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도쿄 신주쿠에 <타이니 앨리스>라는 소극장이 있다. 일본 연극 평론계의 대모 격인 니시무라 히로코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30년간 우리나라 연극관계자들을 초청해 일본 관객과 한국 연극과의 만남을 주선한 곳이다. 이를테면 지금 유행하는 한류 이전에 민간차원에서 진정한 문화교류를 일구어온 선진 한류의 첨병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3월 말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극단 골목길의 문제작 <만주전선>은 바로 그 <타이니 앨리스>에서 초청한 올해 마지막 한국 연극이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보는 법이다.

일본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과 화제를 모은 <만주전선>이 우리 연극계 최대잔치인 제36회 서울 연극제(4월 4일~5월 10일)에서 개막작에 선정되어 막을 올렸다.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지난 4일 앙코르 공연을 한 <만주전선>에는 일본에서 호흡을 맞춘 6명의 배우가 그대로 출연했다.

명작은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지 않는 법, 질량보존의 법칙보다 앞서는 이 진리는 영원했다. 감동은 일본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과연 희대의 걸작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무엇이어야 관객이 작품과 동격이 될 수 있을까?

최종 리허설을 끝낸 배우들
▲ 만주전선 최종 리허설을 끝낸 배우들
ⓒ 극단

관련사진보기


여기, 기하학적인 대답이 있다. 바로 1에서 9까지의 숫자 대신 마방진을 채운 성동격서(聲東擊西)와 호가호위(狐假虎威)! 가운데 한 칸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채운 이 여덟 글자가 빚어내는 감동과 전율의 창작극은 90분 동안 내내 보는 이를 시험에 들게 한다.

배우는 여섯 명에 지나지 않지만 교향곡과 같은 카리스마로 보는 이들을 유토피아로 유도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품새가 마치 무규칙 이종격투기의 지존 같다. 알고 보니 그 배후에 박근형이 있다. 연극으로 시를 쓰는 남자, 과연 정형화되지 않은 야인다운 연출이다.

1943년, 만주국 수도 신경(현재 중국의 장춘). 조선을 떠나온 의사 기무라의 자취방. 그와 알고 지내는 조선 출신의 젊은이들은 문학과 역사, 사랑을 토론하며 각자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나누면서 서로 의지하고 지낸다.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적인 꿈이 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만주국의 상류층 엘리트가 되어 평소 흠모하는 진짜 일본인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모임의 구심점인 아스카가 사모하는 요시에가 그만 불륜 상대인 시청 소속 과장의 아내로부터 구타를 당한다. 그 후 그들은 요시에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미래를 놓고 갑론을박하는데….

<만주전선>은 이처럼 우리 근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일제 식민지 치하 시절, 신분상승의 꿈을 안고 만주국으로 달려간 젊은이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극의 무대는 70년도 더 지난 과거인데 우리의 현실은 당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시간과 공간이 바뀌었을 뿐 동일한 세태의 재연 혹은 재현의 반복이다. 당혹스러운 이 말도 안 되는 역사의 쇠퇴를 웃음으로 유인해 묵직한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연출, 극작, 연기, 음악, 소품, 그 밖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이 연극이 수동적인 반응으로 유명한 일본 관객들에게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낸 이유다. 그만큼 다채롭다. 아니 그 이상으로 빛난다. 만주국 사관학교를 졸업한 아스카를 찬미하는 친구들의 표현대로 아리타의 도자기처럼!

90분이라는 공연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지만 관객들은 한결같이 롤러코스터를 탄 표정을 지으며 환희에 찬 채 자리를 뜬다. 정서상의 차이 때문에 일본공연에서 관객들의 웃음의 포인트가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희로애락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시도 때도 없이 호출당하기는 한국도 마찬가지, 감정을 의지대로 간수하기가 쉽지 않아서일 거다.

혼을 쏙 빼놓는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배우들의 열연은 이 뜨거운 반응에 힘입은 바가 크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일본공연에서와 다른 점은 배우들에게서 넉넉함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서울연극제 만주전선 공연 포스터
▲ 만주전선 서울연극제 만주전선 공연 포스터
ⓒ 극단

관련사진보기


이 극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개의 극 중 극이다. 모태신앙인인 나오미, 일명 마리아가 주동하는 극 중 극은 교회의 성극(聖劇) 구조를 차용한 것인데, 각각 요한복음 8장과 누가복음 5장을 희곡 갈매기와 결합해 연출자의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 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두 번째 극중극에서 슈바이처와 하나님마저 칼로 일어선 자 칼로 흥하리라는 신념을 지닌 아스카에 의해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아스카마저 자결하는 장면은 사실상 하늘의 심판을 대리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박근형식 고도의 계산이 깔렸다. 바로 발이 드리운 벽면에 슈바이처 박사와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이 나란히 걸린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관객들은 별다른 관심-일본 현지에서도 그랬지만-이 없지만 이 예사롭지 않은 미쟝센은 사실 그 자체로서 엄청난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인신(人神)으로 추앙받는 일왕과 아무리 저명하고 남다르다 해도 일개 의사에 지나지 않는 백인을 동격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당시 정서상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발상은 슈바이처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추축국인 독일 출신의 의사라고 해도 큰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다.

