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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산골 대아서당에서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한적한 산골 대아서당에서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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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8일, 거창으로 가는 길. 어탕국수나 한 그릇 뚝딱 먹었으면 좋겠다는 일행의 닦달에 못 이겨 함양읍내에 들렀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식당은 예전의 살갑고 푸근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주인이 황급히 나와서 '오늘은 장사 안 허요'하는 말에 먼 길 달려온 보람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손님이 오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근래에 꽤 유명세를 치르더니 급기야 질퍼덕한 장바닥 분위기는 간 데 없고 새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읍내에서 대충 요기를 하고 오후 두 시에 있는 강연에 늦지 않도록 거창으로 내달렸다. 산골짜기를 뻥 뚫어 놓은 4차선 도로에 예전의 굽이굽이 오지를 연상하기는 힘들었다.

강연 직전의 대아서당
 강연 직전의 대아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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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

읍내를 가로지르는 위천을 따라가다 시가지를 벗어나니 한적한 시골길이다. 읍내의 넓은 들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고 이내 깊은 협곡의 좁은 산골짜기로 빨려 들어갔다. 오후 두 시경 외딴 마을에 다다랐다.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 1766 대아서당. 이곳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이름하여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이다. 이 산골마을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다니. 대체 어떤 강좌일까. 사실 대도시는 고사하고, 지방의 도시도, 거창 읍내도 아닌, 읍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 마을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좌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번듯한 세미나실을 갖춘 강연회 장소가 아닌 고택에서라니….

주소에 적힌 대로 마을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강연회를 주최한 곳은 연구공간 '파랗게날'이다. 매달 열린 인문학 강좌는 햇수로 벌써 4년째이다. 2011년에 처음 시작한 인문학 강좌는 거창 일대의 고택에서 매달 진행되었다.

3월 28일 대아서당에서 열린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
 3월 28일 대아서당에서 열린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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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파랗게날'의 인문학 강좌
 연구공간 '파랗게날'의 인문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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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놀라운 건 여태까지의 강연자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 지난 4년 동안 각 분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아' 할 정도로 쟁쟁한 강연자들이었다. 올해만 해도 1월에는 정치사학자 김석근, 2월에는 미술학자 김상엽이 강연을 했고, 4월에는 국문학자 이상택 서울대 명예교수, 6월에는 염무웅 문학평론가, 7월에는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 9월에는 한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10월에는 이상우 영화감독, 11월에는 김승룡 부산대 교수, 12월에는 박태일 경남대 교수 등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이곳 거창을 찾아 고택에서 인문학 강좌를 한다.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 39번째 강연이 열린 대아서당은 마을 뒤쪽 한적한 곳에 있었다. 소나무 몇 그루가 마당을 멀찍이서 두르고 왼쪽으론 작은 계곡물이 감싸 흐르는 고요한 곳이었다. 대아서당은 130년 전 지역 유림들이 강신계(講信契)를 만들어 세운 서당으로, 지금은 바로 옆에 있는 행복한절에서 스님의 거처로 빌려 쓰면서 퇴용당(退勇堂)이라 이름하고 있었다.

고택 마루에 한두 명씩 걸터앉기 시작했다. 마당에도 덮개가 깔렸다. 마당 주위에는 방명록과 행사안내장, 강의자료 등이 바람에 날려갈세라 작은 돌 아래 놓여 있다. 꼭 필요한 사람만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따뜻한 온수통과 사탕, 우리밀빵이 주전부리로 소박하게 놓여 있다.

고택에서 열리는 39번째 인문학 강좌는 보리출판사 대표이자 변산공동체를 일군 윤구병 대표의 '다스림은 다 살림'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고택에서 열리는 39번째 인문학 강좌는 보리출판사 대표이자 변산공동체를 일군 윤구병 대표의 '다스림은 다 살림'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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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파랗게날'

보리출판사의 대표이자 변산공동체를 일군 윤구병 대표의 '다스림은 다 살림'이라는 주제로 39번째 강연이 시작됐다. 연구공간 '파랗게날' 이이화 대표의 간략한 인사말에 이어 마을에 사는 동래 정씨 어르신인 정의석 할아버지가 대아서당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으로 마을에 있는 행복한절 부주지 서복 스님의 인사말이 있은 후에 윤구병 대표의 강연이 본격 시작됐다. 윤구병 대표는 함께한 고등학생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흔하고 쉬운 우리말로 강연을 해서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인문학 강좌를 저처럼 상스럽게 하는 분도 있을까요"라고 말해 좌중의 박수세례를 받기도 했다.

왼쪽부터 정의석 어르신, 행복한 절 스님, 이이화 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
 왼쪽부터 정의석 어르신, 행복한 절 스님, 이이화 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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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들은 이날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 고택에서 자연의 강좌를 들었다. 제각기 고택 마루에 걸터앉은 채로, 마당에 앉은 채로, 혹은 선 채로 강좌를 들었다. 강연자의 목소리가 때로는 바람소리처럼 들려왔다. 청중들은 저마다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귀를 열고 마음을 열었다.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들려주는 음성은,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와 잠시 가슴에 머물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듯, 인문학의 목소리로 가슴을 데우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연구공간 '파랗게날' 인문학 강좌 안내 리플릿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구공간 파랗게 날은 매달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를 마련합니다. 잎 같고 꽃 같은 글들로 인문 월간 <초록이파리>를 냅니다. 우리 곁의 문화유산을 찾아 훌쩍 떠납니다. 문학, 예술, 철학, 말과 글 등 인간의 근본 문제를 성찰하는 인문학은 인간의 내적 성장을 그 이념으로 합니다.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는 인문학을 아끼는 누구에게나 열린 시민강좌입니다."

강좌 발행물을 마음만큼 후원하고 가져가는 참석자들
 강좌 발행물을 마음만큼 후원하고 가져가는 참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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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을 보니 이곳 거창뿐만 아니라 서울, 인천, 오산, 남원, 부산, 대구, 진주 등 전국 각지에서 강좌를 들으러 왔다. 회비 10만 원을 내면 연구회원이 된다. 물론 인문학 강좌는 무료로 참여할 수 열린 시민강좌이다. 인문학 강좌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2시에 거창의 명승고택에서 열린다.

문득 연구공간 '파랗게날'의 이이화 대표에 대해 궁금해졌다. 이 외진 곳에서 인문학 강좌를 여는 이유가 뭘까. 이래저래 궁금한 게 많은 하루였다. 그렇다고 첫 만남부터 모든 것을 알려는 건 욕심일 것이다. 그에 대한 인터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대아서당에서 인문학 강좌 참석자 단체사진
 대아서당에서 인문학 강좌 참석자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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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택에서듣는인문학강좌, #파랗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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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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