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호러의 음산함을 아름다운 영상과 삶의 연속적인 우울함으로 그려낸 <악마의 키스>로 데뷔한 토니 스콧은 초기 다양한 장르로 형인 리들리 스콧과는 사뭇 다른 작가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리들리 스콧이 철학적 골재를 이용해 인간과 사회가 융화되며 드러나는 양면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토니 스콧은 좀 더 대중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그 대중성 안에서도 본인만의 개성을 돋보이도록 노력했는데, 매년 한 편씩 작품을 내놨던 1990년대 초반 그의 영화들은 감독 특유의 개성보다 영화 자체의 매력으로 사랑을 받았고 스콧 감독은 경지에 이른 대중 영화를 만들어내는 인물로 찬사를 얻었다. 즉, 그가 이뤄낸 가장 큰 영화적 공헌은 대중 영화를 소모품에서 '작품'으로 일궈낸 것이다.

 <폭풍의 질주>

<폭풍의 질주> ⓒ UIP 수입사


1990년대를 오픈하는 작품인 <폭풍의 질주 (1990)>가 내러티브를 생략하고 스피디한 비주얼로 승부하며 대중으로의 질주를 시작하는 첫 문을 열었다면, <크림슨 타이드 (1995)>는 대중영화 속에서의 작품성을 명확하게 피력한다. 국가 간의 대립으로 치부됐던 이데올로기라는 테마를 군 내부의 분립이라는 다소 위험한 상상력으로 끌어내 각본가 마이클 쉬퍼와 함께 난해한 작업을 시작했지만, 영화적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그저 킬링 타임용으로 영화를 보는 대중까지 몰입하며 감상할 수 있는 극도의 대중성을 선사했으면서도 파고들자면 한없이 완벽한 세트, 캐스팅, 연기로 <특전 유보트 (1981)> 이후 잠수함 소재 영화의 마스터피스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이제 감독으로도 자리를 확고히 한 셰인 블랙의 멋진 각본이 어우러진 <마지막 보이 스카웃 (1991)>이라는 계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로버트 드 니로, 웨슬리 스나입스와 함께한 <더 팬 (1996)>은 장르에 좀 더 깊숙이 침투한다. 야구에 미친 평범한 직장인이 결여된 사회성을 이유로 집단에서 쫓겨난 후 현실과 망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사이코 스릴러 장르를 이용해 스토킹 소재의 끔찍한 서스펜스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결국 집단에 묶여 있던 개인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 밖으로 나오지만, 오히려 망상과 피해 의식이라는 공간에 고립되는 현대인의 아이러니를 풍자한 영화로 그 가치를 더 크게 부여해야 할 것이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1998)> 또한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지금은 마음 먹고 누구 한 명 감시하자면 CCTV 하나만으로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만, 이 영화는 정부나 그와 연계된 사설 기관으로부터 감시당하는, 이른바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개인이라는 음모론 아닌 음모론을 첩보 장르를 빌어 풍자한다. <더 팬>이 자아로 인한 스스로의 고립을 선택했다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그 넓은 도시에서 고립된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담긴다.

1990년대에 연출한 각 작품들의 개성이 2000년대에 들어서며 서서히 융합되기 시작한다. 한 작품에 감성과 액션, 영상미 그리고 각본을 영상의 내러티브로 만들어 내는 토니 스콧만의 장르 아이콘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문장에 굳이 <맨 온 파이어 (2004)>, <데자뷰 (2006)>, <언스토퍼블 (2010)>에 대한 부연 설명은 명백한 시간 낭비다.

하지만 그에게도 개성의 패턴을 이탈한 작품이 있었다.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와 함께한 <트루 로맨스 (1993)>다. 컬트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각광을 받고 있던 당시 치명적인 매력의 컬트 영화로 열광을 이끌어낸 <트루 로맨스>는 타란티노 특유의 능글맞은 서사를 토니 스콧이 절묘한 플롯 메이킹으로 일궈낸 '괴작'이다.

이 영화는 플롯의 배열을 무시한 <펄프 픽션 (1994)>과는 달리 시간보다 공간의 위치 이동을 통해 플롯 하나하나가 옴니버스처럼 보이게 하는 독특한 구성과 로맨스라는 기초 시놉시스로 가장 토니 스콧 답지 않은 작품으로 꼽히고 있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 중 가장 개성적이라는 표현으로 우회할 수도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작품은 남성적이거나 마초와는 사뭇 다른 남자의 감성이 중심점에 놓여 있었다. <트루 로맨스> 이후로 이런 양상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트루 로맨스>는 가치 부여가 가능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2012년 8월 19일, 우리는 대중 영화를 장인의 손길로 다듬어왔던 명장을 잃었으며 아직도 액션과 스릴러 장르를 그처럼 매력적으로 교반해내는 감독 또한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자는 초창기의 마이클 베이를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말 그대로 초창기일 뿐 잠시 채워졌던 빈자리는 다시 빈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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