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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16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주기가 됩니다.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에 참가하고 유가족들이 수개월 째 광화문에서 농성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진상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지 못하는 등 진상규명의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4월 16일 세월호 1주기를 맞아 45년 전 4월 일어난 한 사고를 살펴봤습니다. 그때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자 말

1970년 5월 22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김시스터즈의 귀국공연에서 당시 한창 뜨고 있던 가수 조영남은 <신고산 타령>의 가사를 즉석에서 바꿔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라고 불렀습니다. 조영남은 공연 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도망쳤으나 기관원에게 붙잡혔습니다. 조영남은 치도곤을 당할 뻔했던 상황에서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자진입대를 하고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가수 조영남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서울시가 마포구 창천동(지금의 홍익대학교 근처)에 건설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중 한 동인 15동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 사고로 아파트에 입주해 잠을 자고 있던 주민 33명이 목숨을 잃었고 38명이 다쳤습니다. 무너진 아파트 잔해가 아파트 아래에 있던 판잣집을 덮쳐 판잣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주민 1명도 목숨을 잃었고 2명의 주민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산중턱에 판잣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좋게 보지 않은 박정희 대통령은 판잣집 정리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박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각 구청별로 판잣집 등 무허가 건물의 현황을 파악한 뒤, 일부는 개량하고 일부는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에 대단지를 조성해 이주시키고, 나머지는 이른바 시민아파트를 지어 시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와우아파트는 이런 시민아파트 중에 하나였습니다.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산 중턱에 지어졌는데 이와 관련하여 김현옥 서울시장은 청와대에서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산 중턱에 지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민아파트 사업은 출발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안전에 대한 고려 없이 졸속적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먼저 건설 기간이 짧았습니다. 와우아파트의 경우 1969년 6월에 착공해 같은 해 12월 준공하여 6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지어졌습니다. 지금도 4층 높이 10개동 94가구를 짓는데 14~15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6개월 만에 지어졌으니 공사가 날림으로 진행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예산도 부족했습니다. 아파트 한 동을 짓는데 당시 돈으로 최소 1100만~1200만 원이 들어가야 했으나 실제로는 660만 원에 짓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실공사·부정부패·감독부실 등 총체적 부실이 낳은 인재

와우아파트 사건에는 뿌리 깊은 건설업계의 부정부패도 작용했습니다. 공사를 따내기 위해 뇌물을 주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뇌물을 준 만큼 공사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공사는 더욱 부실해졌습니다. 하청과정에서 아파트 한 동당 125만 원을 떼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건설업계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던지 와우아파트의 경우 ㈜대룡건설이라는 회사가 하청을 받아 공사를 맡았는데, 놀랍게도 이 회사는 무허가 회사였다고 합니다. 뇌물을 주면 무허가 회사에도 공사를 맡길 만큼 썩어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습니다.

공사도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와우아파트는 무려 70°라는 경사진 산 중턱에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기초가 튼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공사는 지질검사도 실시하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아파트 무게를 대부분 지탱해야 하는 기둥을 7개만 설치하는가 하면 기둥에 철근 70개를 넣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5개만 썼습니다. 게다가 건물의 안전을 위해 땅을 깊이 파내려가 암반 위에 기둥을 세워야 했으나 땅을 2m만 파내려가 암반이 아닌 흙 위에 기둥을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아파트 벽에 쓰는 콘크리트에는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시멘트를 적게 넣어 콘크리트라기보다는 자갈과 모래 반죽에 가까웠고 반죽에 쓰는 물도 불순물이 많이 들어 있는 하수도 물을 썼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1㎡에 280kg의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가 되었는데,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제 하중은 1㎡당 900kg 내외로, 설계 하중의 3배를 넘었습니다. 이는 브로커들의 개입 등으로 입주권 가격이 크게 올라 원래 입주하기로 했던 빈민층이 들어오지 못하고 살림살이가 비교적 많은 계층이 입주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이미 사고 징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고가 나기 나흘 전 무너진 15동 건물의 옆에 있던 14동 건물의 벽에 갑자기 금이 갔습니다. 서울시 당국은 14동에 살던 주민들을 사고가 난 15동 건물로 옮겼습니다. 14동의 주민을 15동으로 옮기면서 시 당국은 완전 합격된 이상 없는 건물이라고 장담했고, 14동 건물을 보수하면서도 15동 건물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와우아파트 참사는 정부기관의 무리한 공사계획과 낮은 공사비 책정, 시공회사의 부실, 그리고 부정부패에 따른 관리감독 부실 등 총체적인 부실이 낳은 인재(人災)였습니다.