일본 현지에서 그 장면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우파적 성향을 지닌 자에 의해 객석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가 됐을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그만큼 박근형의 함축적 메시지가 배우들의 호연에 잘 묻힌 채 녹아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박근형은 여기서 많은 것들을 대변한다. 의인(醫人)으로서 그를 깊이 존경하는 신념에 사로잡힌 기무라는 출세를 위해 사랑의 배신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면서 충성스러운 일본의 신민을 꿈꾸는 복합적 세계관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조선인 엘리트로서의 이 상충하는 모순은 지금의 우리에게 웃음과 함께 눈물을 동시에 기쁨과 함께 슬픔을 조각한다. 문신과 같은 그 정처없는 부유(浮游)의 산물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정체성과 뿌리가 없는 근본 부재 말이다.

그런 그가 거침없이 일본도를 휘두르는, 된장 썩은 내에 진절머리내는 아스카의 칼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어떤 뉘앙스로 수습해야 할 것인가? 오족협화(五族協和)의 기치를 내건 일제에 의해 본토는 물론 조선과 만주국에서 신으로 추앙받은 히로히토가 모든 신민의 고름을 빨아내는 치유사로서 하늘과 같은 은혜를 베푸는 존재였음을 이해한다면 기무라의 천연덕스러운 역할은 그야말로 다중포석이 아닐 수가 없다. 聲東擊西와 狐假虎威가 마방진에서 서로 어떻게 맞물려 연출가의 진의를 파악하는 퍼즐로 이합집산을 거듭할 것인지는 철저하게 관객에게 달려 있다.

무대에서 최종 리허설을 끝내고 한 컷
▲ 만주전선 무대에서 최종 리허설을 끝내고 한 컷
ⓒ 극단

관련사진보기


강지은, 정세라, 권혁, 이봉련, 김은우, 김동원.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와 함께 극단 <골목길> 소속의 배우들로 이 작품이 만개하는데 큰 공을 세운 여섯 명의 국보급 존재들을 보면서 하나하나의 맨 파워에서 아우라와 함께 전율이 일어나는 경험은 비록 부차적인 것이었다 해도 실로 우리 연극계의 앞날을 위해서 엄청난 수확이었다. 일본처럼 연극이 쇠퇴해나가는 위기 속에서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기에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잡티 없는 깨끗한 음색으로 다중성을 과장 없이 드러낸 기무라 역의 권혁, 중반 이후 극 중 극의 성극을 주도하는 존재감을 과시한 나오미 역의 강지은, 세련된 커리어우먼으로서 화술의 절제미를 드러낸 요시에 역의 정세라 그리고 일치율 100%의 적재적소인 중심인물 아스카 역의 김은우, 약방에 감초가 있다면 <만주전선>에는 바로  게이코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각 인물 간의 연결고리를 능수능란하게 담당한 이봉련, 그리고 극 중 화자로서 시대를 초월해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 김동원. 역시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이다. 박근형 사단의 배우들은 일당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갑다. 정말로….

4대 비극을 쓴 셰익스피어가 살아서 지금 한국에 있다면 틀림없이 이 <만주전선>을 숨어서 관람했을 것이다. 그의 국제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에 우리가 없다는 것은 팥 없는 팥빵과 같은 것이어서 늘 허전했는데 그런 허기를 박근형은 아주 절묘한 때에 드라마틱하게 채워주었다. 겸손을 미덕 이전의 신조로 삼은 그의 평범한 일상에서 거장의 면모를 엿본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닌 이 극을 관람한 모든 관객의 공통점일 것이다.

연극으로 시를 쓰는 남자, 웃겼다 울렸다를 반복하면서도 억지로 그 무엇을 강요하지 않고 어느 순간 내면에 그 무엇이 북받쳐 오르는 섬세한 명장의 솜씨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이 걸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비루한 현실에 형형색색의 찬란한 희망과 내일을 수놓는 이 꿈과 같은 유희가 어쩌면 극 중 극과 같은, 우리 모두의 염원이 호출하는 미래가 아닐까 한다. 둔하고 탁한 펜 때문에 이쯤에서 작품의 문고리만 두드리고 물러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상의 것을 알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만주전선>으로 달려가기를 권한다. 그래야 북두칠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명: 연극 '만주전선'
작/연출: 박근형        
공연기간: 2015년 4월 4일 ~ 4월 15일      
공연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출연진: 강지은, 정세라, 권혁, 이봉련, 김은우, 김동원.
관람료: 일반 3만원, 학생 2만원 

덧붙이는 글 | 후아이엠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만주전선, #박근형, #일제시대, #타이니 앨리스, #서울연극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