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장수상회>에서 꽃집 여인 금님 역의 배우 윤여정이 3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장수상회>에서 꽃집 여인 금님 역의 배우 윤여정이 3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누군가의 엄마에서 누군가의 할머니로 배역이 바뀌는 건 나이를 먹는 배우들에겐 자연스런 변화다. 그 흐름에서 윤여정은 단연 독보적이다. 물론 그녀 역시 숱한 엄마 역을 맡아왔지만 드라마와 영화, 그것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오고 가며 주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보조 캐릭터가 아닌 그만의 매력을 담아 표현해왔던 것이다.

강제규 감독의 신작 <장수상회>에서 윤여정은 전면에 나섰다. 일흔을 넘긴 박근형과 호흡을 맞추며 설렘의 감정과 가족에 대한 애잔함도 담아냈다. 독거노인으로 동네에선 꼬장꼬장한 노인 성칠(박근형 분)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임금님 역을 두고 '황혼 로맨스'라는 홍보 문구가 붙었다.

이에 윤여정은 "꽃뱀 할머니도 아니고 나름 깊은 사연이 있는데 불만이다"라는 말로 가감 없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윤여정은 "홍보사 입장에선 여러 전략 중 하나겠지만 배우 입장에선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영화라고 본다"라며 솔직한 생각부터 전했다.

50년 만에 만난 박근형, 난생 처음 입어본 꽃무늬 원피스

 영화 <장수상회>의 한 장면.

영화 <장수상회>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누가 다 늙은 박근형과 윤여정의 로맨스를 보러 오겠어요. 제가 시나리오를 읽고 아! 했던 것처럼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 느낄 지점이 있을 겁니다.

사실 로맨스라고 해서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냥 순서대로 일을 한 거예요. 처음 <장수상회>를 제안 받았을 땐 TV 드라마 일정이 있어서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몇 달 뒤 다시 연락이 왔기에 '아. 내가 해야 하는 작품인가 보다' 하고 결정한 거죠. 내 나이에는 욕심을 많이 버려야 해요. 욕심낸다고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인연이 되면 작품을 하는 거죠. 내가 할 작품이면 다시 오게 돼 있어요."

상대 역을 맡은 박근형과는 구면이다. 1971년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각각 숙종과 장희빈 역으로 만났다. 약 44년 만에 재회한 셈인데 당시를 두고 윤여정은 "박근형 선배에게 많이 지적 받았는데 그땐 신인이었으니 당연했던 것"이라며 "내가 유능한 연기자가 아니니까 (혼만 내지 말고) 눈을 보면서 잘 알려 달라고 하니 다른 배우들이 올 때 '어유~ 저기 유능한 연기자가 오신다'며 일부러 내게 핀잔도 주곤 했다"고 일화를 전했다.

쌓아왔던 시간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었다. 윤여정은 "슬프면서도 재밌는 사실이 이제는 같이 늙어가고 있잖나. 박근형이 나보다 7년 선배인데 서로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는 관계"라며 "<장수상회>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선수끼리 잘 해보자'하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장수상회>에서 꽃집 여인 금님 역의 배우 윤여정이 3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선수의 입장'에서 바라본 <장수상회>는 가족과 죽음, 그리고 소통에 대한 영화였다. 윤여정은 "난생 처음 꽃무늬와 분홍색 옷을 입었는데 내 안에 있던 또 다른 모습을 강제규 감독이 끌어내주었다"며 "그간 내가 너무 센 역할만 했나보다. 이번 영화로 특별히 뭘 더 생각했던 아니지만 분명 로맨스 이상의 다른 걸 전할 이야기다"라고 설명했다. 

"연기 외적으로는 죽음에 대해 잘 생각 안 하려 해요. 누구나 죽잖아요. 이 나이가 되도록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도 봤고, 많이 훈련을 한 거지. 죽음을 어찌 맞이할지 생각도 해보곤 했는데 요즘은 그다지…. 연기하면서는 오히려 날 역할에 대입시키진 않으려 했어요.

그리고 세대 간 소통? 그거 잘 안 돼! (웃음) 우리 엄마가 아흔 둘인데 맨날 싸워요. 소통이란 게 어떤 의미로는 상대를 고쳐보려는 의도가 있잖아요. 절대 못 고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아야 해요. 윗세대는 그 시대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저렇게 됐구나 생각해야죠. 나 역시 나대로 생을 마감할 거잖아요. 고치려 하지 말고 가만히 바라봐 주세요."

