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로 유명했던 모 가전 회사가 내세웠던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광고 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입할 수 있는 '만능 표현'이었는데 스포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최고의 전력을 가진 두 팀이 총력전을 벌이는 단기전에서는 작은 차이로 우승팀과 준우승팀이 가려지곤 한다. 스포츠에서는 이를 '큰 경기 경험'이라고도 하고 '우승 DNA'라고도 한다.

지난 1일 막을 내린 2014-2015 V리그 남자부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작은 차이로 양 팀의 희비가 엇갈렸다. 대이변을 일으킨 OK저축은행엔 있고, 반란의 제물이 된 삼성화재에겐 없는 바로 그 것. 바로 송희채라는 믿음직한 수비형 레프트의 존재였다.

쟁쟁한 국가대표 동기들에 가려졌던 수비형 레프트

OK저축은행이 세터 이민규와 토종 거포 송명근은 분당 송림고 시절부터 절친으로 지내며 프로 무대까지 찰떡 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반면 익산 남성고 출신의 송희채는 경기대 입학 후에야 비로소 이민규, 송명근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당시 경기대는 문성민(현대캐피탈), 황동일(삼성화재), 신영석(상무)으로 이어지는 빅3가 나란히 프로에 진출하면서 다소 주춤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송명근, 이민규, 송희채로 이어지는 11학번 동기들은 경기대를 다시 대학 배구의 정상으로 끌어 올렸다.

프로구단 러시앤캐시(현 OK저축은행)가 창단될 때도 '경기대 트리오'가 중심이 된 것은 당연지사. 이민규와 송명근, 송희채는 나란히 '경기대 트리오'로 불리긴 했지만, 두 선수와 송희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었다.

경기대의 주 공격수인 송명근과 대학 배구 최고의 세터로 불리던 이민규가 성인 대표팀 명단에도 심심찮게 이름을 올린 것에 비해 송희채는 가끔씩 대학 선발팀에 뽑히는 것이 전부였다. 프로 진출 후에도 송명근이 주 공격수로 활약할 때 송희채는 서브 리시브를 전담하는 보조 공격수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자칫 동기들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이 들 수도 있지만, 송희채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루키 시즌부터 60% 이상의 서브 리시브 성공률을 기록한 송희채는 이번 시즌 수비 부문에서 서재덕(한국전력), 곽승석(대한항공)에 이어 3위(세트당 6.6개)에 올랐다.

서재덕과 곽승석이 지난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됐던 검증된 선수들인 점을 고려하면 프로 2년 차 송희채가 수비에서 기여한 부분은 결코 적지 않았다. 송희채의 숨은 활약이 있었기에 로버트 랜디 시몬과 송명근이 마음껏 공격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챔프전 운명을 가른 송희채의 안정된 수비

사실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던 삼성화재와 OK저축은행의 전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다. 레오나르도 레이바 마르티네스의 공격력은 시몬에 비해 약간 우위에 있고 세터의 노련함도 삼성화재의 유광우 쪽이 한 수 위다.

OK저축은행은 송명근이라는 확실한 토종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삼성화재보다 확실히 앞서는 부분이다. 하지만 삼성화재와 OK저축은행 모두 자신들이 가진 화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돼야 할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서브 리시브다.

레오나 시몬처럼 강서브를 구사하는 외국인 선수를 제외하면 리베로에게 얌전히 서브를 넣어주는 것은 상대에게 다양한 세트플레이를 하라는 배려와도 같다. 따라서 대부분의 서브는 리베로를 피해 상대의 수비형 레프트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챔피언 결정전에서 양 팀의 운명을 가른 것은 바로 수비형 레프트의 기본기였다. OK저축은행의 송희채는 챔프전 3경기에서 무려 67.8%의 리시브 성공률을 기록했다. 이민규 세터가 공격수들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도록 확실한 멍석을 깔아준 셈이다.

반면 삼성화재의 수비형 레프트로 나섰던 류윤식과 고준용의 리시브 성공률은 각각 37.1%와 29%에 그쳤다. 리시브가 그렇게까지 흔들리면 천하의 유광우 세터와 레오라 하더라도 뛰어난 공격력을 뽐낼 수가 없다. 불안한 서브리시브는 삼성화재가 시리즈 내내 고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사실 송희채는 챔프전 3경기에서 37.04%의 낮은 공격 성공률로 16득점 밖에 올리지 못했다. 사실상 공격에서는 거의 공헌을 하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송희채는 수비에서의 완벽한 활약을 통해 공격 부진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과거 삼성화재가 독주하던 시절엔 석진욱(OK저축은행 수석코치)이라는 당대 최고의 수비형 레프트가 있었다. 만약 앞으로 OK저축은행이 V리그의 강자로 군림한다면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위해 몸을 날리는 '살림꾼' 송희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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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송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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