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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장님, 이번 승진에서 결과가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년을 바라봅시다."

3월 말, 팀장님이 퇴근 즈음 전화를 주셨다. 이미 예상은 하던 바였으나 결과를 직접 듣고나니 뭔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연년생 아이 둘을 낳고 복직한 지 3년차, 나는 아직도 과장이다. 대리에서 과장직급으로 승진할 때, 남들은 재수, 삼수도 하는 직급심사를 한 번에 통과해서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때도 있었는데...

차장이 되는 단계에서 나는 몇 년째 과장에 머물러 있다. 내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차장 진급을 했고, 몇몇은 부장으로 발탁 승진도 했다. 내가 알던 대리들도 차장이 되었다. 나만 과장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 사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복직 3년차 직장맘, 뭘 하고 살았냐면...

​여자들이 직장생활을 끝까지 잘 해내려면, 결혼과 출산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이 인간의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몇 년 고생을 했다. 그 사이 과장 말년이 되었고, 그 해 첫 아이가 찾아왔다. 다행히 회사에서는 눈치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지만, 그 해 나의 고과점수는 'C'였다. S, A, B, C 중 가장 낮은 점수다.

이유는 많았다. 임신 초기 당시 해외프로젝트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2, 3번 해외출장을 다녀야했다. 그러나 난 유산기가 있었다.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인력을 교체하고 프로젝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되지 못했다. 임산부를 받아주는 프로젝트는 없었으므로. 당연히 회사의 허드렛일이나 규모가 크지 않은 제안서 등에 투입되어 일하다가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회사 입장에서는 크게 성과를 낸 일이 없었으니 당연히 고과점수는 'C'였다.

첫째 육아휴직 기간 동안 둘째를 임신했다. 불임으로 고생했던 터라 생각지도 못하게 둘째가 찾아왔다. 3개월 출근하고 나서 다시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 3개월 동안 무슨 일을 했겠는가. 또 허드렛일이나 하다가 휴직에 들어갔다. 물론 회사에서는 눈치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다. 그 해 내 고과점수는 당연히 'C'였다. 나도 별 이의 제기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둘째까지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한 첫 해. 고과점수보다 더 두려운 것은 두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오로지 내 생활을 일에 맞추던 직장생활에서 '아이'라는 존재를 병행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처절하고 힘들었다. 남들은 날개 달고 날아가는데, 나는 모래주머니 달고 기어가는 느낌이랄까. 일에 대한 성과보다는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더 컸던 때다.

과장 말년​에 멈추어 있던 내 커리어는 두 아이의 육아휴직을 종료로 다시 시작 되었다. 복직한 첫 해, 당연히 승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두 번째 해에는 아이들 자는 얼굴만 볼 정도로 바빴다. 회사에서도 기대가 많은 프로젝트였고, 성과도 좋았다. 고객감동상도 받았다. 하지만 승진은 하지 못했다.

승진은 당연히 포기해야 했다. 직무이동을 하고 나서 적어도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얼굴은 볼 수 있게 되었다.
 승진은 당연히 포기해야 했다. 직무이동을 하고 나서 적어도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얼굴은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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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은 3년의 고과를 평균 내는데, 나는 이미 두 해 평가 점수가 나빴으니 승진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해, 갓 돌을 넘긴 둘째와 30개월의 큰 아이는 엄마 얼굴을 한 달에 한두 번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큰 아이는 "엄마는 왜 집에 안 와?"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열심히 살았는데 뭘 했는지 모를 한 해였다.

그런데, 그 해 어린이집에서 해준 미술심리진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이의 자존감이 낮고, 정서가 불안정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이 하루 10분이라도 아이를 안아주고 스킨십해 주라고. 단 10분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선생님 앞에서 그냥 울어버렸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매일 아이들 자는 얼굴만 보는데 어떻게 안아주나. 아이들은 엄마가 집에 오는 줄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냥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주말에 한두 번 같이 놀아주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는 괜찮지 않았나보다. 표현을 하지 않아서였고, 표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후회의 시간이 이어졌다. 육아서에서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직무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일은 계속 하고 싶은데, 현재 보직으로 일을 하다간 아이도, 나도, 일도 모두를 놓칠 것 같았다. 현재 업무에 대한 매너리즘도 있었다. 회사 내에서 타 팀으로 ​직무이동을 시도했다. 직무이동이란 것이 새로 이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기존의 커리어를 버리고,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야 하는 것이라 결심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승진은 당연히 포기해야 했다. 직무이동을 하고 나서 적어도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얼굴은 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달 후 다시 검사한 미술심리검사에서 큰 아이의 자존감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TV에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는 듯 아이의 그림과 얼굴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대신 내 자존감은 낮아졌다. 당연한 듯 승진에서 밀렸고, 새로운 직무에서 내 능력은 제로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자존감과 엄마의 자존감을 맞바꾼 셈이다.

아이의 자존감과 맞바꾼 엄마의 자존감, 그러나...
승진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던 날, 그 날은 반차를 내고 아이들에게 일찍 데리러 가마, 약속하던 날이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 승진에서는 떨어지고, 아이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내가 이럴려고 일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던 날이다. 둘 다 만족스러우면 좋을 텐데, 둘 다 늘 만족스럽지 못하게 달려야 하는 직장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쓰리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에 퇴근하며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약속 못지켜서 미안해~ 지금 얼른 집에 갈게."
"엄마, 괜찮아. 다음에 일찍 오면 되지."

​그래봐야 이제 6살인데, 어느 새 이렇게 훌쩍 커버렸나. 아이의 배려에 하루 동안 참았던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괜찮아. 다음에 승진하면 되지 뭐.' 아이의 말을 되새겨본다. ​승진 누락에 대한 아픔은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다. 직장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빨리가는 것보다 오래 가는 것이니까.

아이 둘 키우면서 조금 무겁게 가겠지만, 빨리 가면 보이지 않았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 가게 될 게다. 오늘은 아이스크림 한 통 사들고 들어가야겠다. 신나서 팔짝팔짝 뛰는 아이들 얼굴이 그려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틀, 두가지 삶>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직장맘, #육아휴직,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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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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