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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전 회장이 생전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한 억울함을 호소한 모친의 19주기 추도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 모친의 19주기 추도예배에 참석한 성완종 전 회장 성완종(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전 회장이 생전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한 억울함을 호소한 모친의 19주기 추도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 서산장학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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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지금 저와 저희 회사는 또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한 의혹제기로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회사는 사업추진에 한 치의 부정과 의혹이 없습니다. 저는 당당히 결백함을 밝혀낼 것입니다."

자원외교 비리 의혹 수사를 받던 성완종(63)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9일 오후 3시 22분쯤 서울 북한산에서 숨진 채 발견된 가운데 성 전 회장이 지난달 21일 충남 서산시 음암면 소재 선영에서 열린 모친의 19주기 추모예배에서 한 추도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최근까지 진행된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한 의혹과 관련해 모친 무덤 앞에서 한치의 부정과 의혹이 없다며 억울함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 전 회장은 "철부지 어린 시절에도 고난을 이겨냈듯이 지금의 어려움도 반드시 이겨내도록 하겠다"라고 강한 의지도 내비쳤다.

이같은 내용이 포함된 성 전 회장의 추도사는 지난달 21일 성 전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재)서산장학재단이 보도자료를 통해 배포됐다. 하지만, 당일 곧바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며 보도를 자제해 줄 것을 통보해 오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의 추도사에는 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모친의 유훈을 기리며 모친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본인이 자수성가하게 된 과정, 서산장학재단 설립 및 장학금 지원, 그리고 제19대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과 국가를 위해 기여한 일과 마지막으로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한 비리의혹이 사실무근이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한편, "어머니 묘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진 성 전 회장의 시신은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10일 오전 9시 5분에 서산의료원(백합1실)으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다음은 성완종 전 회장이 모친의 19주기 추모예배에서 한 추도사 전문이다.

어머님,
사랑하는 어머님,
저희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9년 되는 오늘, 그리운 그 이름 다시 한 번 불러 봅니다.

해마다 3월이면, 그 어느 때보다 사무치게 어머님이 보고 싶습니다.
엄동설한에 철부지 4형제를 버리고 정든 집을 떠나야 했던 당신.
고향을 뒤로 하고 낯설고 물 설은 타향 객지로 품을 팔러 가실 때, 어머님 마음은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까요.

1951년 창녕성씨 종갓집 4형제 맏이로 태어나, 부모님 사랑을 받으며 꿈을 키워야 할 제 유년시절은 그날 이후 혹독한 시련으로 점철됐습니다.
어머님이 집을 떠나시는 순간 우리의 작은 행복도 끝나, 저나 제 동생들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시작됐습니다.
"엄마는 먼 곳으로 돈 벌러 간다. 완종아, 넌 동생들 데리고 아버지한테 돌아가라.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올게."
우리 형제를 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님이 하셨던 서러운 이별의 말씀들이 지금도 한 마디, 한 마디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외할머니 댁을 찾아 갔다가, 우연히 어머님의 거처를 알게 됐고, 외삼촌이 차비 하라며 주셨던 돈을 노자 삼아, 홍성에서 영등포행 완행열차에 올랐던 기억은, 세월이 갈수록 왜 더 선명해질까요?

십여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님 거처가 적힌 쪽지 한 장 들고 무작정 상경했던 날,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서 만난 고마운 분들의 얼굴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떠오릅니다. 영등포역 앞에서 만나  집 앞까지 데려다준 박씨라 불린 곰보아저씨, 꼭 다시 찾아뵙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5가 107번지.

그해 늦가을, 커다란 집 대문 초인종을 누르자, 넝마주이나 다름없는 옷차림에 씻지도 못한 제 몰골을 보자마자, 어머님은 쓰러질 듯 놀라시며 또 다시 눈물을 흘리셨지요.

