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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소풍법
▲ 당신에게 실크로드 19 - 송쿨 유목민의 소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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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이 소풍가는 법

가족 소풍에 초대를 받았다. 송쿨호수로 가는 길. 시장에서 만난 부부는 자기들의 소풍장소에 잠깐 들렀다 가라고 권했다. 승용차 안을 보니 귀여운 아이 둘과 양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나쁠 것 같지 않아서 가겠노라고 대답하고 송쿨로 향했다.

차는 차도를 벗어나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는 걸 보니 아까 부부가 말한 소풍장소인가 보다. 작은 개울을 건너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소풍장소로 가자 일행은 20여 명으로 늘어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4남매 가족 모두, 그리고 이웃들까지 함께 소풍을 왔단다.

키르기스스탄 일가족의 행복한 소풍날.
▲ 유목민이 소풍하는 법 키르기스스탄 일가족의 행복한 소풍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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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자리에 껴서 튀긴 밀가루 과자와 홍차, 보드카, 샐러드 등을 대접받았다. 과자나 빵 등 마른 음식은 따로 접시를 두지 않고 비닐 돗자리 위에 두는 것이 키르기스스탄 스타일이다.

홍차에 필요한 물을 끓이는 사모바르에서 몽실몽실 연기가 피어난다. 중심에 가열부가 있어 숯을 넣을 수 있고, 물이 끓으면 아래쪽의 꼭지로 물을 따른다. 키르기스스탄 친구들은 늘 이 사모바르로 끓여 마시는 홍차가 더 맛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전통음악에 맞춰 어른들 앞에서 춤을 추고, 여자들은 공터 구석에 솥을 걸어두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낯선 여행객에 끊임없이 보드카를 권했다. 술이 약한 나는 일단 도망쳐서 요리하는 쪽으로 갔다.

바위에 솥을 걸고 양고기를 요리한다
▲ 점심 요리 바위에 솥을 걸고 양고기를 요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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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발견했다. 아까 봤던 귀여운 양.

지금은 식재료가 되어 자기 가죽을 접시 삼아 부위별로 놓여있었다. 머리는 가죽 옆에 눈을 감고 얌전히 놓여있고, 하얀 지방은 나무에 넓게 걸려있다. 아, 문화충격... 눈앞의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소풍에 애완양을 데려가는 다정한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애완양은 무슨... 그날 점심 도시락이었다. 애완양이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다. 도시민의 이 천진함이라니.

즉석에서 양 한마리 잡는 키르기스스탄 소풍법
▲ 아까 봤던 귀여운 양 즉석에서 양 한마리 잡는 키르기스스탄 소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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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어보니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양을 잘 잡는 남자가 인기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내게 멋있는 키르기스스탄 남편을 소개해주겠다며 중매에 나섰다. 멋있는 남편은 좋긴 한데... 하지만 이 멋진 남편이 양의 목을 치고, 내가 옆에서 내장과 지방을 분리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고기는 마트에서 곱게 포장된 것으로 사먹고 싶다. 그래도 그날 그곳에서 먹은 양 요리는 다 맛있었다.

70세 남편, 그리고 한 여인의 운명

늘 지금 시대에 태어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수세식 화장실을 쓸 수 있고, 페이스북으로 귀여운 동물 사진을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시대의 장점 중 하나다.

그러다보니 동서고금의 옛 이야기 속엔 항상 슬픈 신랑, 신부들 이야기가 항상 등장했다. 떠밀려서 결혼했더니 신부가 박색이라거나, 신랑이 제 구실을 못한다거나... 심지어 떠밀려서 결혼했더니 남편이 백발노인에, 말도 안 통하고, 씻을 물도 없고, 집도 없이 천막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기막힌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세군. 그녀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에 살았다.

키르기스스탄 일대는 오손이라고 불리던 나라에 속했다. 오손은 장건이 한무제의 명을 받고 동맹을 맺기 위해 찾은 나라다. 흉노가 트라우마였던 한무제는 오손과 화친을 맺기 위해 한의 공주를 오손에 보내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딸이 아닌 조카 유건의 딸을 오손에 시집보낸다. 강도지역의 제후였던 유건은 역모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그 딸은 의지할 곳 없이 한의 궁궐구석에서 지내던 터였다. 그 딸이 유세군이다.

