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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의 첫 일정은 '보르게세 미술관'이었습니다. 생애 첫 여행을 이탈리아로 잡은 것도 꿈만 같았는데, 그 첫 일정이 '보르게세 미술관'이라는 사실에 오랜 비행의 피곤함도 잊고 로마에서의 첫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우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 여행 일정을 짤 때부터 보르게세 미술관을 첫 일정으로 잡아 놓고는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설렘이 너무 컸던 탓에 커피와 빵, 간단한 과일로 이루어진, 낯선 호텔 조식도 맛있게 먹고 길을 나섰습니다.

로마의 4대 성전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이곳에서 처음으로 로마의 버스를 탔습니다.
▲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로마의 4대 성전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이곳에서 처음으로 로마의 버스를 탔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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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의 첫 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상쾌하더군요. '보르게세 미술관'까지는 호텔 근방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버스타기'도 나에겐 첫 경험이었습니다. 구글 맵을 통해 미리 알아 두었던 버스 정류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버스 티켓 판매소가 보이지 않더군요. 여기 저기를 두리번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할머니 한 분께 짧은 영어로 물어보니 길 건너 타바키를 가리키십니다. 타바키는 '담배가게'란 말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간이슈퍼나 편의점쯤 되는 곳입니다.

버스 티켓 2장을 사고 생수도 한 병 샀습니다. 말하자면 이탈리아에서의 첫 쇼핑인 셈입니다. ​이어서 두근거리는 첫 버스 승차도, 중요하다던 티켓 각인도 실수없이 치렀습니다. 그런데, 시골 사람 서울 구경이 그랬을까요? 불과 15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버스를 타고 내리는 로마인들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부끄러움도 모르고 빤히 바라보았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의 정면, 이탈리아 여행 중 첫번째 일정입니다.
▲ 보르게세 미술관 보르게세 미술관의 정면, 이탈리아 여행 중 첫번째 일정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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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도착한 '보르게세 미술관'.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미리 한국에서 예매를 해 두었기 때문에 티켓 교환만 하고 쉽게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첫 이탈리아가 시작됐습니다.

보르게세 공원 안에 자리잡은 보르게세 미술관은 17세기 초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주도로 만들어진 건물로 처음에는 보르게세 가문의 별궁으로 사용됐습니다. 19세기 후반 가문이 파산하자 이탈리아 정부가 공원과 미술관, 예술 작품을 몽땅 사들여서 오늘날의 보르게세 미술관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 곳 보르게세 미술관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사춘기 시절의 내 그리움 속에는 이 곳 보르게세 미술관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읽은 범우사판 토마스 불빈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는 흑백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그림과 사진으로 그 중에는 '아폴론과 다프네'의 조각상도 있었습니다. 아폴론의 치명적 사랑을 거부하다가 결국은 나무로 변해 가는 요정 다프네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조각 작품.

그런데 이번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바로 그 '아폴론과 다프네'가 베르니니의 작품이고, 이 곳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실제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 추억 속의 작품을 이번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목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바로 그 가슴 설레는 장소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또 온몸이 떨리더군요. 물품 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 전시실로 향하는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곧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작품은 베르니니의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였습니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사실적인 표정, 실물보다 더 실물같은 하데스의 근육과 탱탱하게 살아있는 페르세포네의 피부, 억센 하데스의 손가락에 눌려진 페르세포네의 부드러운 허벅지... 그것은 오래 전 서양미술사 공부를 하던 시절, 화보로만 봐 왔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베르니니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베르니니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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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며 우두망찰하는 나를 깨운 건 다름 아닌 카메라 셔터 소리였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많지 않은 관람객들, 그들 대부분은 손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작품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가까이 있는 직원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 보았더니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순간 나는 낭패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순진하게도 당연히 사진을 찍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카메라까지 물품 보관소에 맡기고 왔으니까요.