어머님과 눈물의 재회도 잠깐, 장남이자 가장인 저는 굳은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식구가 같이 살집을 구할 때까지 내려가지 않겠다. 하늘 아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만, 드넓은 서울에서 반드시 성공하리라.'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신문을 돌렸습니다.
약국으로 출근하여 문을 열고, 약 배달을 했습니다.
틈틈이 폐지도 모아 팔았습니다.
저녁이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야간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6년을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향에 작은 집과 논 세마지기를 마련했습니다.
스물두 살이던 그해,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6년 만에 동생 3형제와 기적 같은 상봉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와서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저의 고된 나날은 끝날 줄 몰랐습니다.
논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공사장 등짐도 졌습니다.
그러다 첫 사업으로 화물차 영업소를 차려 화물차 1대로 영업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업을 접고 대신 뛰어든 것이 지금까지 제 필생의 사업이 된 건설입니다.  

세상의 온갖 역경이 저에게 닥쳐왔습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가 지켜야 할 어머님과 동생들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맏이로서의 의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연속이었던 6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제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을 이겨낸 의지와 열정은 오늘의 성완종을 만든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떼어 놓고 호랑이고개를 넘어 가시기 전, 저희들에게 인절미를 먹여 주시던 어머님 심정을 되새겨 봅니다. 
어머님을 쫓아가며 애타게 부르는 제 목소리를 들으며 호랑이고개를 넘어 가시는 발걸음은 그야말로 눈물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보면, 해 뜨기 직전 바라보았던 새벽빛은 저를 고향이라는 우물에서 서울이라는, 대한민국이라는, 나아가 세계라는 신천지로 인도한 도전과 도약의 디딤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동안 저희 가족이 살아오는 과정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 은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성완종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은 바로 어머님, 고 윤도순 여사입니다.
어머님은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 그대로 평생을 살다 가셨습니다.
시골교회 새벽종을 25년 동안 치시며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고아들을 돌보며 배고픈 이들을 위해 곳간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990년에 제가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한 것도 이러한 교훈을 실천하고자 하는 뜻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 재단은 300억 원의 기금을 마련해 해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5년간 약 2만5천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고, 이제는 해외로도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참전국인 에티오피아 대학생들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2007년부터 200명의 대학생들에게 매년 5만 달러씩의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태국 방콕의 잠롱 시장이 운영하는 리더십스쿨 건립을 위해 93년부터 매년 5만불씩 기금을 지원했습니다. 지난해 12월에는 베트남 하노이 국립사회과학대학교 및 백화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매년 지급하기로 협약식을 체결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재단 운영 경험을 살려 재단 설립 30주년이 되는 2020년에는 장학사업, 학술·교육사업, 문화사업, 사회복지사업을 더욱 발전시켜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학재단으로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제가 19대 총선에 출마한 것도 지역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픈 마지막 꿈을 실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난 2012년 5월 국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래, 저는 오로지 서민을 위한 정치, 신뢰받는 정치를 실천하고자 힘써 왔다고 자부합니다. 
김영환씨 등 한국인 4명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가혹행위 의혹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 촉구 결의문'을 발의해 채택하였고, 우리 정부를 통해 중국 정부와 UN인권이사회에도 결의문을 전달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주목을 이끌어냈습니다.
또한 허베이스피리트호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해 통과시켰고, 관련 특위 활동을 통해 11개 시군 140만 지역주민들에게 삼성중공업으로부터 3천600억 원의 기금과 함께 IOPC 및 정부 보상금 5000억 원 등 총 8600억 원을 이끌어 냄으로써 지역 주민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린 점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마지막까지 헌신할 각오입니다. 이것이 어머님이 저에게 기대하시는 소명이라고 믿습니다.

어머님,
지금 저와 저희 회사는 또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한 의혹제기로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회사는 사업추진에 한 치의 부정과 의혹이 없습니다.
저는 당당히 결백함을 밝혀낼 것입니다.

어머님,
철부지 어린 시절에도 고난을 이겨냈듯이, 지금의 어려움도 반드시 이겨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역경을 주신 것도, 더 큰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며, 어머님의 가르침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당신은 여전히 저의 희망이요, 영원히 제 맘속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입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하나님 품에서 영면하소서.

2015년 3월 21일

고애자  성   완   종 올림


태그:#성완종, #서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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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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