우리에게 이 이름이 익숙한 이유는 훗날 그녀가 남긴 시 한 수 때문이다. 유명한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다.

吾家嫁我兮天一方 나의 집안은 나를 하늘 저편으로 시집보내니
遠託異國兮烏孫王 멀리 이국의 오손왕에게 맡겨졌네
窮廬爲室兮氈爲墻 둥근 천막으로 방을 삼고 양털로 담을 쌓고
以肉爲食兮酪爲奬 고기가 밥이 되고, 삭힌 젖을 마신다네
居常土思兮心內傷 늘 고향을 생각하며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차니
願爲黃鵠兮歸故鄕 한 마리 고니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기원전 105년. 당시 서역으로 떠났던 그녀 나이 스물 다섯 살이었다. 장안에서 꽃처럼 살던 아가씨가 졸지에 유목생활을 해야 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이미 식문화가 발달했던 한나라에 비해 유목국가인 오손은 주식이 양고기와 말젖을 발효시킨 시큼한 크므스다. 거기다 남편은 이미 거동조차 자유롭지 않은 고령이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썩어 문드러질 듯한 그녀의 심정이 느껴진다.

도로를 달리다보면 가판에 크므스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 크므스를 파는 여인 도로를 달리다보면 가판에 크므스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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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정략결혼으로 한은 흉노의 세력을 쫓아내고, 지금의 쿠처지역에 서역도호부를 두고 서역 50개국의 조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오손공주'는 정략결혼의 희생양을 뜻하는 사자성어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송쿨호수로 향하는 차는 해발 3000미터를 넘었다. 송쿨은 '하늘 아래 마지막 호수'라는 뜻이다. 이식쿨이 남미의 티티카카 호수 다음으로 큰 산정호수였는데, 송쿨은 티티카카 호수 다음으로 고지대에 있다고 한다. 며칠 전까지 이곳에는 눈이 왔단다. 이곳 사람들도 겨울에는 마을에 내려가고 여름에만 이곳에서 유목을 하는 반유목을 한다.

이제 차 고장은 놀랍지도 않다.
▲ 해발 3천미터 그리고 차 고장 이제 차 고장은 놀랍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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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개를 넘자 드넓은 호수와 초원이 펼쳐진다. 보기만 해도 이마가 쩡하고 울릴 정도로 맑고 차가운 물이다. 그리고 초원에 점점이 박힌 하얀 유르트. 유르트는 키르기즈 유목민이 사용하는 이동형 천막이다. 뼈대는 나무로 천막은 양털 펠트로 되어 있다. 이 유르트가 바로 유세군이 비파를 켜며 노래했던 "둥근 천막으로 방을 삼고 양털로 담을 쌓았네" 의 그 유르트다.

키르기스스탄의 이동형 전통 가옥
▲ 유르트 키르기스스탄의 이동형 전통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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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텡그리 숭배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 유르트 천장 태양신 텡그리 숭배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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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트 천장은 둥근 원안에 세 개 선이 교차된 창문으로 되어있다. 밤에는 펠트천으로 덮어두고 낮에는 열어둔다. 태양신인 텡그리 숭배사상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이 천장을 투인두익이라 하는데 키르기스스탄 국기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날 밤은 유르트에서 보내기로 했다.

송쿨, 보드카, 로맨틱, 성공적...

이식쿨 근방에서 벌레에 심하게 물렸다. 현지 사람들은 모기라고 하지만, 일단 주로 옷 안을 물렸다는 점에서 모기는 아닌 듯하다. 열을 지어 문 것으로 보아 벼룩 같지만, 인도에서 벼룩에 여러 번 당해봤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벼룩도 아닌 듯하다. 보통 벼룩에 물린 상처는 작고 가렵기만 한데, 이번엔 상처가 크게 부으면서 아프기까지 했다. 특히 발에는 물린 상처가 부어서 샌들이 안 들어갈 정도였다. 약국에서 약을 구해서 발라봤지만 듣지 않는다. 밤마다 온몸을 긁으며 잠을 못 자는 나날이었다.