손에 든 것이라고는 자료들을 정리해 놓은 아이패드뿐. 어쩔 수 없이 아이패드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물품보관소로 돌아가 카메라를 가져왔어도 별 문제 없었을 텐데... 그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어쨌든 저 위대한 작품을 그렇게 아쉽고 아쉽게 아이패드의 절망적 화질로만 담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나는 다시 다음 작품을 보며 사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카라바조였습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목을 벤 다비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 골리앗의 목을 벤 다비드 카라바조 '골리앗의 목을 벤 다비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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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성모자와 성안나'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노파의 모습을 한 성 안나, 노출이 많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아기가 아님에도 누드 상태로 있는 예수. 이 그림으로 카라바조는 수많은 질타를 받게 됩니다.)
▲ 성모자와 성안나 카라바조 '성모자와 성안나'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노파의 모습을 한 성 안나, 노출이 많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아기가 아님에도 누드 상태로 있는 예수. 이 그림으로 카라바조는 수많은 질타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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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의 목을 벤 다비드'를 비롯해 '성 세례 요한'과 '성모자와 성 안나'가 함께 있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인물들. 숨이 막혀 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카라바조 특유의 기법이나 미술사적 위상, 도상의 의미 같은 것들을 떠올리는 것은 정말 의미없었습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작품들... 그것은 어쩌면 행복하게 숨 막히는 갑갑함 같은 것이었습니다. 분명 눈 앞에 나타난 현실인데, 실감이란 걸 할 수 없는, 마치 내가 책 속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베르니니 '다비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적장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던지기 위해 몸을 뒤튼 다비드의 모습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의 속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르니니는 훨씬 더 역동적인 모습으로 이미 신화화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오마주한 것입니다.)
▲ 다비드 베르니니 '다비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적장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던지기 위해 몸을 뒤튼 다비드의 모습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의 속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르니니는 훨씬 더 역동적인 모습으로 이미 신화화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오마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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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르니니가 눈 앞에 밀려들어 옵니다. 입을 꽉 다문 의지적이고 역동적인 '다비드'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두고 그리워한 바로 그 작품, '아폴론과 다프네'가 나타났습니다.

마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낡은 흑백 사진 속의 그들이 이토록 생생한 아름다움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나뭇잎과 가지로 변해 가는 다프네의 손은 신비롭기까지 했습니다. 베르니니는 어쩌면 저렇게 신화 속 세상을 아름다운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어느새 내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제 사춘기 시절, 그리움의 대상을 오랜 시간이 지나 이곳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만났습니다.)
▲ 아폴론과 다프네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제 사춘기 시절, 그리움의 대상을 오랜 시간이 지나 이곳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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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 아폴론과 다프네 2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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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프롤로그에 썼던 티치아노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도상의 의미들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라파엘로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라파엘로의 그림 중 가장 슬픈 그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나는 오랫동안 그림 앞 자리에 앉아 성모 마리아와 막달레나 마리아의 슬픔을 전해 들었습니다.

티치아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티치아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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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아이패드 사진)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라파엘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아이패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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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쩔 줄 모르는 감동들을 안은 채 보르게세 미술관을 나오니 로마의 하늘이 눈이 부십니다. 초겨울의 이탈리아는 궂은 날이 많다고 했는데 나의 첫 이탈리아는 이토록 푸른 하늘을 보여줍니다.

천천히 보르게세 공원을 걷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호흡합니다. 나는 그제서야 알 것 같았습니다. 아! 로마는, 아니 이탈리아는 모든 것이 조금씩 채워져 오는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처음부터 넘쳐 버리고 무장해제를 시켜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발걸음은 이제 '스페인광장'으로 향합니다. 오드리 헵번을 만나러 갑니다.

로마 보르게세 공원. 보르게세 미술관을 나와 이 공원을 가로질러 스페인 계단으로 갑니다.
▲ 보르게세 공원 로마 보르게세 공원. 보르게세 미술관을 나와 이 공원을 가로질러 스페인 계단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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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2014년 12월5일부터 2015년 1월4일까지 한 달간 이탈리아 미술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이탈리아, #미술기행, #로마, #보르게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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