멜로를 대하는 윤여정의 '불온한' 시선? "배우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어"

앞선 대목에서 느낄 수 있지만 애초에 멜로에 대한 윤여정의 시선은 남들과 달랐다. "얼마전 드라마 <미생>을 보고 혼자 펑펑 울었다"는 그는 "그 길로 친한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너네 멜로 이야기 좀 그만 쓰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남녀의 사랑이 아닌 오 차장(이성민 분)과 장그래(임시완 분)의 끔찍한 사랑, 그 동료애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장수상회>가 정말 황혼의 로맨스만을 말하려 했다면 난 참여 안 했을 수도 있어요. 적어도 내 경우엔 늙어서 설렘이 안 생기던데, 이때 되면 남녀 구분이 없어지잖아요. 이 나이에 설레면 심장 마비로 죽어요! (웃음) 철없을 때 만난 사람들이 마지막 인생을 보내는 것에 중점을 둔 걸로 이해했습니다. 저 역시 죽어가는 입장에서 해보고 싶은 것들을 표현하려 했어요.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영화에 나오는 내용처럼 이렇게 살다가 잘 죽으면 좋겠다' 말을 했어요. 죽음을 다들 무서워하는데 우리가 죽어야 다음 세대가 또 나오죠. 200살까지 살 거야? 그냥 아름답게 살다 가야지. 난 여배우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여배우가 그리 멋있는 직업은 아니에요. 멋있어 보이는 거지. 그래서 쓸데없는 돌팔매질도 당하는데 난 그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라고 평소에 다르게 사는 건 아니잖아요. 그저 한 여자로 어떤 사람을 잘 만나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아름답겠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영화<장수상회>에서 꽃집 여인 금님 역의 배우 윤여정이 3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이 지점에서 윤여정은 데뷔 당시를 언급했다. TBC 3기 공채 런트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윤여정은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돈 좀 벌어보려다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라며 "우리 시대 때는 여자가 직업을 갖는 게 다들 한때라고 생각해서 결혼만 잘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평가받던 시기"임을 강조했다. 가수 조영남과 결혼 후 10년 간 연기를 접기도 했던 윤여정은 이혼 후 지금까지 배우로 한 길을 걷게 된 배경을 말했다.

"저도 결혼생활을 잘했으면 다른 평가를 받았겠죠.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만큼 소용없는 일도 없어요! 얼마 전 손석희씨가 진행하는 뉴스에 출연했는데 나보고 '김태희 같은 미녀도 아니다'라며 아픈 곳을 찌르더라고. (웃음) 그만큼 우리 때엔 미남미녀가 아니면 배우를 할 수 없던 시기였어요. 그 시대에 내가 배우를 한 건 기적이었죠.

김기영 감독(윤여정의 출연작 <충녀>(1972)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 윤여정을 비롯해 전도연-이정재 등이 출연했던 <하녀>(2010)도 그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영화다-편집자 주)이 날 많이 울렸는데 '미스 윤은 모든 사람에게 배우가 될 용기를 줬어'라고 한 말이 기억나네요. 내가 미녀가 아니라는 얘기였겠지!

하여튼 결혼생활을 잘 못해서 배우를 오래 하게 된 것일 수도 있어요. 이걸 보면 행복이 불행일 수도 있고 불행이 행복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 내 열등 의식도 있었겠죠. 워낙 목소리가 안 좋다는 얘기를 듣고, 예쁘지도 않았으니 그걸 이겨보려고 한 것일 수도요."

그만큼 윤여정의 중심은 탄탄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 제작 특성상 한 작품으로 주목 받으면 비슷한 역할이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다"면서도 "없이 살면서도 비슷해 보이는 역할은 피하려 애쓰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이 담백한 말에 앞으로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보일 모습이 더욱 궁금해졌다.  

'꽃보다 누나'의 윤여정 "나영석 빨리 망해봐야"

 영화<장수상회>에서 꽃집 여인 금님 역의 배우 윤여정이 3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인터뷰 도중 윤여정이 출연한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 얘기가 나왔다. 그간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고사한 윤여정은 나영석 PD의 설득에 넘어갔고, 이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의 큰 사랑도 받았다. 이에 윤여정은 "배우로 평가받는 건 내 몫이라 칭찬과 비판 모두 불만이 없는데 예능에서 실제 내 모습을 보이고 평가 받는 건 싫었다"며 윤여정은 "왜 실생활 모습을 보이고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조용히 늙고 싶었다"고 당시 출연을 고사했던 이유를 전했다.

"그런데 나영석이 날 함락시켰어요. 내 아들 보다 한 살 어린데 그의 진정성과 진지함에 반했던 거 같아요. 어디서 배운 척하면서 그걸 써먹으려 하는 사람은 싫은데 나 PD는 그런 게 없더라고요.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영석에게 '빨리 망해야 한다'는 말도 했어요. 아직 젊잖아요. 망해봐야 더 성장하지. 사실 그의 후속 프로그램인 <삼시세끼>도 망할 줄 알고 흔쾌히 출연했는데 더 잘 되더라고. (웃음) 안 망할까봐 걱정하고 있어요. <꽃보나 누나> 다음 편에도 혹시 출연 제의가 온다면 기꺼이 나갈 수 있어요. 신인 작가나 감독이라도 우리 세대에 없는 신선한 감각이 있다면 기꺼이 출연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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