하루는 식당에서 팔을 벅벅 긁으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데, 식당의 한 아가씨가 날 유심히 본다. 그러더니 작은 컵에 맑은 보드카를 한 잔 따라주었다. '한 잔 마시고 이 고통을 잊으라는 건가?' 싶어서 쳐다보니, 보드카를 휴지에 적셔 내 팔을 닦아준다.

아, 문화충격... 놀랍게도 보드카를 바른 부분이 시원해지면서 아픔이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내 가방엔 늘 보드카가 한 병 들어있었다.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모기인지 벼룩인지 미스터리 괴생명체와의 싸움은 보드카의 도움으로 이겨냈다. 그런데 송쿨에서 이 보드카의 도움을 한 번 더 받았다.

그날 저녁은 송쿨호수에서 잡은 신선한 물고기를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곧 발전기는 꺼졌다. 오후 9시밖에 안 됐지만, 일단 불이 꺼졌으니 자야 한다. 소녀들이 유르트에 와서 난로에 불을 붙여줬다. '곧 따뜻해지겠지'라고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라디오를 간이발전기에 연결하고, 음악을 듣는다
▲ 춤을 추는 송쿨호수의 아가씨들 라디오를 간이발전기에 연결하고, 음악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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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로는 생각과 달리 활활 타오르지 않았다. 불씨가 있긴 하지만 나무토막에 옮겨 붙지 않는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 쓴 가이드북을 찢어 난로에 밀어 넣었다. 그래도 불이 붙지는 않는다. 폴란드 여행객과 미국 여행객은 춥지만 버틸만 하다는 반응이다. 그들은 곧 코를 골며 잠들고, 나만 덜덜 떨면서 잠들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설상가상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유르트를 나서서 30미터 정도 떨어진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옆에는 소 두 마리가 까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조심조심 소를 피해 화장실에 앉았다. 어차피 밤이고 저 너른 초원이 다 화장실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막힌 공간이 좋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화장실 하나
▲ 초원의 화장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화장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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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키르기즈어로 별은 '줄드스'라고 한다. 하늘 가까이에서 보는 별은 충격적이었다. 그동안의 별은 까만 하늘에 점점이 박힌 2차원의 별이었다면, 이곳에서는 3차원이었다. 처음으로 별이 실존한다는 것을 느껴본 순간이었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별을 헤던 나는 다시 유르트로 들어갔다. 아직도 난로엔 불이 붙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문득, 가방 속에 있는 보드카가 떠올랐다. 보드카를 들고 호숫가로 갔다.

지금 이 곳에는 호수, 보드카, 그리고 나. 살면서 이런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태양은 사라졌지만 달빛으로 빛나는 하늘. 달빛 사이를 가로지르는 구름의 미묘한 색, 그리고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부터는 별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눈앞에 이 모든 빛을 품고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 호수가 있고, 호수 너머엔 산이 가만히 서 있다.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 -

일상적 삶이 사라진 공간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깊게 패여 일생 사라지지 않는다. 키르기스스탄 여행은 늘 이렇게 대자연과 민낯으로 마주하는 순간이 많았다. 나는 늘 작고, 대자연은 늘 숭고했다.

탁 트인 초원에서 말달리는 즐거움
▲ 송쿨호수에서 말타기 탁 트인 초원에서 말달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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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천 미터에서 바라보는 석양
▲ 송쿨호수의 석양 해발 3천 미터에서 바라보는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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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줄 모르는 보드카 때문에 목이 아파왔다. 대신 가슴은 뜨끈해졌다. 몸에 온기가 돌자 다시 잠을 자러 유르트로 갔다. 아침이 되자 간밤의 마법 같던 순간은 사라지고, 대신 값싼 보드카가 주는 숙취만 남았다. 해장으로 뜨거운 홍차에 앵두잼을 넣어 마셨다. 생각해보니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동안 보드카에게 두 번 빚졌다. 버물리 못지 않은 상비약으로, 그리고 숭고한 순간을 만나게 해준 마법의 음료로.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블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키르기스스탄, #송쿨호수, #보드카, #오손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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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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