신가요?
"평범하다고는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으세요. 제가 아들로서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한다는 마음은 있는데, 자식이 많은 저로서는 그럴 상황이 안 되고…. 하지만 어머니랑 저랑은 참 신기하게, 애착관계는 그렇게 깊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정말 편안한 사이예요. 어머니가 성격이 저처럼 밝고 긍정적이고 또 '쿨'하세요. '아들로서 네가 엄마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냥 이렇게만 행복하게 살자 하시고요."

- 명절 때도 찾아 가시나요?
"음… 저도 가정을 이루고 살기 때문에 아내랑 다 같이 움직여서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아내에게는 또 다른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갑자기 시어머니가 생긴 거잖아요."

- 제가 상상할 때는 뭐랄까요, '내 살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느낌도 들 것 같거든요?
"아니, 저는 그냥 좋아요. 엄마가 정말 좋고,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좋고요. 자주는 못 봐도 안부 문자 서로 보낼 때도 정말 좋고 그래요."

CCM(기독교음악) 가수 박요한
 CCM(기독교음악) 가수 박요한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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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박요한씨와 비슷한 분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분은 생모를 엄마라고 못 부르겠대요. '그 사람' 이렇게 표현해요. 자기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살아 계세요. '그 사람'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자기를 키워준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배신감이 들 것 같아서 절대 그렇게 부를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분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제가 홀트 담당자 분한테 사례들을 들었는데 대개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 본인이 그렇지 않은 건, 어쨌든 신앙의 힘인가요?
"그렇죠. 그리고 제가 그랬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는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싶어요."

-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나거나 그러진 않나요?
"사실 돌아가진 어머님에 대한 아련함은 항상 죄스러운 거죠. 잘해주지 못한 죄송한 마음. 제가 처음 생모를 찾게 되는 과정에서도 '우리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보시면 배신감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어요. 근데 생모도 평생 동안 저에 대한 죄책감과 고통으로 사신 분인데 내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많이 도와드려야겠다는 그런 마음인 거죠. 생모는 지금도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엄마가 아들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러지 말라고 하죠."

- 혹시 주위에서 다른 입양사례를 본 적이 있나요?
"저와 비슷한 경우는 아닌데 제가 '아, 이게 맞구나 맞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던 게, 제가 좋아하는 누나가 있어요. 저와 같은 기독교 음악을 하는 가수예요. 자녀를 두 명 입양해서 키우는데, 공개입양을 했어요.

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됐을 때 '엄마가 너한테 얘기해 줄게 있어' 이러면서 계속 얘기를 해주는 거예요. '엄마가 배로 낳지 않았지만 너는 엄마 아이고 나는 네 엄마'라고. 아이는 알아요. 결국 아이가 경험하고 느끼는 거는 함께 살면서 보여주는 엄마의 사랑인 거죠. '나는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엄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구나', 그거를 매일 겪으면서 자라니까 아이들이 정말 건강하게 잘 자라는 거예요."

박요한씨 인생에 '가짜' 엄마아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느껴지는 분위기와 공기 심지어 냄새까지도 제각각이다. 누구든 그 사람만이 지니면서 바깥으로 뿜어내는 고유한 향기가 있는 법이다. 박요한씨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명랑하고 밝았다. 본인이 지니고 있는 그 곡절 많고 사연 많은 인생사들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태도와 음성은 긍정적이었다.

똑같은 어려운 일을 경험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비관이 되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낙관이 된다. 지금의 그를 설명하려면 수많은 요인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처럼 밝고 긍정적인 그를 설명하기 위해 빠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그가 어떤 지경이든 어떤 상황이든 혹은 어떤 행동을 보이든 결국엔 그가 돌아올 것을 철석같이 믿고 고통의 침묵으로 그를 기다려준,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침묵을 묵묵히 함께 지켜준 아버지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믿음은 옳았다.

25년 전, 박요한씨가 입양된 자식이라는, '형 엄마아빠가 진짜가 아니'라는 비밀을 힘겹게 털어놓은 사촌동생의 말은 사실이지만 틀린 말이다. 마흔 살 박요한씨의 인생 안에 '가짜' 엄마아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입양, #공개입양, #비밀입양, #성인입양인, #박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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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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