세월호 사고에도 적용된 와우아파트 참사의 '공식'

세월호 희생자 오영석(단원고)군의 엄마 권미화씨가 3월 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을 촉구하며 시작 된 416시간 농성 둘째날 밤, 비를 맞으며 농성을 하고 있다.
▲ 비 맞으며 밤샘 농성하는 유가족 세월호 희생자 오영석(단원고)군의 엄마 권미화씨가 3월 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을 촉구하며 시작 된 416시간 농성 둘째날 밤, 비를 맞으며 농성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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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에 대한 고려, 부정부패, 안전관리 소홀, 부실공사 등의 잣대로 세월호 사고를 바라봅시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안전에 대한 고려가 뒷전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세월호는 1994년 건조된 후 2012년까지 일본에서 운행된 배입니다. 그래서 선박연한이 20년이었던 한국에서는 원래 2014년 폐기되었어야 할 배였습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당시 선박연한을 25년에서 30년까지 연장해달라는 업계의 요구를 정부가 수용했습니다. 그러자 선박회사들이 해외에서 20년 사용한 배를 싸게 들여와 약간의 보수를 거친 뒤 국내에서 운행했습니다. 세월호도 그런 배 중에 하나였습니다.

와우아파트가 박정희 대통령의 전시행정을 위해 안전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건물을 지어 사고가 났다면 세월호 사건은 업계의 이익을 위해 안전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노후선박을 운행하다가 사고가 난 셈입니다.

세월호 사고 배경에도 뿌리 깊은 부정부패가 있었습니다. 해수부에서 일하던 공무원이 해운조합과 한국선급의 고위직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카르텔을 구축해 이른바 '해피아'라고 불리는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해운조합 역대 이사장 12명 중 10명이, 한국선급 회장 10명 중 8명이 해양수산 부처 고위관료 출신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관리, 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와 같이 노후선박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매년 선박안전공단의 검사를 통과해야 하고 운행할 때도 안전과 관련한 조치를 철저히 진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 1개밖에 펴지지 않았던 구명벌 문제, 일상적인 과적, 29%만 채운 평형수 문제 등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관리, 감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월호의 증축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월호는 늘리기 위해 수직 증축해 무게중심이 위쪽으로 옮겨지면서 복원력이 저하되었습니다. 배가 기울어졌을 때 옆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힘이 복원력인데, 이 힘이 약해져 옆으로 넘어갈 위험이 커졌다는 말입니다. 선박검사를 맡은 한국선급은 1차 검사 때 복원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별다른 보완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차 검사에서 통과시켜주었습니다.

세월호는 증축 이후 시험운항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세월호 소유주인 청해진 해운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월호 증축과 개·보수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과 한국선급 등의 기관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징후가 있었음에도 책임 있는 기관들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규정을 어기고 과적하고 평형수를 빼버렸습니다. 와우아파트 건설과정에서 기둥에 넣을 철근을 빼고 콘크리트에 하수도 물을 넣고 시멘트를 빼는 것과 같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진상을 밝히지 못한 참사가 준 뼈아픈 교훈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후 김현옥 서울시장이 물러나고 마포구청장 및 관련자들은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재판결과 관리 책임자인 마포구청장은 무죄를 받았습니다. 시민아파트를 무리하게 밀어붙여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김현옥 서울시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오히려 1971년 10월 내무부장관으로 기용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마포구의 건축과장과 건축과 기사보, 하청업자에게만 4년 이상의 형이 선고되었을 뿐입니다.

세월호 사고도 비슷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154명이 구속되는 등 총 399명이 입건되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세월호 선장 및 선원, 일선 해수부 공무원, 청해진해운 임원 등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던 김장수 전 안보실장은 사퇴 9개월 만에 중국 주재 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김현옥이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이후 내무부장관이 된 것과 꼭 닮았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대처가 와우아파트 사건 때보다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와우아파트 사고 이후 박정희 정부는 시민아파트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사 결과 완공된 434동 중 349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와 대대적인 보수공사 및 철거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는 어떨까요? 2014년 10월 열린 국정조사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는데요. 세월호 사고 직후인 4월 17일부터 8월 31일까지 일어난 해양 선박 사고가 총 341건, 사고 선박 406척으로 2013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사고 건수로는 99건, 선박 숫자로는 95척이 늘어난 것입니다. 정부가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제대로 안전관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 벌어진 대형사고가 박근혜 정부의 태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9월 30일 홍도 부근에서 일어난 바캉스호 좌초사고와 12월 1일 러시아 베링해에서 일어난 오룡호 침몰사고, 둘 다 노후선박이었습니다. 심지어 원양어선의 90%가 만든 지 21년이 넘은 노후선박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정부가 세월호 참사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이런 부분부터 살펴봤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정부는 사고의 주요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규제완화를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 1주일 후, 2014년 4월 22일 국무회의는 세월호 사건의 한 원인이었던 수직증축을 아파트에도 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2015년 2월 27일에는 이미 설계수명을 넘은 월성원전 1호기의 운행을 2022년까지 연장했습니다. 제2의 제3의 세월호가 곳곳에서 잉태되고 있는 꼴입니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라는 참사를 겪었지만 건설업계의 비리는 근절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1990년대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끔찍한 참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었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참사를 막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와우아파트,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이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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